[정신의학신문 : 윤희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L 님의 사연

선생님들의 방송을 듣고 있으면 토닥토닥 두드려 주는 것 같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껴요. 앞으로도 좋은 방송 많이 부탁드립니다!

지금까지 경계성 인격장애에 대해 방송되지 않은 것 같아서 메일 보내봅니다. 제 진단명은 우울증과 경계성 인격장애입니다.

최근에 남자 친구와의 일로 제 안의 경계성 인격장애 성향에 대해 다시 느꼈고,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걸 느꼈습니다.

 

지금 남자 친구와 만난 지는 3년이 넘어갑니다.

저는 이전 남자 친구와 만날 때도 그랬고, 지금 남자 친구와도 연애 초반 2년 정도까지는 집착을 많이 했습니다.

예를 들면 남자 친구가 일하는 곳에 가서 남자 친구의 차 안에서 하루 종일 혼자 놀고 있다가 같이 퇴근을 하든지, 전화는 받을 때까지 하는 건 기본이고 옆의 친구 확인도 필수, 현재 위치를 확인 가능한 사진전송도 필수였어요.

남자 친구가 전화를 계속 안 받으면 일하는 곳에 갔었고,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의 문을 제가 직접 열고 들어가 확인을 하거나, 헤어지면 자살할 거라고 이야기도 했고요.

그러다 그 모든 것을 받아줬던 전 남자 친구에게 제가 먼저 헤어지자 하고 모든 연락을 끊으면서 헤어졌습니다.

 

사진_픽셀

 

지금 남자 친구와는 사귄 지 2년 정도가 지나서야 술도 잘 안 마시고, 주변에 여자도 없고, 전화도 잘 받는 등 믿음이 생겨서 이제는 남자 친구 혼자 친구들과 해외여행을 간다고 해도 다녀오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믿고 있습니다.

제 이런 성향은 남자 친구에게만 아니라 상담을 받고 있는 선생님께도 반복이 되었습니다.

선생님께 좋아한다는 말을 많이 했고, 선생님이 만약 저를 싫어해도 선생님은 당분간 이 병원을 떠나지 않으실 거니깐 저는 선생님을 보러 올 거라고. 협박 비슷하게 말하기도 했어요.

 

이전에 다녔던 회사는 성추행 사건과 일에 대한 압박이 심해지면서 더 이상 감당할 자신이 없어져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들어 퇴사를 한지 세 달째고요. 힘이 들 때 죽고 싶다는 마음이 든 적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제 생활의 패턴이 대부분 그래요. 시도해보고 힘이 들 것 같으면 노력하기보다는 포기하고 도망쳐버리는 어린아이 같은 패턴이 반복됩니다.

그래도 제 선생님은 일상생활이 가능한 저는 인격 장애까지는 아닌 인격 성향이니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아도 된다고 하셨고, 안정감을 주는 남자 친구 덕분에 지금은 잘 지내고 있으니 괜찮은 것 같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며칠 전, 우연히 남자 친구의 핸드폰 화면을 보게 되었고 여러 대화창 중에 ㅇㅇ누나라는 이름과, 애칭으로 저장된 누군가를 발견했어요.

순간 저는 미칠 것 같은 기분을 느꼈고 머리가 너무 아파왔어요. 그 사람들에 대해서 온갖 상상을 하면서 한두 시간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간신히 버티고 있다가, 도저히 확인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어요.

그래서 남자 친구가 자리를 비운 사이 전화를 걸어 그 애칭으로 저장된 사람이 저라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진정이 되었고, ㅇㅇ누나의 정체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친척 누나겠지‘라며 스스로를 다독이고 겨우 넘어갔어요.

 

분명 전보다는 나아졌을 수 있어요. 하지만 다시 제 안의 경계성 인격 성향을 마주했고 너무 놀랐어요.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또 한 번 좌절했고, 삶을 더 살아야 함이 더 두려워요. 앞으로도 계속 이런 모습을 보일 저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요.

계속 드는 생각은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네요. 저는 삶의 의미, 이유를 모르겠어요.

제 이런 극단적인 마음이 설령 질병의 일부라 해도 이것이 저니까 이런 저도 인정해주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저는 틀린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일 뿐이니까요. 

 

사진_픽사베이

 

뇌부자들의 답장

안녕하세요, 뇌부자들입니다.

L 님의 사연을 읽으면서,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과 멀어진다고 느끼는 상황에서 심한 불안을 느끼시는 것, 이것이 본인의 문제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변하지 않는, 너무나 힘든 시간을 견뎌 오셨을 것을 생각하니까 정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스스로의 진단이 경계성 인격 장애라고 하셨는데, 이 진단은 정신건강의학과에서 굉장히 중요한 이슈가 되는 진단입니다.

경계성 인격 장애를 진단받은 사람 중 60%는 자해 시도를 하고, 사망 원인의 10%가 자살일 만큼 자살 또는 자해 시도가 문제가 됩니다.

또한 감정 조절의 문제로 인해 대인 관계에서 갈등이 빈번하게 발생하는데, 이로 인해 사회적 상황에서의 부적절한 언행, 갈등이 반복되어서 사회생활이 어렵고, 가족이나 연인 같은 사적인 관계, 애착이 형성된 대상과의 관계에서는 더 큰 갈등이 일어나곤 합니다.

그리고 전체 인구의 2% 정도, 정신건강의학과 외래 환자의 10% 정도에 달할 정도로 높은 유병율을 보이지만, 경계성 인격 장애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보니까 치료 환경에 오는 비율도 높지 않고, 꾸준히 치료를 받는 경우는 더 드물다고 합니다.

그저 ‘성격이 예민하다’라고 생각하고 지내기 쉽고, 치료를 받으러 왔다가도 자신에 대한 작은 부정적인 반응도 공포에 가까운 두려운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오래 유지를 하기 어렵다고 하죠.

 

<DSM-5의 기준>

대인관계, 자기상, 정동에서의 불안정성과 심한 충동성이 광범위하게 나타나며 이러한 특징적 양상은 성인기 초기에 시작하여 여러 가지 상황에서 일어난다. 다음 중 5가지 이상의 항목을 충족시킨다.

1. 실제적이거나 가상적인 유기(abandon)를 피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 5번 기준에서 말하는 자살 또는 자해 행위는 포함되지 않는다.

2. 극단적인 이상화와 평가절하가 교차하여 반복되는 불안정하고 강렬한 대인관계 양식

3. 정체감 혼란: 심각하게 지속적으로 불안정한 자기상 또는 자기 지각

4. 자신에게 손상을 줄 수 있는 충동성이 적어도 2가지 영역에서 나타남(예: 낭비, 성관계, 물질 남용, 무모한 운전, 폭식)

5. 반복적인 자살 행동, 자살 시늉, 자살하겠다는 위협, 혹은 자해 행동

6. 현저한 기분 변화에 따른 정동의 불안정성(예: 대체로 수 시간 지속되며 드물게는 수일간 지속되기도 하는 간헐적인 심한 불쾌감, 성마름, 불안)

7. 만성적인 공허감

8. 부적절하고 심한 분노, 혹은 분노 조절의 어려움

9. 스트레스에 따른 일시적인 망상적 사고, 혹은 심한 해리 증상

 

경계성 인격 장애 환자들은 표면적으로 정말 다양한 증상을 보입니다.

감정의 극적인 변화와 표현, 자해나 폭식 또는 알코올 남용 등의 자기 파괴적인 행동, 해리와 왜곡, 부정 등 현실 검증력을 잃은 모습까지 나타내게 되죠.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계성 인격 장애의 핵심 병리인 유기 불안(abandonment fear)과 분리(splitting)에 대해 이해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경계성 인격 장애 환자는 애착을 느낀 상대와의 관계에서 내가 언제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유기 불안이 극심합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별 문제가 없다가도 아주 작은 의심 거리만 보게 되어도 망상적 사고에 가까운 판단으로 직행해서 두려움, 분노, 불안의 감정을 극심하게 느끼게 됩니다.

심한 경우 꿈속에서 상대가 나를 떠나는 것을 본 것만으로도 이런 감정 폭발로 이어지기도 하죠.

이런 유기 불안에 대해 ‘낯설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큰 도시 한복판에서 갑자기 부모가 사라져 버린 어린아이의 절망적인 심정’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두려운 감정이라고 합니다.

 

사진_픽셀

 

분리(splitting)는 어떤 대상에 대해서 완전히 좋거나 나쁜 것으로 인식하는 방어기제의 일종입니다.

작은 호의에 크게 감동해서 운명의 상대로 생각했다가, 사소한 잘못에 크게 분노하고 죽일 놈이라고 폄하하게 되는 일이 일상에서 반복이 됩니다.

내 앞에 있는 대상이 때로는 장점을 보이고 때로는 나쁜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극단을 오가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상대방의 작은 잘못에도 그 사람이 정말 나를 싫어한다는 생각이 들게 되고, 이런 생각이 유기 불안에도 연결이 되면서 더욱 두려움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소한 자극들, 예측할 수 없는 이유로 반복해서 이런 감정을 느낀다면 본인도, 상대방도 힘이 들 수밖에 없고, 상대가 나를 떠나는 것을 막으려는 비적응적인 행동(자해, 협박, 외도 등)을 반복하게 된다고 합니다.

L님이 남자 친구분의 핸드폰을 보고 나서 느꼈던 감정, 그리고 그 이전에 느꼈던 불안한 감정들도 이런 이유로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리의 방어기제는 타인에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작은 잘못에 대해서도 아주 크게 받아들이게 되어서 나 스스로를 못난 사람,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생각을 하는데,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자기 정체성에도 혼란이 오고 만성적인 공허감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살아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고, 자꾸만 죽음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지요.

 

L 님도 이런 생각과 감정의 변화 때문에 정말 오랜 기간 고통을 받으신 것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그러면서도 오랜 기간 진료를 받는 선생님이 있다고 하니까 한 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경계성 인격 장애는 치료하기 어렵다고 하지만, 이처럼 장기간 치료를 받게 되면 분명히 변화가 있을 거예요. 최근 연구들을 보면 개인 정신 치료나 집단 치료 모두 눈에 띄는 치료 효과를 보이고 있다고 하거든요.

그리고 한 명의 치료자를 오래 보고 있다면 그 치료자와 안정적인 인간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고, 그 자체로 분명히 좋은 변화가 있다는 의미가 되니까요.

 

여기까지가 저희 뇌부자들이 L 님께 드리는 이야기입니다.  

아직까지 L 님이 반복되는 성격 문제로 힘들어하시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하지만 남자 친구의 마음이 의심되는 상황에서도 곧바로 표출하지 않고 자리를 비우길 기다렸다가 확인한 것을 봐도 그렇고, 남자 친구와의 관계를 대하는 모습이 달라진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런 변화는 L님 본인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 상황이 절망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역시 좋은 부분과 나쁜 부분을 통합해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경계성 인격 성향 때문이겠지요.

마음이 한순간에 바뀌는 일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내 마음이 단단해질 때까지 몇 번이고 부딪히며 연습을 반복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다 보면 당장은 알아차리기 힘들지라도 분명 어느 순간 초연 해지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L 님이 그 과정에서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희가 드리는 이 편지가 조금이나마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뇌부자들 드림.  

 

 

Podcast: https://itun.es/kr/XJaKib.c

팟빵: http://www.podbbang.com/ch/13552

팟티: http://m.podty.me/pod/SC1758/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