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허지원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많은 심리학 서적들은 전통적으로 방어를 이야기합니다. 

누군가는 후배의 일거수일투족이 미워 보이지만 차마 그렇게는 표현할 수 없어 '그 후배가 자신을 미워하는 것 같다'며 친구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투사(projection)로 자신의 악의를 숨깁니다.  

누군가는 권위적 인물에 대한 분노로 들끓어도 그 앞에서는 반대의 의사표시를 절대 표현하지 않고 숨죽이다가, 만만한 사람에게 (주로 부인이나 자녀, 후배나 식당 종업원) 트집을 잡아 폭발적으로 화를 표출하거나 애꿎은 물건을 부수는 등의 전치(혹은 전위 displacement)로 화풀이합니다. 

 

자신이 어떤 방어기제를 주로 사용하는지 살피는 일은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어의 '종류'들에만 몰두하다 보면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놓치게 됩니다. 

당신은 어떤 순간에 유독 방어기제를 펼치나요?

우리가 일상을 지내오며, 모든 순간 방어를 취하지는 않습니다. 

습관적으로 방어막을 펼치겠지만 분명히 결정적인 순간순간이 있습니다. 

 

질문에 대한 답이 어렵다면 이렇게 물어보는 게 좋겠습니다. 

당신은 어떤 때에 자꾸 정색하거나 혹은 분개하게 되나요? 

어떤 사람과, 어떤 때에, -어쩌면 웃고 넘길 수 있는 일임에도-  

공격받았다는 느낌에 마음 한 켠이 불편해지고 수치심에 날을 세우나요? 

 

누구나, '버튼이 눌리는' 지점이 있습니다. 

외모/직업/학력에 대한 열등감, 순탄치 못하거나 불행한 개인사/가정사, 노력한 호의가 무시되거나 적절한 호응을 얻지 못하는 것, 나 혹은 내 자녀의 능력이나 발달과업 성취 수준 등 누구에게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취약한 지점이 우연히 건드려지면, 남들은 그냥 넘겼을법한 일에 '끼-익!'하는 굉음을 내며 이성은 그 지점에서 멈춰버립니다. 

 

이렇게 버튼이 눌리면, '빙 돌리지 말고 할 말 있으면 해 봐!'하며 뜬금없이 홀로 분개하기도 하고, 시시한 이야기를 나누며 한참 즐겁게 웃고 떠들던 단체 채팅방을 고지 없이 갑작스레 탈퇴하거나, 그게 스스로도 치사하다 느껴진다면 어떻게든 다른 트집을 잡아 분노를 드러냅니다. (그래도 여전히 치사합니다..).

그렇게라도 -이미 오래전부터 상처가 가득했던- 자존감을 어떻게든 지켜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진_픽사베이

 

각자의 버튼은 다양하지만 원인은 비교적 명료하여, 실제의 배반 경험이나, 가족 내 정서적 학대, 또래 내 집단 따돌림 경험은 이런 버튼을 수도 없이 잘도 만들어냅니다.  

무시당하거나 거부당하고 비난받았던 시기에 경험했던 나의 외모, 성격, 행동, 능력에 대한 수치심과 죄책감, 고립감의 그림자는 너무나 깊습니다.  

결국 바닥으로 끌어내려진 우리는, 미묘한 단서들에도 기꺼이 대응하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예전처럼 내가 당하진 않을 거야. 나는 이전보다 더 나아졌으니까' 하며. 

그러나 이래서는 더 나아졌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심리적으로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질 않습니다. 

 

이런 일은 누구에게나 흔합니다. 

다만 나의 버튼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매우 크지요.  

자기감정이 어떤 경우에 취약해지는지를 알고 있어야 뜬금없는 괴상한 선택을 하지 않습니다.  

저의 경우에도 여러 '버튼'이 있습니다.  

무슨 종류의 버튼인지를 알게 된 후부터는 고군분투해서 그 버튼의 크기를 아주 작게 만들기도 했고, 아예 크게 만들어 아무나 눌러대도록 하여 아무렇지 않아지기도 했습니다.  

<뭐 어쩌라고>의 정신으로다.. 

수업 시간 중 가끔씩 저는 제 우울감과 불안감에 대해 편안히 드러냅니다. 

그것을 전시하거나 과시해 사람들이 나를 보살피도록 하는 것도 아니지만, 이제 더 이상 제 취약점이나 수치심을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애쓰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고 애쓰기 시작하는, 그 순간을 경계해야 합니다. 

스스로를 위로하고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어느 순간 애를 쓰고 있어야만 자신이 보호되는 상태라면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모욕당하거나 폄하되지 않으려 부단히 애쓰고 있는 사람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누구나 금세 부적절감이나 불편감을 느낍니다.  

역설적이게도, '애쓰는' 사람은 이런 주변의 불편감을 즉각적으로 감지하고는, '이 분위기는 뭐야? 나에게 왜들 이래?'하며 또다시 2차적으로 분노하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가족들과 괜찮은 시간을 보내고 있음 → 나에게 던진 형제자매의 농담에 갑자기 소소하게 분노가 치밂 → 주변 가족들이 그런 나의 반응에 핀잔을 주거나 비난함 → 주변 가족들에게로 분노가 번짐"과 같은 패턴입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우리는 (갑자기..) 귤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당신은 귤을 얼마나 좋아하나요? 

누군가는 귤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대답했겠지요. (어린 시절에 귤을 먹다 체한 이후 귤 맛 혐오가 생겨 평생 귤을 안 먹는다는 독자분도 계실까 봐 걱정은 되지만..) 

사실, 귤을 좋아하는 사람도 겨울날 문득 딸기가 먹고 싶은 날도 있겠죠. 그렇지만 당신은 여전히 대-충 귤을 좋아합니다. 

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어느 날 문득 귤이 맛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 것은 분명합니다. 

개인의 귤에 대한 선호도도 이렇게 약간의 기복이 있는 중에 대략적인 경향성이 있습니다.  

하물며 사람은 어떨까요. 

 

사진_픽셀

 

즉, 호오와 신뢰는 '정도의 문제'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매일매일 100%로 좋아할 필요도 없고, 나도 누군가를 매일매일 100% 믿을만한 사람으로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정확히는 그럴 필요도 없거니와, 사실 실현 불가능한 판타지입니다.

그냥 나를 '그럭저럭' 좋아하는 사람인가, 그것만 생각하면 됩니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그저 '충분히 믿을만하면' 되고요.

 

어떤 날은 실제로 상대가 내게 지나친 농담이나 비판을 할 수도 있지요.

그렇지만 분개의 버튼이 눌리기 시작할 때, 우리는 최대한 빨리, 상대와의 역사와 관계를 돌아봐야 합니다.

저 사람은 나를 '그럭저럭' 좋아해 왔다.

혹은 '대체로' 나를 아껴왔던 사람이다.

혹은 저 사람의 저런 이야기는 보통, 별 의미가 없다.

 

애인과 자존심이 얽히고설켜 버튼이 눌렸을 때에도, 우리는 재빨리 상대의 그간의 태도를 기억해내야 합니다.

'저 사람은 나를 좋아하고, 나도 저 사람을 좋아한다. 그간의 역사상, 앞으로도 나의 곤경을 기꺼이 함께 헤쳐나갈 사람임을 봐 왔다'하며.  

그리고는 상대가 그동안 주었던 긍정적인 메시지를 가지고 현재의 즐거운 혹은 중립적인 상황에 다시 편안히 안착해야 합니다. 

이런 경우 나의 분개는 나의 과거 문제에서 일부 기인했음을 차차 깨닫게 됩니다. 

즉, 나의 현재 감정은 현재의 사건 때문이 아니었을 수 있습니다.

여전히 그 비참했던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나를 똑바로 바라볼 때, 비로소 어른이 됩니다.

(물론 때론 해당 버튼 제작의 책임자에게 책임을 묻기도 해야 합니다. 나를 학대해온 사람들에게 분노를 발산하고 가해자에게 용감하게 맞서는 심상을 훈련하고 재양육 받는 과정은 심리치료 장면에서 임상심리전문가 혹은 정신과 의사의 지도하에 함께 진행하시길 권유합니다.) 

 

이 큰 관계와 역동에 대한 통찰이 시작될 때, 당신은 과거의 비참했던 감정에서 점점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뾰족하게 있을 필요 없어요.  

아직은 다 괜찮습니다.

 

그러니 오늘 마무리는 이렇습니다.

누구도 건드리지 말아야 했던 당신의 '버튼'은 무엇인지 차근차근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뿌리 깊은 역동은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까요?  

관계에서 학대받고 수치감을 느끼던 그때의 기억은, 내게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나요?

 

 

저자 약력_ 허지원 임상심리전문가, 정신건강임상심리사1급

중앙대학교 심리학과 조교수
대한뇌기능매핑학회 젊은연구자상 수상
한국임상심리학회 특임이사
한국인지행동치료학회 홍보이사
보건복지부 정신건강기술개발사업 "CBT기반 어플- 마성의 토닥토닥" 연구 책임자
한국연구재단 뇌과학원천기술개발사업 "정서조절 인공지능 모델 개발 II" 연구 책임자

 

* 글이 마음에 드셨다면 해당 글들을 책으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저자 : 허지원)
  - 뇌과학과 임상심리학이 무너진 마음에게 건네는 따뜻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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