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최정미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제가 공황장애라고요? 왜 이런 병이 저에게 생긴 거죠?”

비장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묻는 A 씨의 질문에 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답을 했다.

“한 사람 몫만 해야 하는데 두세 사람 몫을 하느라 무리해서 생긴 병이에요. 약을 드시면 빨리 좋아지시겠지만, 재발이 잦으니 앞으로는 한 사람 몫만 하시면서 사셔야 해요.”

 

지난 2주간 A 씨는 대학병원 응급실을 2번이나 방문했다.

“자다가 눈을 딱 떴는데, 갑자기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빨리 뛰면서 숨이 막히고, 어지럽고, 이러다 죽겠구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지만, 이런 증상은 응급실로 가는 길에 완화가 되었고, 도착 후 시행한 검사에서는 모두 정상 소견을 보여 얼떨떨하고 찜찜한 마음으로 귀가해야 했다. 그리고 며칠 전, 저녁 식사 중에 한 번 더 동일한 증세를 느끼고 응급실을 찾은 A 씨는 의사로부터 “공황장애인 것 같습니다, 가까운 정신과를 가보세요.”라는 말을 듣고 내원하였다. 늘 건강에는 자신이 있던 그였는데, 두 번의 에피소드를 거치면서 잔뜩 겁이 나고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초진 상담 중 공황장애 환자분들에게 늘 묻는 질문을 A 씨에게도 던졌다.

“최근에 많이 과로하신 적이 있나요?”

“네, 올해 초에 부서에서 한 사람이 퇴사를 했는데, 충원을 안 해줘서 그 일을 다 제가 해야 했어요. 새벽 2시에 퇴근을 하기도 하고, 한 3달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죠. 요번에 응급실 다녀온 뒤로 너무 힘들다고 위에 얘기를 해서 다른 사람이 좀 도와주고는 있는데 여전히 힘들어요.”

그는 아직도 10시 전에는 퇴근이 어렵다고 했다.
 

사진_픽셀


A 씨만의 일이 아니다. 외래에서 마주치는 환자들 중에는 병이 나기 전 수개월~수년 동안 과로한 경우가 많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근로자 1인당 연평균 근로시간은 2069시간(2016년 기준)으로 OECD 평균보다 305시간이 많다. 우리나라를 피로사회, 과로사회라고 부르는 것도 다 이런 이유일 것이다. 과로가 일상인 사회 속에서 우리는 모두 몇 사람씩의 몫을 해내라는 압박을 매일 매 순간 받으면서 살고 있으니까.

장거리 출퇴근자 B씨도 마찬가지다. 퇴근은 늘 정시에 하지만, 하루 출퇴근에만 4시간을 소비하다가 3년 만에 불면증, 우울증세로 외래를 방문했다.

주말부부로 독박 육아를 하면서도 아줌마라 일 못한다는 소리 듣기 싫어 눈치 보며 악착같이 일하던 워킹맘 C씨도 만성 두통과 소화불량에 시달리면서도 진통제, 소화제만 먹으며 버텨오다 공황 증세가 나타나고서야 병원을 찾았다.

바쁜 형제들 대신 가족 대소사를 도맡아 챙겨 오던 주부 D씨도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가 연이어 입원하시는 바람에 병원 모시고 다니고, 간병하느라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6개월 만에 우울증이 와서 내 한 몸 돌보기도 힘들어졌다.

아이들이라고 예외일까? 유명 자사고에 입학해 모두의 부러움을 사던 E군은 반복되는 공황 증상으로 자퇴를 고민 중이다.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너무 과로한 탓이다. 매일 새벽 6시 반에 기상해 수업, 자율학습을 하고, 밤 12시가 넘어서야 잠을 자는데(교칙상 11시 전에는 기숙사에 들어오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그나마도 과목별로 쏟아지는 수행평가 때문에 새벽까지 하다 잠을 제대로 못 자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의사지망생으로 의욕적으로 입학했다고 했으나, 내원 당시 E군의 표정은 빛을 잃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해마다 발간되는 유엔, OECD의 보고서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더 오래 일하고, 오래 공부하면서도 삶의 만족도는 낮은(심지어 청소년 행복지수는 OECD 국가 중 최하위)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우리는 '너무' 부지런하게 산다.

부지런한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의 뇌가 소화할 수 있는 일의 양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뇌는 일을 할 때 세로토닌,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등의 신경전달물질을 쓰는데, 많이 일할 수록 많이 쓴다. 신경전달물질은 뇌 세포 내에서 생산되므로, 우리가 너무 많은 일을 하면(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뇌도 자신의 한계 이상으로 일을 해야 해 과부하가 걸린다. 이 경우 뇌는 교감신경을 높여 스트레스 처리를 돕는데, 지나치면 스트레스 증상(두통, 어깨 결림, 근육 긴장, 소화불량, 불면 등)의 원인이 된다.

장기적인 과부하는 신경전달물질의 저하 및 불균형을 일으켜, 뇌기능을 떨어뜨린다. 결국 업무에도, 일상생활에도 지장이 생기며, 정신과적 증상(우울증, 불안증, 공황장애, 불면증 등)으로까지 이어진다. 과로하는 사람은 모두 이런 경로를 겪게 된다. 버티는 기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예외 없이.

 

과로로 병이 난 많은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나는 '한 사람 몫만 하고 사는 것'이 우리 인생에 주어진 자연의 순리인 것 같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내 여력이 닿는 정도까지만 하고, 그 나머지는 다른 사람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저도 한 사람 몫만 하고 싶죠. 그런데 도통 주변에서 도와주지 않아요. 일 줄여 달라고 하기도 어렵고, 눈치도 보이고…”

한 사람 몫만 하라는 처방(?)을 내리면, 환자분들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들 반박한다.

그러게 말이다. 한 사람 몫만 한다는 것이 말만큼 쉽지는 않다. 가정이건 회사건 일은 끝이 없고, 한 사람에게 몰리는 경우가 흔하니까. 밭 매고, 애도 키우면서 집안 대소사도 챙기고, 남편 술주정도 받아주며 열 사람 몫을 해오던 헌신적인 우리의 어머니들 덕분에 최근까지도 '화병'은 한국 문화 고유의 정신질환으로 정신과 교과서에 올라있었다. 정말이다. 하지만, 그 어머니가 행복해 보이던가? 누구든 그렇게 살아서는 안된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이 있다. '한 사람 몫으로 살기'에 회의적이었던 분들도 자꾸 격려하다 보면 한두 달쯤 뒤에는 대부분이 긍정적 변화를 보고한다. 앞서 사례에 등장한 분들의 경우를 보자.
 

사진_픽셀


A 씨: “생각해보니 제가 승진 욕심이 있어서 더 열심히 한 것도 있었던 것 같아요. 길게 오래 다니자는 마음으로 내려놓으니 한결 편해졌어요. 요즘은 퇴근도 8시 전에는 해요. 처음에는 좀 불안했는데, 막상 해보니 어찌어찌 되더라고요.”

B 씨: “장거리 출퇴근이 그렇게 부담이 되는지 몰랐어요. 전에는 차속에서도 핸드폰도 하고 이것저것 일을 봤는데, 이제는 그냥 푹 쉬고 있어요. 그러니까 좀 낫더라고요. 회사 가까이로 이사하는 것도 의논 중이에요.”

C 씨: “모든 것에 너무 완벽하려고 한 것 같아요. 아줌마니까 어쩔 수 없는 것은 인정하고, 최대한 그 시간에 충실하려고 해요. 집안일이며 애들 챙기는 것도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려고요. 남편도 주말에 좀 더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매주 토요일 오전에는 운동도 하면서 저만의 시간을 가지니 숨이 좀 트이네요.”

D 씨: “형제들 다 모였을 때 더 이상 못하겠다고 얘기를 했어요. 큰소리도 좀 나고, 울기도 많이 했는데, 나중에는 네가 그렇게 힘든 지 몰랐다고 미안하다고 사과하더라고요.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돌아가면서 하기로 했어요. 그래도 제가 좀 더 많이 하긴 하겠지만 마음이 많이 가벼워졌어요.”

E군: “저는 공부만 파기보다는 틈틈이 놀기도 하고, 가족들과 시간도 많이 보내는 게 맞는 타입인 것 같아요. 기숙사 생활은 너무 힘들었어요. 자퇴보다는 집 앞에 있는 학교에 친구들도 있으니 전학해서 다녀보려고요.“

정말 놀라운 변화가 아닌가! 한 사람 몫만 하기 위해 모두 용기를 낸 덕분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나는 어떤지 잠시 생각해보자. 나는 몇 사람 몫을 하며 살고 있는가, 혹시 여러 사람 몫을 하며 과로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줄여야 한다. 무엇 때문에 나는 여러 사람 몫을 하게 되었을까? 회사가 시켜서? 가족들의 기대 때문에? 그런 경우라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정받고 싶은 나의 욕구' 때문인 경우가 많다. 남의 인정보다는 나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 행복하다. 그런데 혹시 한 사람 몫을 못하고 있다면? 반성하자.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화병'에 걸려 고생하고 있을 수가 있으니.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이자 워킹맘이며, 아내이고, 딸이고 며느리인 나도 여러 사람 몫을 하고 살 때가 많았다. 그러나 요즘은 '한 사람 몫'만 하기 위해 매일 피나는 노력을 한다. 정말 쉽지 않다. 그러나, 노력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노력하는 과정에서 건강한 자존감과 자기주장 능력, 자족하는 태도가 자라게 된다. 자기 몫을 잘 해내는 사람은 자신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아이가 처음으로 라면 끓이기를 성공했을 때 신나고 뿌듯해하던 표정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자기 몫을 해냄으로써 아이는 자존감이 올라갔고, 나는 피곤할 때 라면을 얻어먹을 수 있는 티켓을 얻었다. 만족스러운 win-win이다.

 

여러 사람 몫을 하다 지친 당신이여, 좋은 마음으로 맡았더라도 이제는 부담이 되고, 억울할 정도라면 다 내려놓고 한 사람 몫만 하며 살자. 한 사람 몫도 제대로 하려면 충분히 힘들다. 그러니 더 해야 한다는 죄책감일랑 멀리 던져버리고, 그동안 최선을 다한 당신 자신에게 큰 박수를 쳐주자. 수고했다고 토닥여주자. 바로 지금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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