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허지원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내 삶에 아무 의미가 없다면”

 

"제 삶에 별로 큰 의미가 없다면 그냥 제가 없어도 되는 건 아닐까요?
가장 좋은 방법은 제가 인도를 걸어가다가 차가 저를 덮쳐서 바로 죽는 건데,
저는 그래서 뉴스 보다가 사고로 누가 죽었다는 걸 보면 이상한 희망 같은 것도 느끼고 그러다가 죄책감도 느끼고..
아무튼 마음이 복잡해요."

오늘 점심으로 라면을 맛있게 먹었는데요, 하는 담담한 말투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는 A는 본인의 우울에 대한 확신이 없어 일단 상담이나 받아보자 하고 찾아왔다 했다.

'본인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우연한 사망'을 바라는 수동적인 자살사고는 만성적으로 무기력해져 있는 내담자들이 흔히 보고하는데, A 역시 능동적인 자살 계획이나 시도를 하기에는 겁이 많았고,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신앙인으로서도 죄책감도 크다는 이야기도 덧붙이며 본인의 이 상황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A는 중학교 졸업 무렵부터 본인이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뾰족한 답이 없음을 깨달았다.

의미 없는 삶을 지속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고민하면서 놀이터의 기구 꼭대기에 올라앉아있다가 여기에서 떨어지면 목이 부러져 죽을 수 있을지 혹은 많이 아프기만 할지, 만일 그렇게 죽게 되는 경우 내 세계의 종말이 오는 것인데 그게 다른 사람들에게 딱히 큰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고민하기도 했다.

장례식에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을 텐데, 몇 살쯤 죽어야 사람들이 그래도 꽤 올까 하는 생각도 하다가 지금까지 살았던 것 같다고도 했다.

아빠와의 불화로 어떤 생의 활력도 없어 보였던 엄마는, 지금 생각해보면 자신의 유년기부터 지금까지 내내 우울했었던 것 같고 그 그림자가 자신에게 너무 짙고 크게 드리워져 있었음을 뒤늦게서야 알았다고 했다.

 

A는 곧잘 공부를 했던 초등학교, 중학교와 달리 고등학교 학업을 따라가지 못하고 성적이 저하되어 자포자기하는 심정도 들었으나 재수 끝에 원하는 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생은 크게 바뀐 것이 없었다.

"재수할 때엔 그땐 정말 심각하게 우울했어요.
여름쯤 돼서는 재수학원 화장실에서 자주 울다가 나중에는 독서실 책상 앞에 앉아서 울면서 공부했어요. 너무 무섭고.
그렇게 넉넉한 형편도 아닌데 내가 이걸 한다고 우리 집이 뭐가 달라지나 싶고.

수업 들을 때에는 또 엄청 재미있어요. 교수님들도 다 좋았고.
친구들도 다들 착했고 지지도 잘 해줬는데,
사실 누구에게나 잘 해주는 친구들인 것이지, 딱히 나여서 잘 해준 것은 아닌 거, 

뭔지 아시죠?"

 

생각과 달랐던 대학원 환경, 학자금 대출 등 여러 문제로 바라던 대로 전공을 살리지는 못했으나 취업 전쟁 끝에 그 언저리, 비슷한 분야에서 나쁘지 않은 월급을 받으며 일을 시작했다.

집에 돌아가면 인터넷 커뮤니티들을 훑어보며 '사회적인 이슈도 찾아보고 빵 터지는 짤방도 보면서 랜선 친구들과 공유하다 보면' 하루하루 시간은 잘도 갔지만 '삶에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꾸준히 연락하는 소수의 친구들과 가끔 모여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흥이 올랐다가도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지 않아도 이 친구들은 잘 지낼 것이라는 생각, 앞으로 딱히 나아질 것 없이 고만고만한 삶을 살 것이라는 생각과 문득 내가 너무 오래 살아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저 모퉁이를 막 돌아서려는 우울과 자살사고를 다시 붙잡기를 반복했다.

 

사진_픽셀

 

'이렇게 사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울은 불현듯 찾아오기보다 습자지에 물이 스미듯 야금야금 번집니다.

어느덧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갑자기 이상한 생각들에 꽂혀 있는 자신을 인식하면서부터입니다.

 

어느 순간 모든 일들은 내 우울과 관련이 있는 것만 같고 이 우울은 유전자에 새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삶의 의미는 애진작부터 찾기 어려웠고 나의 우울은 가족들에겐 큰 짐이었습니다.

환경은 그럭저럭 괜찮다면 괜찮은 상황이었는데 이 지경까지 온 것을 보면 타고 태어난 우울의 혹은 자살의 씨앗이 발현되는 운명을 타고난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궤적으로 돌이켜보건대, 앞으로도 더 나아질 상황은 없고 별다른 인생의 큰 의미를 찾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생각의 패턴은 우울의 증상입니다.

우울한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는 믿음이나 삶에 의미가 없다고 느끼는 것,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에 갇힌 느낌.

 

이런 우울의 증상들은 뇌에 흔적을 남깁니다.

1400회 가까이 여러 연구들에서 피인용(2018년 기준)된 2004년의 메타 연구에서 12개의 연구에서 수집된 351명의 우울 환자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양쪽 해마(hippocampus) 부피가 줄어든 것(우측 해마의 10%, 좌측 해마의 8%)을 확인하였습니다. 

 

특히 우측 해마의 부피는 살면서 경험한 우울한 에피소드의 개수와 관련성을 보였고, 우울이 반복될수록 정서 처리와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의 부피가 감소하는 패턴(*)은 이미 여러 연구에서 입증된 바 있습니다.

어머니의 우울증이 확인된, 그래서 유전적/환경적으로 우울증 고위험군으로 분류되는 자녀의 해마 부피 역시 줄어들어있었고요.

 

이후 2008년, 2011년과 2017년 발표된 또 다른 메타 연구들에서도 주요우울장애 환자의 해마 및 편도체, 전전두엽의 부피 감소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 중 편도체는 정상적인 정서 반응뿐 아니라, 기분 및 불안 문제와 관련해 가장 특징적인 반응성을 보이는 뇌 심부의 기관입니다.

이 편도체의 부피가 작을수록 (구조적 이상성) 정서적 자극에 과잉반응하는 패턴을 보이며(기능적 이상성), 이런 구조 및 기능의 이상성은 다양한 주요우울장애 메타 연구들에서 빈번히 보고됩니다.

아무리 좋은 기억을 끌어다 붙여 지금 경험하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다스리고 싶어도, 편도체의 과잉활성화는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이런 양상은 역시 유전적으로 우울이 반복될 소지가 높은 고위험군 자녀에게서도 확인되었고요.

이 편도체의 부피가 줄어든 사람들이 보이는 문제행동 중 주목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ocial Networking Service, SNS) 중독입니다.

외부 자극에 충동적으로, 과잉하게 반응하는 편도체를 가진 개인은 SNS에서 확인 가능한 다양한 자극에 쉽게 마음을 빼앗깁니다. 

그리고 이런 SNS의 사용은 다시금 우울감을 높이는데 기여하지요.

 

사진_픽셀

 

전전두엽은 우울군뿐 아니라 자살시도군 연구에서도 흔히 언급되는 영역입니다.

우울한 환자가 자살을 기도했다면 그중 7명 중 1명은 1년 내 자살을 재시도하며 10명 중 1명은 5일 내 자살을 재시도합니다.

앞서 기술했던 전전두엽의 부피 감소는 우울 환자뿐 아니라 자살을 시도했던 자살고위험군에게서도 두드러지는 뇌 구조적 이상성이지요.

(전전두엽 부피 혹은 전전두엽 피질 두께가 차츰 줄어든 우울한 사람이 우연히 자살에 이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어떤 연구자들은 우울증상을 통계적으로 다 빼고도 계산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우울감을 통계적으로 통제한 이후에도 이 전두엽 부피 감소는 여전히 자살 시도력이 있는 환자들에서 두드러지는 특성이었습니다).

 

우울이나 자살시도가 뇌에 상흔을 남긴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마주하기 고통스러운 사실일지 모릅니다.

한 번 우울해졌다면, 자살을 생각하기 시작했고 시도하기 시작했다면,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과학의 영역으로 건조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또한 이것을 보완할 방법을 찾는 것 역시 과학의 영역이었기에 실제 많은 연구자들은 전전두엽과 편도체와 해마의 부피를 증가시키거나 해당 영역의 활동성을 높이는 요인들을 탐색해왔습니다.

- 규칙적인 운동,
- 꾸준한 공부,
- 제대로 된 심리치료(**),
- 그리고 항우울제 복용.

 

다 아는 이야기들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어렵지 않아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참 우울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분들에게는 아예 평생 하지 못할 일들 만을 나열해 둔 것만 같습니다.

압도적인 무력감과 무망감(hopelessness)은 우울한 분들을 계속해서 바닥으로 끌어내리는데, 내가 빨려 들어가는 깊이를 모를 어둠은 너무나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아서 자꾸만 내가 서 있는 발판을 아래로 더 아래로 무서운 속도로 낮춥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왜 밤새 죽지 않았지'를 제일 먼저 떠올리는 이들에게 최소 몇 주씩은 노력해야 희미한 성과 하나 보일까 말까 하는 일에 공을 들이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도 해야 합니다.

왜 해야 하지? 이 사람은 왜 나더러 살라고 하지?를 고민하면 안 됩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가 맞는 질문입니다.

- 규칙적인 운동을 어떻게 할까?
- 꾸준한 공부를 무엇을 할까?
- 심리치료는 어디에서 어떻게 받을까?
- 항우울제 복용은 어떤 병원에서 시작할까?

 

우울이 우리의 어깨를 잡고 아래로 내리누르기 시작하면, 우연에 기반해 일어난 단순하거나 중립적인 사건들에도 회의감은 고개를 쳐들고 우리는 자꾸만 왜,를 고민합니다.

왜 나를 싫어하지? 내가 왜 살아야 하지? 왜 죽으면 안 되지?

그러는 사이 우울한 에피소드들은 자꾸만 내 가용한 뇌의 하드웨어를 잠식하고 하드웨어의 기능은 실제로 자꾸 떨어지며 오류는 더욱 빈번해집니다.

왜, 가 어디 있어요.

그냥 하는 겁니다.

다들 되게 생각 있어 보이고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삶에 뭔가 큰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믿음은 누군가의 삶에 도움이 되는 기능적 요소라기보다는 상처 입고 고단했던 자기애가 의도치 않게 남긴 하나의 증상처럼 보입니다.

 

사진_픽셀

 

삶에 큰 의미가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의미이고 그것만으로 다 한 겁니다.

살아있는 부모, 살아있는 친구, 살아있는 자식, 살아있는 나. 그거면 됐습니다.

그냥 살다가 내가 행복해지고 남에게 좀 기여도 좀 하고 하면, 나중에 그게 의미라면 의미겠지요.

 

그러나 당장은, 그것이 과학에 기반했다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주먹 딱 두 개 쥔만큼의 크기로 지금까지 나를 버티게 해 온 내 기특한 뇌를 보살펴야 합니다.

운동이나, 공부, 심리치료와 약물복용 등 뭐든 가용한 옵션을 확보합시다.

돈을 쓰는 것도 좋지요. 

(실제로 농반 진반으로, 돈이 최곱니다 여러분, 그러니까 대학원은 오지 마세요!라고 자주 말하지만)

아무튼 돈은 참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구멍이 난 스타킹을 기꺼이 버릴 수 있고,
커튼의 디자인을 바꿀 수도 있을 것이고,
친구에게 커피 한 잔을 사 줄 수도 있을 것이고,
커피에도 여러 맛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내 취향에 맞는 아이스크림의 맛을 알게 될 것이고,
내 발에 정말 편한 신발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 우리는 조금 더 멀리 갈 수 있으니까요.

 

심리치료나 항우울제 복용에도 뇌 구조나 기능이 변하지 않으면 어떡하냐, 묻는 분들도 계십니다.

물론 그런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특정 치료적 개입이 성공할지 실패할지 여부를 예측하기 위해 환자 개인의 뇌 특성에 기반한 기계학습(machine learning)을 활용하기도 하고요.

다만 안타깝게도 이런 연구들이 발표될 때마다 기사 글은 '우울한 뇌', '자살 유전자'와 같이 비관적이거나 자극적인 단어들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과학은 뇌의 우울한 운명을 판단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특정 치료가 개인에게 잘 맞지 않을 확률에 대한 의사결정을 재빨리 하고 또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오랜 시간의 고통감에서 이제 막 한발 내디뎌 전문기관을 찾은 분들이 가능한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당 연구를 활용할 뿐입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분명히 우울은 뇌에 흔적을 남깁니다.

그러나 그 흔적은 어떻게든 옅어집니다. 

 

나의 행동이나 일이나 어떤 대상이 내 삶의 의미가 되어선 안 됩니다.

'어떻게'에만 집중하세요.

어떻게 일할지, 어떻게 놀지, 어떻게 사랑할지.

우리는 의미 없는 삶을 살아도 됩니다. 

뭐 어때요.

하루가 재미있으면 좋고, 아니면 또 마는 겁니다.

돈도 좀 써보고요.

아직은 우리는 죽을 때가 아닙니다.

 

 

* 이는 우울을 노인성 치매의 위험인자로 고려하는 최근의 연구들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우울한 노인들의 해마의 부피를 바탕으로 치매 발병률을 예측할 수 있다는 5년, 10년 추적조사 연구도 있었고요.

** 이를테면 한국임상심리학회 임상심리전문가나 정신건강의학과의사가 진행하는 심리치료에의 참여.

 

저자 약력_ 허지원 임상심리전문가, 정신건강임상심리사1급

중앙대학교 심리학과 조교수
대한뇌기능매핑학회 젊은연구자상 수상
한국임상심리학회 특임이사
한국인지행동치료학회 홍보이사
보건복지부 정신건강기술개발사업 "CBT기반 어플- 마성의 토닥토닥" 연구 책임자
한국연구재단 뇌과학원천기술개발사업 "정서조절 인공지능 모델 개발 II" 연구 책임자

 

* 글이 마음에 드셨다면 해당 글들을 책으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저자 : 허지원)
  - 뇌과학과 임상심리학이 무너진 마음에게 건네는 따뜻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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