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허지원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내 삶에 아무 의미가 없다면”

 

의미 있는 삶 혹은 행복한 삶이라는 프레임은 우리를 정서적으로 과로하게 합니다.

'네 삶에는 의미가 있어?' 혹은 '넌 행복해?'라는 질문은 멀쩡하게 잘 지내던 우리를 갑자기 불행하게 만듭니다.

의미를 찾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할 것만 같고, '나는 행복하지 않은데 왜 노력하고 있지 않나' 혹은 '우리 가족은 여전히 불행한데 나는 왜 행복해하지' 하는 생각들로 죄책감과 초조감에 휩싸입니다.

 

연구로도 밝혀졌지만 우울한 사람의 시간은 느리게 흐르며 심지어 멈춘 것처럼 느껴져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더디 가는 이 의미 없는 시간이 공포스러워집니다. 

그때 우리가 취해야 하는 자세는 무엇일까요.

최근의 치료 트렌드로는 '우울과 맞서 싸우겠다'는 아니고요, '어, 왔어?'가 꽤 괜찮은 답입니다.

환영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 쓸데없는 정신승리가 어디 있어요. 환영할 존재도 못 되고, 가능하면 겪지 않으면 좋을 일이지요. 다만 그 우울에게, 내가 너를 인지하고 있음을 알려야 합니다.

(프로이트 선생 식으로 말하자면) 일 혹은 사랑에서의 실패로, 혹은 내 의지와 관련 없는 타고 태어난 기질적 특성으로, 우울은 찾아옵니다.

그럴 때, '어, 왔어?' 하는 수용(acceptance), 승인(approval)은 나를 우울의 피해자가 아닌 우울을 맞아들이는 주체적인 집주인(host)으로 만듭니다.

네, 당신에게도 우울이 찾아온 것입니다.

 

우울을 맞아들이면서 당신은 두 가지를 함께 궁리해야 합니다.

- 우울의 원인을 탐색하기

- 나의 기분을 좋게 할 것을 찾기

 

당신을 우울하고 낙담하게 하는 문제들은 만성적인가요, 급성적인가요. 명료한가요, 모호한가요. 타고 태어난 문제인가요, 좌절스러운 환경 때문인가요. ('모두 다'라고 대답했다면 분명 우울한 것이지만 원인에 대해서는 본격 들여다보지 않은 것입니다. 다시 잘 생각해보세요).

 

사진_픽사베이

 

우울이 어떻게 당신에게 찾아왔는지는 참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필이면 왜 지금 이 우울이 찾아온 것일까' 혹은 '이 우울은 왜 나를 떠나지 못할까', '실제 우울해할 만한 일이 발생했다 쳐도, 나는 왜 이 우울이 나를 함부로 대하도록 내버려 둘까', '왜 의미 있는 삶, 행복한 삶에 집착하게 됐을까' 등의 질문을 던지며 우울의 원인과 그 정체를 직면해야 합니다.

보통은 문제를 들여다보는 것을 회피하거나 억압하는 사이 문간에서 우물쭈물하던 우울이 당신의 안방 침대 위까지 올라옵니다.

 

천천히 노력을 들여서 우울을 다루어야 합니다. 그때 우울은 좀 더 그럴듯하고 더 작고 더 약하고 덜 뾰족하고 덜 당혹스러운 양식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노력은 그 마음에 들지 않는 손님이 '알아서 와도 될 때와 아닐 때를 적당히 눈치 봐서' 내게 방문하게 될 때까지 아프지만, 지속되어야 합니다.

원인을 비교적 명확하게 확인하고 직면하게 되면, 그 관성에 기반한 마음의 습관들을 멈출 지점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니야, 지금은 우울해할 수도 있는데 꼭 우울해해야 하는 건 아니야', '아니야, 내가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꼭 죽고 싶은 것은 아니야', 이건 또 마음의 습관이 하는 일, 마음이 본심을 가장하는 일, 하며.

 

다만 이런 주제에 매일 너무 오랜 시간 천착하면 더 우울해집니다. 짧지만 집중력 있고 단호하게 위의 질문에 대한 대략적인 답을 작성해보세요.

매일매일 입시나 수험생활, 직장생활이나 육아에 치여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해서 혹은 어떻게 직면하고 수용해야 하는지 전문적인 기술이 부족해서 들여다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라면 심리치료 전문가에게 찾아가야 합니다.

어? 왔어? 알았어, 일단 나 혼자서는 널 맞이하긴 나도 준비가 좀 그렇고, 기다려봐, 하면서 동료를 찾아 나서야 합니다.

필요시에 항우울제, 항불안제, 기분조절제도 드셔야 하고요.(*)

 

자기 계발서는 이미 우울이 발생했다면 무쓸모입니다. 연구결과로도 밝혀져있듯, 우울한 사람들이 자기 계발서를 읽거나 셀프 심리치료 핸드북 따위를 읽으면 증상이 더욱 악화됩니다.

저 사람은 나보다 더 나쁜 상황이었는데 나는 왜 이게 안 되지? 하며 자기패배적인 생각에 빠지거나, 의미 없는 공상에 너무 많은 인지적, 정서적 에너지를 투입하면서 실제로 문제 해결을 하고 성취를 해야 할 상황에 이미 지쳐버리기 때문입니다.

애매한 자기 계발서는 그냥 기분 좋을 때 심심풀이로 읽거나, 읽지 마세요.

 

사진_픽셀

 

한편으로는 당신을 기분 좋게 할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전통적인 심리치료나 항우울제는 우울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줄이는 쪽인데, 부정적인 감정을 없앤다고 자동적으로 긍정적인 감정이 올라오는 것은 아닙니다.

이건 본인이 조금 맡아서 해줘야 합니다.

 

우울한 사람들은 어느 날 문득 '어, 내가 왜 잘 지내지? 내가 왜 웃고 있지? 내가 왜 내일을 기대하지?'하는 생각에 죄책감이 들고 내 우울이 가짜인 것처럼 느낍니다.

실은 나는 그렇게까지 우울하지 않은데도 지지와 관심을 받고자 혹은 의무나 비판을 회피하고자 우울을 핑계 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본인이 어떻게 우울해야 진짜 우울일지에 몰두하며 더 깊은 우울로 들어섭니다.

이러한 본인 우울의 진정성에 대한 의심 역시 우울의 한 증상입니다.

 

이렇게 본인의 우울이 '진짜 우울인지 가짜 우울인지' 변별하려 드는 것은 삶을 어떻게 살지, 와 삶을 왜 살지가 전환되는 것과 관련 있습니다.

'어떻게'에 집중하는 기간에는 조금쯤 삶이 재미있을 수도 있고 죽음에 대한 생각도 멀어집니다.

그러나 '왜 살아야 하는지'에 다시 꽂히는 순간, 우리는 뭔가 삶의 의미가 꼭 있어야만 할 것 같고, 그럭저럭 살고 있는 자신이 가증스럽고 가식적으로 느껴집니다.

'행복하지 않은 삶, 가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이라니, 정말 하찮고 비참한 최악이다', '그런 일에도 행복하다는 듯 살고 있다니, 위선적이다'.

 

우울한 내담자들이 흔히 묻기를 "그런데요, 제가 정말 몰라서 그러는데, 제가 꼭 왜 살아야 돼요? 선생님한테도 아무 의미가 없잖아요." 합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삶에 의미가 뭐 그렇게 중요해요. 저도 매일 수습하면서 그냥 사는 거에요" 합니다.

나에게 의미 있는 것이 있다고 해도, 그건 결과물은 아니었습니다. 모든 과정이었습니다. 내가 살아낸 과정, 내가 나와 당신을 공부한 과정, 내가 당신과 함께 한 과정 그 모든 것이 제 삶의 의미였습니다.

결과물이 우울한 사람에게 행복감이나 가치감을 가져다줄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우리에겐 어차피 아니잖아요.

우리는 어릴 적부터 호사다마, 어쩐지 운수가 좋더라니 따위의 인지적 틀(schema)에 갇혀 분수에 맞지 않은 다행감, 희미한 희망이나 기쁨에 겁이 덜컥 납니다.

좋은 일을 순전히 좋아하면 아주 큰일이 몰려올 것처럼 걱정을 시작하고 오지도 않았고 어쩌면 오지도 않을 우울에 대비하며 아무 대비도 하지 않은 자신의 마음을 깨부수고 초조감은 몸 전체로 번져나가지요.

 

사진_픽셀

 

괜찮아요. 지치지 말고, 내게 좋은 일들을 만들어내거나 내게 좋은 순간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날따라 잘 내려진 커피, 귀여운 디자인의 커피숍 냅킨, 그날따라 맛있던 맥주, 맥주와 궁합이 잘 맞았던 파인애플 피자, 그날따라 딱딱 맞아떨어진 버스 도착 시간과 엘리베이터에, 즐거워하면 됩니다.

 

실제로 커피는 우울의 위험을 감소시키고 생명을 연장해줍니다.(**)

연구에 따르면 따뜻한 목욕은 (샤워에 비해) 스트레스와 긴장 및 불안, 외로움과 분노, 우울을 감소시키고 편안함을 주지요.

치대거나 꼭 껴안아주는 등 누군가와 살갗을 부비적대는 효과도 널리 입증되어 있고, 반려동물 입양은 치료에 대한 반응성이 떨어지는 우울 환자에 있어 항우울제의 효과를 높인다는 증거도 있습니다.

감사 일기 쓰기도 효과가 좋고 (단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간격으로. 매일 하면 효과 떨어져요) 선물은 받는 것보다는 줄 때에 행복감이 높아지고요.

그리고 연구결과 상 햇볕을 쬐어도, 슬픈 노래를 들어도 기분이 좋아지지요.

설탕이 든 달콤한 음식은 단기적으로만 기분이 좋고 장기적으로는 분노감을 높이니 적당히.

운동은, 아직 하기 싫지요? 괜찮아요. 나중에 천천히 하지요.

우리는 계속 살아나갈 거니까.

뭐든, 당신을 챙기세요.

괜찮아요. 삶을 즐거워해도 되고, 재미있어해도 됩니다.

 

당신은 당신에게 좀 더 좋은 주인이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숙제는, 의미 있는 삶에 대한 정의를 달리해 볼 것.

그리고 당신에게 우울이 있다면 추정되는 원인을 종이에 간단히 적어보고 말을 거는 것.

"거기 있었지? 알고 있었어."

 

 

*보통 한 회기에 10만 원가량이라고 들으면 비싸게 느껴지지만, 가장 널리 사용되는 근거기반 치료인 인지행동치료 기준으로 8-12만 원(회기 당) x 총 10-12회기를 하게 된다면, 100만 원 안팎의 돈으로 이미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우울을 문간까지는 내쫓아 세워둘 수 있습니다.

그럼 해볼 만한 거래이지요.

약물의 경우 항우울제, 항불안제 등으로 이름이 붙어 거부감들이 드신다 하지만, 간 기능 개선제처럼 '뇌기능 개선제'라고 보시는 게 꽤 적절한 표현이겠고요.

 

**디카페인이나 차 종류로는 의미 있는 결과는 보이지 않았고요, 원두커피로!

우울에 대한 커피의 효과와 관련해선 2만 명 여성 대상으로 10년 추적조사한 결과로도, 2천 명 중년 남성 대상으로도 밝혀졌습니다.

2018년 대단위 연구에서는, 해당 연구에서 살핀 모든 질환의 사망률과 관련해 커피가 주효한 보호요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플로리다대에서 100여 명 어르신 4년 추적조사한 연구에서는 경도인지 장애(mild cognitive impairment) 진단받은 분들의 혈중 카페인 농도가 51% 낮았다는 연구결과도 있었으니 질 좋은 커피를 꾸준히 마셔둘 이유는 충분하지요.

 

저자 약력_ 허지원 임상심리전문가, 정신건강임상심리사1급

중앙대학교 심리학과 조교수
대한뇌기능매핑학회 젊은연구자상 수상
한국임상심리학회 특임이사
한국인지행동치료학회 홍보이사
보건복지부 정신건강기술개발사업 "CBT기반 어플- 마성의 토닥토닥" 연구 책임자
한국연구재단 뇌과학원천기술개발사업 "정서조절 인공지능 모델 개발 II" 연구 책임자

 

* 글이 마음에 드셨다면 해당 글들을 책으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저자 : 허지원)
  - 뇌과학과 임상심리학이 무너진 마음에게 건네는 따뜻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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