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병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오늘은 자신이 하는 일이 너무 좋아서 시작했는데 몇 년 지나고 나니, 그렇게 좋아했던 일이 지겹고 싫어지기까지 한다는 윤과장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윤과장님은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디자인 관련 학과에 진학했다고 합니다. 공부할 때 돈도 들고, 미래도 불투명하다면 부모님이 극구 말렸는데도 자신이 열렬히 하고 싶었던 것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대학 진학 후 공부도 열심히 하고, 공모전에도 입상해서 취직도 하고, 입사 후에 4-5년은 정말 열심히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아무리 집중해서 일에 몰두하려 일이 재미가 없고, 딴생각만 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천직이라 여겼던 일이 재미가 없어지니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덜컥 겁이 났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라고 하실 분도 있을 겁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언제 회사에서 잘릴 줄 모르는데, 무슨 낙관적 기대! 라며 얼굴 붉힐 수도 있을 것 같고요. 하지만, 사람은 근본적으로 ‘나는 특별하다’, ‘나의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다’라는 기대를 마음속에 품고 살아갑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더라도, 누구나 이런 기대를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하며 삽니다. 

요즘처럼 살기 힘겨운 현실에서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그래도 나는 특별한 사람이고, 인생이 나를 배신할리는 없어'라는 깊은 신념을 갖고 있는 경우가 더 일반적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특별함,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기대가 없다면,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힘듭니다. 말로는 '살기 힘들어, 앞으로 더 달라질 것이 없어'라고 푸념을 늘어놓아도, 마음에서는 '그래도 앞으로 더 나아질 거야. 신이 나를 이렇게 쉽게 버릴 리 없어' 라며 희망의 불씨를 고이 간직하며 사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사진_픽사베이


하지만, 실제 감정의 변화는 예측한 방향으로 일관되게 흘러가지 않습니다. 한창 연애할 때는,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지만, 보통 일이 년 안에 열정적인 감정은 반드시 꺼지는 것처럼, 일에 대한 흥미와 열정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그 열기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일과 연애를 하는 동안에는 일을 위해 열정을 불태우게 되지만, 그 불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불꽃은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이라 믿고 싶겠지만, 현실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열정의 불꽃은 반드시 사그라듭니다. 완전히 꺼지지 않는다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당신은 일과 오 년 정도 연애를 했으니, 그래도 꽤 오래 열정을 간직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어쩌면 일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이제는 식을 만한 때가 된 것인지도 모르고요.

 

사연을 주신 분은 지금 일과의 사랑에서 권태기가 찾아온 겁니다. 무척 답답하고, 괴롭고, ‘내가 선택을 잘못했던 것인가?’ 하고 근본적인 것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할 겁니다. 그런데 이럴 때 “나 돌아갈래” 하며 예전의 흥분을 다시 되찾겠다고 너무 애를 쓰면 오히려 탈 납니다. 연애 때를 생각해 보세요. 연애 기간이 길어지면 자연히 감정도 식게 마련인데, “왜 예전처럼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라고 상대를 다그치면 오히려 연인과 불화만 커집니다. "나는 이렇게 애를 쓰는데,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하면서, 연인을 미워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천생연분도 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과거에 더 어려운 상황에서도 디자인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는데, 왜 지금 와서 흥미를 잃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하시겠지만, 이것 역시 원래 그런 겁니다. 현실이 힘들고 어려울 때는 열정이 식지 않습니다. 부모가 반대하는 연애를 하는 연인을 보세요. 반대하고 역경이 많을수록 사랑의 불꽃은 더 타오릅니다. 단칸방에 신혼살림 시작할 때는, 죽어도 좋을 만큼 사랑한다, 했다가 살만하면 딴생각하고 바람이 나기도 하잖아요. 마찬가지로 당신도 일과의 관계가 익숙해져서, 이제는 조금씩 딴생각이 드는 시기에 접어든 겁니다.  

 

그런데 말이죠. 일이란, 원래 재미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매일 창의적인 일을 하며 짜릿함을 느끼면 좋겠지만, 현실의 일은 그렇지 않잖아요. 흥미를 끄는 프로젝트는 내가 아닌 동기에게 떨어지는 일은 또 얼마나 흔합니까. 기계가 대신해주어도 될 것 같은 일을 처리하며 하루를 보낼 때도 많고요. '그렇지 않다. 나는 십 년, 이십 년 일을 해왔지만 지금도 일이 제일 재밌다'라고 목소리 높일 분도 간혹 있겠지만 (이런 분은 사생활을 땔감으로 태워가며 열정을 유지했을 공산이 큽니다) 저처럼 평범한 사람이나, 대다수 직장인은 그렇지 못합니다. 

돈 받고 하는 일이 재미있기만 할리 없습니다. 계속하면 재미없어지기 때문에, 회사에서 월급을 주는 겁니다. 현실의 삶은 기대하는 것처럼 흥미진진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나는 끈기 없는 사람이다'라고 변명하며 도피하지 않게 됩니다.
 

사진_픽셀


사랑에 빠졌다는 느낌만으로 관계가 지속될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지금보다 더 성장하고 행복해질 수 있도록 내가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와 그에 따르는 행동이 사랑을 꾸준히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래서 철학자 알랭 바디우도 “사랑은 지속성에서 완성된다”라고 말했던 겁니다. 일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선택한 일이지만, 열정과 재미만을 동력 삼아 계속해나가기는 어렵습니다. “나는 돈이 필요하다” “나는 능력을 인정받아 승진하고 싶다” “조직이라는 방패막이 나에게는 필요하다.” 이런 세속적 이유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제가 아는 유명한 정신과 교수님은 “빚이 나를 일하게 만든다”라고 당당하게 말씀하시더군요. 신혼의 단꿈에 빠져 있는 부부의 심정이 아니라, 집세 내고 아이 키우는 중년의 마음으로 일을 바라봐야 합니다. 씁쓸하게 들리겠지만, 이것이 우리가 일을 계속하게 만드는 중요한 동력이니까요.

그러면서도 일 속에 녹아 있는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실현하고 싶은 가치가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인 것이지요. 열정을 불태우는 도파민의 힘에 의지해서 일 하려고 하면 쉽게 탈진해 버리고, 일을 미워하게 될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합니다.

 

일이란, 자기 수양의 과정이 아닐까요? 재미없고 지치더라도 일을 놓지 않고 계속하는 과정에서 자아는 성숙하고, 성장하니까요. 나 자신을 돌아봐도, 나란 사람은 일을 통해 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치고 힘들어도 몸을 이끌고 정시에 출근하고, ‘아, 일이 재미없어’ 하고 느껴질 때도,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잖아, 조금만 힘내자’ 하고 스스로를 다독여가면서 지금에 이르렀거든요. 

꽃이 피려면, 햇빛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모든 꽃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햇빛이 없는 밤에 피는 꽃도 있습니다. 달맞이 꽃이 그렇지요. 햇빛의 뜨거움으로 식물이 자라기도 하지만, 달맞이 꽃처럼 어둠의 시간에 피는 꽃도 있습니다. 열정과 의욕이 사라져 답답하겠지만, 지금 당신은 달맞이 꽃이 필 때처럼 어둠의 시간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지금처럼 불꽃이 사라져서 어두워졌을 때가, 나를 돌아 보기에 가장 좋은 시간임에는 분명하니까요. 

 

 

김병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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