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신재현 강남 푸른 정신과 원장]

 

유시민 씨의 신작, <역사의 역사>를 읽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기록되고 발전되는 과정이 우리 개인의 삶의 궤적과 비슷한 것이 아닌가, 하고요. 유시민 씨가 이야기하듯 역사는 ‘사실 그대로의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역사가가 평가하여 그중 의미가 있는 사실들을 간택한 것들이지요. 중국을 대국으로 섬기며 생겨난 사대주의적 사관은 과거 고구려 시대에 대륙을 호령하던 을지문덕, 연개소문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패주한 당 태종의 위신을 살리도록 역사를 기록케 했지요. <춘추>는 공자가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입맛에 맞게(?) 정리한 역사서입니다. 사실에 서사와 약간의 조미료를 첨가한 거지요.

이처럼 우리 인류가 기억하는 역사란, 당시의 사회적 맥락에서 중요하다 여기는 사실들에 대한 편집본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역사는 사실 그 자체는 아닙니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합니다. 역사가가 역사서를 편찬할 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실, 이를테면 ‘어느 마을 어떤 이의 집에 식솔들이 몇이고, 논이 몇 마지기더라’라는 내용도 단지 사실이란 이유만으로 모조리 기록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또, 역사가가 세상을 전지적 시점에서 볼 수 있는 신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역사가의 눈을 통해 바라본 세상을, 역사가의 스키마(schema)로 필터링하여, 역사가의 입을 통해 나온 결과물입니다.
 

사진_픽셀


그렇다면, 과거에 우리가 겪었던 삶에 관한 기억도 내가 가진 ‘역사’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떤 면에서 우리의 기억은 역사가가 쓴 역사와 비슷합니다. 우리의 기억 또한 일어난 모든 일을 담진 않습니다. 경험 중 인상적이었던 기억만 모은 ‘조각 모음’에 가깝지요. 그래서, 안타깝지만 기억은 태초부터 왜곡되어있습니다. 다행히도 사실이 그대로 저장되지 않았다 해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많은 이들에게 인상적이었던 기억들은 대부분 행복하고 즐거웠던 기억, 소소한 성장의 경험 같은 것들일 테니까요. 슬프고 힘들었던 상실의 아픔도 건강한 이들이라면 시간이 흐르며 그 상처가 아물었을 겁니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를 안고 진료실에 찾아오는 분들 중에는 과거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그들이 기억하는 과거가 역사가가 기록하는 역사처럼 사실과는 다르게 왜곡되고, 의미가 덧씌워진 형태가 많다는 겁니다. 왜곡된 과거는 나와, 세상과, 미래에 대한 그릇된 관점을 지니도록 강요합니다. 그렇게 왜곡된 스키마(schema)가 형성되면, 아무리 즐거운 일이라도 비뚤어진 눈을 통해 자기 파괴적인 해석을 내리게 되는 것이지요. 과거의 사슬에 묶여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안타까운 이들도 많이 만나게 됩니다. 과거의 트라우마는 자신도 모르게 뇌에 흔적으로 남습니다. 그리고, 트라우마와 관련된 작은 단서(cue)가 나타나면, 당시 상황이 눈 앞에 펼쳐지듯 심한 두려움을 겪습니다. 적절하게 치유되지 못한 트라우마는 불안한 감정, 또 트라우마로 인한 재경험(re-experience)의 기억이 겹쳐지며 한 번 더 비틀립니다. 작은 사실의 조각에서 출발했지만, 그 덩치가 점점 불어나게 되는 거지요.

만약 과거의 기억이 자신의 삶을 망치는 원흉이라 생각한다면, 다음 내용을 기억해주면 좋겠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과거는 ‘지나간 진실’일 뿐입니다. 그리고 당시의 과거는 당시의 눈으로 바라보고 기억된 것이지요. 예를 들어, 어린아이들이 감정을 추스르기 힘들 때 가장 흔히 하는 행동은 ‘남 탓’이 아닌 바로 ‘내 탓’입니다. 취약한 아이들이 부당한 일에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부모님이 돈 문제로 싸워도 내 탓, 불량한 아이들이 자신을 따돌리고 괴롭혀도 내 탓, 가족들이 사고를 당해도 내 탓을 합니다. 당시 아이의 눈을 통해 저장된 기억들은 끔찍하고 두려운, 혹은 떠올리기만 해도 답답해지는 기억일 겁니다. 어린 시작을 떠올리기만 해도 어딘가 모르게 불편해집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기억이 지금 나에게 주는 영향이 적절한가, 내가 비틀린 기억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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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나’와 지금의 ‘나’는 분명히 다릅니다. 과거의 두려운 기억들이 발목을 잡고 있다면, 그래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면, 과거를 건강한 시각으로 다시 재조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맥락에서 삶의 역사를 다시 바라보는 일은 꼭 필요합니다. 어떤 이들에겐 힘들었던 기억을 다시 꺼내 보는 일이 공포스럽게 다가올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염려와 두려움으로 기억을 마음 한 켠으로 밀어만 놓다 보면, 언젠가 그 기억이 썩은 내를 풍기며 더 큰 상처를 남기지요. 용기를 내어 왜곡된 기억의 조각을 조금씩이나마 떼어 지금의 건강한 눈으로 살펴본다면, 자신의 역사가 다른 방향으로 해석될 여지도 충분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베네데토 크로체가 한 ‘모든 역사는 현대사(contemporary history)’라는 말의 의미를 곱씹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에드워드 H.카는 자신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들 사이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의 과정’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무엇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일까요? 추측컨대, 역사가들은 인류의 궤적을 온전히 바라보고, 현재의 맥락을 통해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주는 그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일 겁니다. 또 그것이 역사가 존재하는 이유가 아닐까요? 개인의 역사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역설적이지만 그 상처를 현재의 시선으로 온전히 마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개인의 역사는 이런 용기를 통해 거듭나고, 또 새로운 미래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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