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에 대하여

[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인간의 진정한 재산은 기억이다. 기억 속에서 인간은 가장 부유하면서 또 가장 빈곤하다.

- 알렉산더 스미스

인간의 생물학적 인지 활동 중 정신과 영역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만한 항목을 고르라면 아마 ‘기억’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기억의 일차적 역할이라 한다면야 외부 자극에 대한 기록이라 설명할 수 있겠지만, 기억의 역할은 결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반복되는 기억의 중첩과 회상, 거기에서 파생되는 기억의 표상은 개인의 행동양식에서부터 사고방식 모두를 아우르는 거대한 뿌리로 자라나게 되기 때문이다. 기억은 인격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끊임없이 자라나고 변화하는 인격은 군중 속에서 복잡한 역동 아래 서로 뒤엉켜 얽히며 사회와 문화라는 거시적 인격을 형성해낸다. 개인의 인격을 형성하는 수많은 기억의 파편들은 서로 모여 역사라는 거대한 기억의 흐름으로 사회를, 국가를 형성해낸다. 역사는 국가의 인격을 주조한다.

jtbc 화면 캡처

최근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두고 여론이 들끓고 있다. 여야가 각자 입장에 따라 국정화 이슈를 이용해 여론의 분열이나 관심 집중을 유도하는 부분이 있다는 지적도 있지만,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는 화젯거리라는 것만은 분명할 것이다. 좌편향 주체사상의 역사교육이라는 비난과 친일사관 역사교육이라는 비난이 전쟁처럼 날마다 지면을 오가며 열띤 분쟁을 더하고 있다. 역사교과서 집필을 반대하는 교수들의 움직임도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온 나라가 역사 교과서에 들썩이다 보니 국정의 민생안정화는 뒷전이 되어버리고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대체 왜 이렇게 시끄러운 것일까. 지나간 일들을 타임머신을 타고가 바꾸겠다는 것도, 역사에 대한 법적 판단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아이들 보는 교과서를 만드는 문제에 왜 온 나라가 들썩들썩 하는 것일까. 아무래도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온 국민이 목소리 높이는 역사교육의 중요성이 과연 정신의학적 견지에서는 어떤 뿌리를 가지고 있는지를 새삼 돌이켜보게 되는 시국이 아닐 수 없다. 도입부에 언급한 개인의 기억과 사회의 기억이 맺는 족보에 대해서 말이다.

입력 정보나 내부처리 정보를 디스크에 물리적으로 기록하거나 반도체 회로의 전자배열 변형으로 기록하는 컴퓨터의 기억장치와 같이 우리의 뇌도 외부 자극이나 내부적 정보처리를 뇌의 생물학적 구조 자체에 기록한다. ‘뉴런’이라 불리는 전기 자극에 민감한 세포들로 구성된 복잡한 회로에 흘러가는 전기 신호가 직접 그 흔적과 패턴을 남기는 것이다. 시각이나 청각, 후각 등의 감각 처리 영역들은 외부 사건에 대한 정보를 받아들이고, 각각의 자극들에 대한 감각적 표상을 만들어 낸다. 단순히 전송된 감각의 전기신호 자체가 아닌, 감각처리 피질에서 만들어내는 감각 표상을 가공하여 해마(Hyppocamus)로 보내고 해마에서 단기기억을 거친 기억은 측두엽이나 신피질로 서서히 옮겨가게 된다. 측두엽(Temporal lobe)의 요소들이 기억 표상을 나타내는 전기신호가 지나간 흔적을 저장하고, 측두엽과 신피질 사이의 상호교류를 통해 흔적을 유지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장기기억으로 변해가며 기억은 뉴런회로를 순환하며 유지되던 전기신호에서 점차 특정 단백질이나 신경세포 시냅스 자체의 변화로 저장되게 된다.

사진 픽사베이

간단하게 표현하였지만 기억의 메커니즘은 사실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도, 위에 설명한 바와 같이 단순하지도 않다. 하지만 상기한 바에서 짚어낼 수 있는, 인간의 기억이 컴퓨터의 메모리와 다른 점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기억은 감각자극이나 감정, 연산 처리 정보에 대한 ‘표상’을 저장한다는 것이다. 특히 장기기억으로 이환될수록 기억은 더더욱 처음 자극 자체의 날것 정보(raw data) 자체보다는 그 기억이 피질에서 연상한 표상(image)으로 저장이 된다. 기억은 기억할 대상 그 자체의 구성보다는 그 대상에 대한 해석에 더 주목한다.

둘째, 기억은 기억을 담당하는 기질적 매체의 변화를 수반한다. 위에서 장기기억이 특정 단백질이나 신경세포 시냅스 자체의 변화로 저장되게 된다고 표현한 바와 같이, 우리 뇌의 기억장치 자체가 기억에 의해 변화되고 발전해 나간다는 것이다. 반복되는 기억 정보 처리와 시냅스의 장기상승작용(LTP)은 각종 신경친화성 물질(neurotropic factor)을 활성화 시키고 신경세포 자체의 분화나 시냅스 분화, 강화를 유도하기 때문이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억의 이러한 생물학적 특성이 개체 전체의 거시적 특성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기억,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감정적 흥분을 동반하는 기억은 그 사건의 외현적 특성들에 대한 기록보다는 기억이 인격에 미치는 정신적 표상으로 새겨진다. 또, 그렇게 인격에 새겨진 각각의 표상들은 전이를 통해 반복적으로 경험됨으로써 외부 자극을 받아들이고 선택, 기억하는 패턴을 결정하는 주체인 인격과 습성 자체를 형성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특성들, 컴퓨터의 기계적 기억방식과는 차별화되는 인간 기억의 특성들은 역사가 사회와의 상호작용에서 보여주는 복잡한 관계와 놀랍도록 닮아있다.

기성세대가 겪은 사건들은, 사건을 직접 경험한 이들이 사라지고 세대가 교체됨에 따라 구전과 기록만이 남게 되며 ‘과거’의 영역으로 점차 진입하게 된다. 그리고 각각의 사건들 중 사회가 선택하는 특정 사건들은 ‘역사’의 페이지에 올라가게 되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과거에 발생하였던 사실(fact)들은 하나로 뭉그러지고, ‘사건’이었던 과거가 하나의 ‘역사적 심상-표상’으로 다시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끊임없이 연속적으로 중첩되는 역사적 표상들이 맺는 역동은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의 사회적 인격과 사회적 행동 양상을 형성하게 된다. 결국 그들로 하여금 다시 현재에서 과거로 넘어가는 사건들을 ‘기억’하여 역사로 남기게 하는 그 ‘선택’에 손길을 뻗치며 역사와 군중의 필연적 순환을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수많은 정신적 외상 기억(trauma)를 안고 있는 환자들을 바라보는 정신과 의사의 입장으로서, 위와 같은 견지로 우리 민족의 수많은 아픈 기억들은 ‘민족의 트라우마’라고 이야기한다면 다소 억측일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한 개인의 인격체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사가 품은 달고 쓴 기억들에 대한 표상의 해석이 우리 사회와 국가 자체의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환자들의 트라우마를 정신과 의사가 세심히 훑어내듯,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도 그러한 손길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할 것이다.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 이미 포화를 넘어설 정도로 분분한 의견들이 이제는 진영논리를 서로 날카롭게 앞세우고 있는 상황에 어느 한 쪽 진영으로 한줌 의견을 싣기에는 적절한 시기도 아니고 자격도 없는 듯하다.

그러나 슬픈 경험과 아픈 기억들은 그것을 바라보는 각자의 시선에 따라 곪고 문드러져 환자들로 하여금 외상적 기억에 압도되게 하기도 하고, 더 나은 자아로 나아가는 자양분이 되어주기도 한다. 단 한명의 역사가 이러할진대, 수천만, 수억, 수천억의 웃음과 피눈물이 쌓아온 기억들의 역동이 어떠할지는 분명할 것이다. 우리의 인격만큼이나 섬세하고 깊은 우리 민족의 인격을 위해서라도, 냄비처럼 들끓는 국정화 논란에 종북이냐 친일이냐, 좌파냐 우파냐의 호도된 논리를 떠나 그 본질을 좀 더 직시할 필요가 있다.

알렉산더 스미스가 이야기하였듯, ‘인간의 진정한 재산은 기억이다’. 기억 속에서 인간은 가장 부유하면서 또 가장 빈곤하듯, 인류는 역사 안에서 가장 부유하면서 또 가장 빈곤한 것이다.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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