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용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수많은 사람들이 여행지에서, 거리에서 셀카를 찍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진을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올립니다. 여기서 사진을 올린 사람은 단순히 셀카를 소셜 네트워크(SNS)에 올리는 것으로 행위를 마무리 짓지는 않습니다. 이 사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댓글과 ‘좋아요’로 반응하는지 계속 확인합니다. 그리고 반응이 좋으면 흐뭇함을 느끼지만 그렇지 않고 썰렁하면 속상해합니다. 이는 셀카를 찍는 것이 단순히 혼자만의 행동이라기보다는 누군가를 향한 몸짓임을 암시합니다. 

셀카를 보다 보면 자화상이 떠오릅니다. 자화상을 그리는 화가는 오래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붕대를 감고 있는 고흐의 자화상이 아마 가장 먼저 떠오르실 겁니다. 사실 그 훨씬 이전 르네상스 초기부터 이미 화가 자신의 얼굴을 등장인물 속에 살짝 끼어 넣어서 표현한 그림은 많이 있었습니다.
 

보티첼리, 동방박사의 경배 (1475)


위의 그림 속에서 가장 오른쪽 구석에 서있는 사람은 그림의 주제인 아기 예수와 성모를 바라보지 않고 그림 밖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작품의 화가인 보티첼리(1445–1510)입니다. 그는 자신이 이 그림을 그렸다고 확인하듯이 서있어서 마치 동양화의 낙관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런데 그림 속 그를 자세히 보면 그의 시선이 관객인 우리의 시선과 만납니다. 그는 그림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지 살펴보는 듯합니다. 페이스북의 셀카처럼 초기 르네상스의 그림 역시도 화가 자신의 얼굴을 통해서 관객과 소통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램브란트, 두 개의 원이 있는 자화상, 켄우드 하우스


자화상 하면 램브란트(1606 –1669)를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나이들 때까지 40여점의 그림과 30여점의 판화를 통해서 자화상을 남겼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물론 나이 들어가는 얼굴 모습과 변화하는 화풍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자신을 화폭 속에 담은 램브란트의 심리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픈 뜻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20대부터 말년까지 자신의 예술적 여정을 관객인 우리와 공유하고픈 욕구의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확인하는 동시에 타인과 이 경험을 공유하는 욕구의 실현은 과거 보티첼리나 램브란트의 경우처럼 화가들만 가능했습니다. 그릴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니까요. 그렇지만 지금은 누구나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어서 이런 욕망을 쉽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제 누구나 자화상 대신 자신의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현대사회에서 셀카의 유행을 ‘셀카족(영미권에서는 ‘셀피족’이라고 합니다) 현상’이라는 용어로 표현합니다. 셀카족 현상을 자기애, 즉 나르시시즘(Narcissism)과 연결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연못 속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움에 반해 물에 빠져 죽은 나르시소스, 그리고 거기서 피어난 수선화(Narcissus, daffodil) 얘기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프로이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를 이 신화의 나르시소스에 빗대 ‘나르시시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이론으로 셀카족 현상을 들여다본다면, 셀카를 찍는 행동은 자신을 담으려는 행동이기에 자기애적인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진_픽셀


그런데 왜 이렇게 요즘 셀카족들이 늘어났을까요? 물론 화가가 아니어도 자신의 모습을 누구나 쉽게 표현할 수 있는 카메라, 특히 스마트폰과 셀카봉이 있으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자신을 찍는 것을 넘어서 이를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에 올리는 행동과 연결 짓는다면 셀카를 찍는 심리는 자기 자신을 향하는 것은 물론이고 타인을 향하는 시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프로이드는 1914년 논문(On Narcissism: An Introduction)에서 자기애를 일차적 자기애와 이차적 자기애로 나누었습니다. 일차적 자기애는 타인을 인식하지 못하는 아기들이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여기고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에 비해서 이차적 자기애는 성숙과정을 통해서 타인을 향했던 사랑이 좌절을 경험하면서 다시 자신을 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셀카를 찍는 행위는 이차적 자기애와 연결됩니다. 

우리는 현대 사회 속에서 크고 작은 좌절을 경험합니다. 과거에는 한 지역에서 평생 살면서 많지는 않지만 깊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그 관계가 과거처럼 깊지 않고 그래서 단절되기도 쉽습니다. 직장에서 많은 동료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집에 오면 고립감을 느끼기 쉽습니다. 한 아파트 동에 많은 사람들이 같이 살지만 이웃들이 누구인지 잘 모릅니다. 즉 사람 사이의 연결에서 우리는 풍요 속에 빈곤을 경험합니다. 이때 우리의 한 손에 스마트폰이 있습니다. 바깥세상 사람들을 향했던 시선이 좌절을 경험하면서 자신을 향하게 되고 이는 셀카를 찍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렇지만 단절 속에서 자기 안으로만 침잠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모습을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행동을 통해서 다시 밖으로 향합니다. 그래서 페북 친구들이 ‘좋아요’를 눌러줄 때 우리는 이차적 자기애의 고립을 벗어나 타인과 다시 연결됨을 확인하고 쾌감을 느낍니다. 

셀카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현상은 결국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관계의 단절과 좌절을 얼마나 많이 겪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동시에 이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얼마나 많이 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자화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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