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신재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Q) 안녕하세요, 제 고민은 ‘분노’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 삭여진다는 말을 믿고, 분하고 기분 나빴던 일을 잊으려 해도, 몇 년이 지나도 잊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증오로 변합니다. 그래서 못 참다가 몇 년 지나서 뒤끝을 부리며 성질을 낸 적도 있습니다. 성격상 누가 기분 나쁘게 건드리면 그걸 갚아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병이 드는 성격입니다.

어렸을 때야 기분이 나쁘면 그 자리에서 싸워서 제 마음도 편했고 뒤끝도 남지 않았는데, 성인이 된 이후로 폭력을 행사하면 제 인생이 꼬이고 망가진다는 걸 너무 강해서 의식해서, 오히려 상대가 악의적으로 사람을 건드리고 열 받게 해도 폭력을 휘두를 수 없다는 좌절감과 무기력함에 실망하고, 참고 난 이후에도 뒤끝이 남아 괴로울 때가 많습니다. 마치 발톱이 뽑혀버린 고양이가 된 느낌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절이 있어 전혀 그렇지 않지만 100명에 한두 명쯤은 그런 이상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럴 때마다 감정이 상하고 또 오래가서 힘이 듭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기분 누가 건드리면 차라리 쌍방폭행으로 유도해서 실컷 두들겨 패주려는 새로운 대응방식까지도 고려해 봤을 정도입니다. 이런 걸로 속만 썩지 않는다면 전 제가 정말 좋은 성격이고, 선한 사람이며, 하고자 하는 일에 열정을 가진 사람이란 것을 압니다. 하지만 자꾸 사람들을 고깝게 보고, 화가 나는 기분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런 것들로 제 인생이 방해받을까 봐 걱정이 됩니다.

혹시 방법이 있을까요?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사진_픽사베이


A) 안녕하세요. 마음속에서 통제되지 않는 분노는 분명 많은 이들의 고민거리일 겁니다. 질문자님께서도 아마 그럴 테고요. 그리고, 분명 이렇게 질문을 보내신 이유는 분노를 어떻게 하면 잘 다룰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 때문이겠지요. 

분했던 기억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기억에 강렬한 감정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깊은 슬픔, 격렬한 분노, 극심한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났던 순간은 머리 속에서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또, 그 기억과 관련된 작은 촉발요인만 있어도 당시의 힘든 감정이 되살아나는 경우도 참 많아요. 당시의 기억과 감정이 적절하게 처리되지 않는다면, 질문자님처럼 더욱 커지기만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안타까운 경우지요. 

격렬한 감정이 삶을 지배하는 이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삶의 초점을 타인이 아닌 자신에게 맞추라는 겁니다. 

앞으로 살아가며 질문자님께 많은 일들이 일어날 텐데, 일일이 그 모든 상황과 사람들에 반응할 수 있을까요? 질문자님께서는 타인에 대한 격렬한 분노가 자주 일어나고, 감정이 일어나면 ‘어떻게 되갚아줄까’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 꽉 차게 되는 것 같습니다. 복수가 가능하면 통쾌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좌절감과 무기력감에 빠지게 되고요. 모든 상황과 사람들에 그렇게 반응한다면 삶이 얼마나 고달플까요? 지금껏 타인의 잘못, 타인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 힘들었다면 시선을 돌려 자신을 바라볼 때입니다.

 

♦ 분노를 다루는 첫 단계 - 상황에 대한 내 해석을 찾아보기

타인의 말과 행동이 나를 자극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 말과 행동에 대해 분노로 반응할까요? 어떤 이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것이고, 또 다른 이들은 웃고 넘겨버릴 수도 있지요. 그러니까, 상황에 대해 나 자신이 필요 이상으로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대개 타인에 대한 분노의 감정은 1) ‘이건 부당해’ 2) ‘나를 무시하고 있어’ 같은 상황 해석으로 인해 생겨나는 경우가 많지요. 

자, 노트와 펜을 준비해 최근 자신이 분노했던 상황을 적고, 그 상황에 대해 자신이 자신이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적어보세요. 생각보다 더 상황을 곡해하여 받아들이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여러 상황들에 대한 해석을 찾다 보면, 자신이 무슨 상황에서, 상대방의 어떤 말과 행동 때문에 분노케 하는 해석이 내려지는지에 대해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목표는 그 상황과 상대방을 바꾸고자 하는 게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해석을 알게 됨으로써 자신의 생각이 감정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알고, 경계하기 위함이지요. 익숙하진 않겠지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이 꼭 필요합니다. 분노가 삶을 갉아먹고 있다고 느낀다면 더더욱이요.

 

♦ 분노를 다루는 두 번째 단계 - 감정, 급한 불 끄기

타인의 말과 행동에 그릇되고 왜곡된 요소가 얼마나 많은지 찾을 수 있었다면, 아니 적어도 자신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었는지 발견할 수 있었다면 그다음 단계는 기존의 행동 대신 건강한 행동을 찾아보는 겁니다. 억지로 꾹꾹 눌러 참는 것도, 상대에게 화를 터뜨리는 것도 결코 건강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는 ‘타인에게 감정을 적절한 수위를 유지하며 이야기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감정을 잘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감정이 터지기 직전이라면 잠깐 물러서서 한 숨 돌리고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어야 하겠지요. 

마샤 리넨한 (Marsha M.Linehan)이라는 심리학자가 만든 변증법적 행동치료(Dialectical Behavioral Therapy, 이하 DBT)라는 치료 기법이 있습니다. 이 치료는 애초에 정신과에서 가장 다루기 힘든 성격장애라고 알려진 경계성 성격장애의 치료를 위해 고안되었습니다. 다음 소개하는 DBT의 두 가지 기법은 자신이 격렬한 감정에 휩싸이는 순간 쓸 수 있는 굉장히 유용한 방법들입니다.

1) 주의 환기하기 :  강렬한 감정이 인식되는 순간 주의를 돌리기

얼음을 꼭 쥐거나, 손목에 채워 놓았던 밴드를 당겼다가 놓는 행동, 뜨겁거나 차가운 물에 샤워하기 등과 같은 순간적인 감각으로 주의를 돌린다. 혹은, 친구나 가족에게 전화를 하는 식으로 타인에게 주의를 돌립니다. 밖에 나가 주변 사람들이 하는 말, 행동, 표정 등에 관심을 돌리는 것도 좋지요. 과거 즐거웠던 장면을 회상하거나 사진을 꺼내 보기, 주변의 자연경관에 주의를 기울이기, 좋아하는 기도문이나 격언을 꺼내 읽기 등도 주의를 환기하는 방법의 하나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이 목록들은 미리 구성되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언제든 실행할 수 있도록 머릿속으로 상황들을 자주 시뮬레이션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2) 이완하기 : 감정이 폭발하기 직전 자신의 마음을 이완시키는 방법

이완하기는 찰나의 순간에 교감신경의 반대급부인 부교감신경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방법들입니다. 우리의 오감을 이용해볼까요? 좋아하는 음식 냄새, 꽃 냄새 등을 이용하거나(후각), 내가 좋아하고, 마음이 편해지는 그림, 내가 즐거웠던 경험을 담은 사진을 이용하고(시각), 따뜻한 물로 샤워하거나, 애완동물의 보드라운 털을 쓰다듬는 것도 성난 마음을 위로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촉각). 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먹거나, 혀가 아릴 정도로 달콤한 초콜릿을 먹기도 하고(미각), 내가 즐겨 듣는 음악,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고, 혹은 창문을 열고 들리는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청각).

감정이 고조된 순간에 사용할 수 있도록 미리 그 목록을 작성해 놓고, 감정이 터져 나올 때 내가 그 목록의 것들을 이용해 자신을 위로하는 장면들을 자주 머릿속으로 그려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찰나의 순간에 그 목록들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 위에서 만든 목록 중 자신에게 가장 적용하기 쉬운 방법을 휴대폰의 메모장 안에 저장하거나, 작은 메모지에 적어 늘 가지고 다니면서 도움을 받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되겠습니다.
 

사진_픽셀


♦ 분노를 다루는 세 번째 단계 : 기존의 행동 vs 건강한 행동

감정을 잘 다스려 급한 불을 끄게 되면, 짧은 순간이지만 이전과 달리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납니다. 화를 내고, 분노를 터뜨렸던 이전과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겠지요? 대체할 수 있는 건강한 행동을 찾아보는 겁니다. 건강한 행동을 본받을 수 있는 롤모델이 있으면, 그의 행동을 일부 모방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감정이 격앙된 순간의 그릇된 해석을 찾고 - 감정의 급한 불을 끄고 - 이전과 다른 건강한 행동을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에 대한 통찰이 생겨나고, 기존과 다른 건강한 습관이 정착될 수 있을 겁니다. 

 

♦ 나는 왜 분노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일까

또 한 가지, 질문자님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왜, 하필이면 질문자님께서 세상을 분노에 가득 차 바라보게 된 것일까요? 왜 주변의 모든 것이 대결 구도, ‘이기는 것, 아니면 지는 것’이 되어버렸을까요? 이 모든 게 상대 탓, 상황 탓일까요? ‘그렇다’라고 대답하신다면 이 질문을 올리지도 않았겠지요. 상대와 상황이 다른데도 똑같이 자극받아 분노를 느낀다면, 한 번쯤은 자신이 타인,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비유하자면, 불량품 한두 개는 솎아내고 없애버리면 그만이지만 나오는 제품들이 모두 하자가 있다면, 기계를 수리해야 하는 것과 같아요.  타인을 불신의 눈초리를 바라보는 데는 성장과정을 통한 경험이 굉장히 크게 작용했을 것 같아요. 어린 시절의 따돌림 경험, 혹은 부모님과의 그릇된 관계 탓일 수도 있지요. 어느 쪽이든 자신의 감정의 뿌리를 잘 헤아리는 일은 자신에 대한 공감과 이해의 문을 열어줄 겁니다. 변화는 그 지점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혼자 힘으로 이 모든 과정을 해내기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방법도 좋겠습니다.

질문자님의 고민에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멀리서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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