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Q) 저는 누군가와 사랑하다 헤어지게 되면 제 맘 속에서 정말 잊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너무나 괴롭고 힘겨운 나날들로 (그리움ㆍ아쉬움ㆍ야속함 등등) 감정 속에서 짧게는 몇 개월 심지어 2-3년씩 가슴앓이를 하다 잊게 되는 성향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너무 힘드네요.

이번에도 남자 친구랑 5 년을 사귀다가 갑자기 다투게 되면서 헤어지게 되었는데 그 친구는 의연한 거 같지만 저는 가슴 아픈 시간을 몇 달째 보내는 중이에요.

이런 제가 너무 싫어요.

정말 아무렇지 않게 털고 명랑하게 지내고 싶은데 자꾸 가슴이 아프고 속이 상해서 괴롭습니다.

 

A) 안녕하세요, 실연의 아픔을 겪고 계시군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게 된 뒤의 아픔은 누구나 한 번쯤은 겪게 되지만,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고통입니다. 그 가슴 아픔이란 정말 글만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음속에 깊이 품었던 누군가를 어느 순간 이후로 뚝 떼어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질문자님 뿐만 아니라 누구나 힘들어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100년 전, 1000년 전에도 사람들은 사랑으로 가슴앓이를 해왔고, 100년 후 1000년 후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픔과 괴로움은 어쩌면 더 성숙한 사랑을 찾기 위한 숙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우선 제가 질문자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질문자님도 '내가 이상한 건가'라는 생각만 하기보다는 그 아픔을 먼저 스스로 보듬어주실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아파할 수 있습니다. 아파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 아픔이 반복되고, 상처와 가슴앓이를 여러 번 겪으면서 우리는 조금씩 성장하게 됩니다.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이별하는 것이 성숙한 것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조금씩 쓰라리지만 그것이 서로가 서로의 마음속을 오가는 방법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품어낼 수 있게 됩니다. 성숙한 관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진_픽셀


하지만, 문제는 그런 아픔들이 반복되어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을 때일 것입니다. 관계가 아무리 반복되어도 늘 항상 과도하게 괴로워하고 있다면, 한 번쯤은 내가 지금 이 관계를 어떻게 맺고 끊어가고 있는가에 대해 돌이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매번 이렇게 아파하고 슬퍼하는 것에는 혹시, 매번 반복되는 어떤 패턴이 있는 것은 아닌가 돌이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매번 사람은 다르지만 매번 비슷한 마음과 비슷한 생각들로 괴로워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매번 똑같이 무너지고 똑같이 집착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어떤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면, 어쩌면 그 괴로움은 나 스스로가 매번 더욱 부채질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실연이라는 누구라도 아파할 작은 괴로움을 나 스스로가 점점 키워내어 거대한 재앙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제가 질문자님의 수많은 기억들을 짧은 질문글만으로 쉽게 넘겨짚을 수는 없습니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사정과 사연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떠한 연유로 헤어졌는지, 어떤 미련으로 그렇게 실연의 아픔에서 헤어 나오기를 힘들어하시는지 제가 쉽게 짐작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드렸듯 질문자님의 그 아픔이 스스로 돌이켜보기에도 너무 과도하고 떨쳐내기 힘든 것이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뭔가 왜곡된 생각이 끼어 들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실제 상대방, 진짜 관계와는 조금 다른 왜곡된 생각 말입니다. 내가 상상하고 내가 기대하는 이미지로 왜곡되고 부풀려진 생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때에, 그 관계에서 무언가를 기대하고 상상하게 됩니다. 상대방에 대해서 어떠어떠한 사람이라고 상상하고 기대하게 됩니다. 실제로 그것을 머릿속에 떠올리지는 않는다고 하더라고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행동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무의식적인 상상과 기대의 형태를 정신과적 용어로는 환상(Fantasy)이라고도 부릅니다.

연애 관계에서는 '남자 친구라면 어떠어떠해야만 한다'라고 생각하는 무의식적인 기대들이 실제로 상대방에게 투영되어 나타나게 되는 나의 행동과 마음들을 환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내 남자 친구는 실수하거나 잘못할 수 없다', '내 남자 친구는 완벽하고 무결하다' 같은 생각들, 혹은 '남자 친구라면 내 마음을 언제나 그대로 알고 이해해주어야 한다', '남자 친구는 언제든 내가 필요할 때에 곁에 있는 느낌을 주어야 한다' 같은 무의식적인 생각들로 남자 친구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 친구에게 내 생각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내 마음을 몰라준다고 서운해하거나, 남자 친구의 사정으로 만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것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거나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그런 기대와 환상이 전혀 없다면, 어쩌면 그것은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이란 어느 정도 서로가 서로의 마음속으로 녹아드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는 나의 마음을 상대방의 마음속에, 또 상대방의 마음을 나의 마음속에 오갈 수 있도록 허용하는 관계가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환상이 있기 때문에 사랑이 더욱 아름답고 로맨틱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환상이 눈을 가려 진짜 관계에서의 아픔을 더욱 키워가고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환상은 기본적으로 진짜 관계를 이끌어가는 현실적인 원리를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은 나와는 다른 존재, 나와는 다른 독립적인 생각과 마음을 가진 인격체, 상대방 또한 나름의 사정과 사연을 가진 나와는 다른 존재라는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 바로 환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환상과 현실이 부딪히게 될 수밖에 없는 순간을 건강하게 잘 해결해나가는 것이 성숙한 관계로 나아가는 핵심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왜곡된 환상이 현실을 벗어나 제멋대로 마구 커져가는 것을 가장 통제하기 힘들 때가 바로 갑작스럽게 이별을 하게 되었을 때입니다. 지금 나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이 환상이 실제와는 다르고, 잘못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려줄 현실 속의 상대방, 실제의 상대방이 사라지고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헤어지고 난 뒤에는 현실에 억눌려있던 환상이 더욱 제멋대로 커져버립니다. 통제할 수 없이 확장됩니다.

그 환상 속에서 때로는 상대방이 내 운명에 다시없을 가장 완벽한 상대로 이상화되기도 합니다. 만남의 기억들 또한 이상적인 것들로만 절묘하게 편집되어 그 이상화된 환상을 더욱 강화시킵니다. 그래서 지금 그 완벽한 이상형을 잃어버린 현실을 더욱 절망적으로 만들어갑니다.

또는 그 환상 속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역할이 너무나 극명하게 쪼개져 버리기도 합니다. 환상 속에서 남자 친구는 피해자, 나는 가해자가 되어 내가 잘못했던 것들의 죄책감을 너무나 과도하게 짊어지게 되기도 합니다. 혹은 남자 친구가 나에게 잘못하고 서운하게 했던 것들만이 떠오르며 남자 친구는 가해자, 나는 피해자가 되어 그런 남자 친구가 대체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는지를 용납할 수 없게 만듭니다. 분노하게 만듭니다. 물론 진짜 관계, 현실 속에서는 그런 역할이 칼 같이 나뉠 수 없습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내가, 어떤 부분에서는 남자 친구가 서로를 아프게 하거나 서로를 기쁘게 했던 순간들이 뒤섞여 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멋대로 뻗어나가기 시작한 환상 속에서는 그 역할이 분열되어버리기 십상입니다. 피해자와 가해자. 못된 사람과 바보처럼 착했던 사람. 두 역할이 나뉘어 버리며 지나가버린 과거들을 더욱 가슴 아프게 만들곤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환상들이 나를 더욱 집착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지나간 관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도록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다는 것입니다. 가만 들여다보면 진짜 현실과는 다르게 왜곡되어버린 생각인데도 말입니다. 그 생각들에 매여 과도하게 슬퍼하고 과도하게 집착하게 만듭니다.
 

사진_픽셀


물론 시간이 해결해주는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 환상을 계속 부채질하던 마음속의 '감정'들이 조금씩 저절로 가라앉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조금씩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로 되돌아올 수 있게 됩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현실에 발이 닿지 않는다면 의식적으로라도 조금씩 노력을 해볼 필요는 있습니다. 지금 나를 힘들게 만드는 것들이 과연 어떤 생각들인지, 어떤 감정들인지, 또 그것들이 얼마나 현실과 진짜 관계에 들어맞는지를 스스로 검열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쉬운 방법 중에 하나는 종이를 펴고 주욱 적어보는 것입니다. 헤어진 전 남자 친구의 장점과 단점을 하나씩 적어보는 것이지요. 장점과 단점을 단지 '어떠어떠하다'라고만 적기보다는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실제 사건들과 함께 적는 것입니다. 장점만 생각나고 단점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억지로라도 찾아볼 필요는 있습니다. 실제로 단점이 없는 사람은 절대 없기 때문입니다. 단점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지금의 내가 과도하게 이상화된 환상에 눈이 가려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적어보고 난 뒤에는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감정과 생각들을 적어보는 것입니다. 슬픔. 분노. 아쉬움. 불안. 등으로 감정을 적어보고 그런 감정이 들게 하는 생각들을 적어보는 것입니다. "분노; 나에게 너무 매몰차게 굴었다" 혹은 "슬픔; 보고 싶은데 볼 수 없다" 같은 것들 말입니다. 가능한 자세히, 가능한 많이 적을수록 좋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는, 스스로 적어둔 그 생각들을 다시 한번 주욱 검토해보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어떤 생각들에 힘들어하고 있는지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한번 훑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연 지금 그 생각이 그 정도의 감정으로 나를 힘들게 할 만큼인지, 벗어날 수 있는 생각인지, 적절한 생각인지를 검토하고 평가해보는 것입니다. 앞서 적은 남자 친구의 장점과 단점을 참고하면서 말입니다.

이렇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지금 나를 이끌고 있는 환상에서 내려와 진짜 현실, 진짜 관계에 다시 발을 붙이기 위함입니다. 지금 내가 붙잡고 슬퍼하고 있는 것이 과연 진짜 관계에서는 어떠한지를 객관적으로 정리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하나둘씩 적어보고 목록화하다 보면 사실은 나를 집착하도록 만드는 것이 나 자신의 왜곡된 환상 탓이었음을 깨닫기 위함입니다.

 

물론 그렇게 현실로 내려온다고 해서 아픔이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누구에게나 아픈 것이고 또 그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까지 힘들어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좀 더 명확하고 객관적으로 직시하는 것 또한 필요합니다. 그 아픔을 상처가 아닌 경험과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만나고 헤어집니다. 그 안에서 괴로움도 슬픔도 아쉬움도 겪습니다. 하지만 그 아픔들이 우리에게 흉측한 흉터로만 남고 우리를 절룩거리게 만드는 상처로만 남는다면 그것은 너무나 비극적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아픔을 딛고 또 다른 만남 또 다른 관계를 향해 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아픔에서 헤어 나오는 법 또한 배울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쪼록 질문자님 또한 새로운 만남을 향해 털어내고 일어날 수 있으시길 응원하겠습니다.

 

 

► 내 고민, 내 사연도 상담하러 가기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전문의 홈 가기
  • 애독자 응원 한 마디
  • "선생님처럼 많은 사람을 도와주고 용기를 줄 수 있는 직업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힘을 많이 얻습니다. 정성스런 상담 너무 감사드립니다."
    "저 자신에게 궁금했던 질문에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