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허규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 님의 사연>

안녕하세요, 맨날 보내볼까 말까 고민하다 이렇게 보냅니다. 바쁘시고 힘드실 텐데 봐주세요.

저는 잘 있다가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제 쪽을 보거나 웃거나 일행들과 얘기를 하면 진짜인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그 사람들이 절 욕하고 비웃고 험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머리 속에서 자꾸 그 상황들이 떠올리고 그 사람들이 절 어떻게 험담하고 비웃는지 그 대화들을 그리면서 날 이렇게 욕하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들로 가득 차요. 그러면서 불안해지고 다른 일에 집중이 안 돼요. 사실이 아니라고 제 얘기를 안 하고 있다고 세뇌를 시키지만 그런 생각들이 사라지지가 않더라고요. 이게 일상생활에 영향을 끼치면서 항상 뭔가 하기 전에 ‘아, 저 사람들이 날 그렇게 생각하면 어떡하지?’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저 사람들은 날 이렇게 생각할까?’라는 생각들이 절 감싸옵니다

항상 제 생각의 중심은 '남'이에요. 남에게 항상 착하고 예의 바르고 성실하게 보여야 하고 남들도 절 그런 사람으로 알고 있어야 하고. 또 제가 불편함을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남들에게 피해 주는걸 진짜 싫어해요. 뭔가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의 일부분만 떼어서 보여주는 느낌? 그래서 남들이 제가 보여준 일부분이 아닌 다른 부분을 보고 정곡을 찌르거나 조언, 피드백을 해줄 때 맞는 말인데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들고 욱해서 화내요. 그것 때문에 가족이랑도 친구랑도 많이 싸웠어요. 그냥 단순히 남을 의식만 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게 결국 제 혐오로 이어지니까 힘든 것 같아요. 이런 생각을 하지 말아야지, 날 좀 더 아껴줘야지 란 생각을 하면서도 다시 반복하고 있는 절 발견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젠 지치네요.

요즘엔 이런 불안감, 생각들을 어떻게 하지 않으면 진짜 아무것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누군가에게 얘기하면 좀 괜찮아진다는 말을 듣고 주변 친구에게 살짝 말을 꺼내봤지만 다들 자신도 그렇다는 말만 하고. 물론 조금은 덜어졌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것도 딱 그 순간뿐, 다시 그런 생각들을 하게 되니까 이게 다 무슨 짓인가 싶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제 얘기를 꺼내려고 하면 눈물이 먼저 나서 얘기하기가 꺼려집니다.

정말 다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사는 걸까요?
 

사진_픽셀


<뇌부자들의 답장>

모르는 사람이 대화를 하거나 E님을 쳐다보는 모습에 스스로를 욕하고 비웃는다는 생각이 들면 정말 힘드시겠어요. 자신과 관련이 없는 중립적인 정보를 자신과 관련 지어 받아들이는 것을 ‘관계사고’라고 합니다. 나와 관계없는 것은 관계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시면 쉬울 것 같아요. 관계 사고는 주로 내가 생각하고 있는 평소의 콤플렉스나 트라우마와 관련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를 쳐다보는 모습을 보고 “내가 오늘 너무 잘 꾸미고 나와서 쳐다보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관계사고는 부정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죠. E님께서는 남을 과도하게 의식하고 더 나아가 자기혐오를 하게 되는데 그 자기혐오가 ‘저 사람들이 나를 비웃는다.’는 생각의 관계사고로 연결이 될 수 있는 거죠.

E님께서는 생각의 중심이 ‘남’이고 항상 올바른 모습만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계신다고 하셨죠. 프로이드가 말한 성격구조 중에 초자아라고 부르는 도덕적 양심, 이상 등을 뜻하는 부분이 있어요. 초자아는 스스로를 관찰하고 평가하고, 검열하는 역할을 하는데요. E님께서는 초자아의 힘이 가혹하게 크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신에 대한 도덕적인 기준, 잣대가 지나치게 높다 보니 그 기준에 못 미치면 자책하고 자기혐오까지도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 초자아는 무의식의 영역에 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지 말아야지, 날 좀 더 아껴줘야지.’라는 생각을 해도 무의식적으로 남을 의식하고 스스로를 평가하고 자책하게 만들 수 있어요. 그러니 “왜 나는 이런 생각도 조절하지 못하지?”라고 한 번 더 자책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선천적으로 사회적 민감성(reward dependence)의 기질이 높은 성향은 아니실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사회적 민감성은 사랑, 인정, 칭찬과 같은 사회적 보상에 반응하는 정도인데요, 남에게 보여야 하는 모습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조언이나 피드백을 받을 때)에서 화를 내는 모습은 높은 사회적 민감성의 기질이 아닐까 생각하게 했어요.

정말 다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사는 건지에 대한 질문을 해주셨는데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해요. 주변 친구들에게 물어봤을 때 다들 자신도 그렇다는 말을 들으셨죠. 저도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어요. 며칠 전에 머리를 했는데 너무 맘에 안 들었는데 길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왠지 제 머리만 쳐다보는 것 같고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거든요. 앞에서 초자아와 사회적 민감성의 측면에서 설명을 드렸는데 예전과 달리 관계사고가 최근에 생겼다면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의 가능성도 염두해 봐야 합니다. 나와 내가 아닌 것을 구별하는 힘,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실제 일어나는 현상을 구별하는 힘을 자아경계(ego boundary)라고 하는데 우울증, 조울증, 조현병, 망상장애처럼 그 경계가 약해질 때 관계사고가 나타나고 심해질 수 있기 때문이죠.

관계사고가 성격적인 특성에 기인한 것인지, 정신질환과 같은 최근의 정신적인 어려움 때문인지 보내주신 사연으로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부모님께서 엄격한 도덕적 기준을 강요하셨던 것은 아닌지 혹은 대인관계에서 큰 상처를 받고 남의 의식하게 되신 것은 아닌지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로 지금의 마음을 가지게 되셨는지 궁금하네요. 

다른 사람들은 나에게 큰 관심이 없습니다. 나를 쳐다본다 하더라도 큰 의미 없이 쳐다보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그리고, 어떤 의도로 나를 쳐다보든지 “네가 그렇게 생각하면 어쩔 건데?”라고 생각하시면 어떨까요.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실 수도 있을 거예요. 이렇게 말씀은 드렸지만 당장은 힘든 마음이 너무 크고 관계 사고에 사로 잡혀 방금 드린 내용이 도움이 되지 않으실 것 같네요. 지금 관계사고 때문에 너무 불안하고 일에 집중하기 어려우시다면 꼭 정신건강의학과에 내원하셔서 정확한 평가와 치료를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뇌부자들 드림. 

 

 

Podcast: https://itun.es/kr/XJaKib.c

팟빵: http://www.podbbang.com/ch/13552

팟티: http://m.podty.me/pod/SC1758/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