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신재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Q) 안녕하세요, 제 고민을 나누고자 합니다. 어렸을 때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되게 활발하고 나서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시점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고등학교 자퇴라는 큰 결심을 하고부터 뭔가 변하기 시작한 거 같아요. 다른 친구들은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데 저는 혼자 뭘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또래들이 학교에 있을 시간에 버스를 타는 것조차도 힘들었어요. 학생인데 학교에 있지 않고 버스를 타는 게 이상해 보일까 봐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한동안 사람들을 피하고 집 밖을 나가지 않았어요.

지금은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 생활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대인관계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학기 초반에 친구와 친해지는 데는 큰 문제없었으나, 친해지고 난 후 문제가 발생합니다. 한 번은 이 친구가 저에게 짜증 섞인 화를 낸 적이 있었는데, 이 친구는 큰 의미 없이 그저 그 순간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었겠지만, 저는 이 친구가 절 싫어한다고 생각하고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되레 불편한 사이가 돼버리기도 했습니다. 입대를 하고 단체생활을 하면서도 대인관계에 여러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친구를 만들 때 속으로는 '실수하면 이 친구가 날 외면할 거야...'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얘가 저를 떠날 거 같으면 아예 친해지려고 하질 않고, 친한 친구(편하지는 않은)에게도 저를 외면하지 않도록 본래의 저의 모습이 아닌 친구에게 맞춰진 성격으로 사는 거 같습니다. 여러 명의 친구들 사이에 섞일 땐 괜히 내가 말했다가 주제와 벗어난 뜬금없는 얘기로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진 않을까, 아님 내가 초대받지 못한, 별로 달갑지 않은 친구이진 않을까 하면서 아무  말 없이 조용하게 주눅 들어 있습니다. 편한 애들 두세 명끼리만 있으면 말도 많고 활발한데, 평소 친하지 않았던 친구가 중간에 끼는 경우 급격하게 말이 없어지죠. 말을 조리 있게 잘하거나 재치 있는 친구가 있으면 그 친구가 부러워서 질투하는 건지 아니면 제 스스로를 그 친구와 비교해서 저를 깎아내리는 건지, 제 스스로가 너무나도 작아지는 느낌이에요. 학교가 끝나고 돌아와서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며 일관되지 않는 제 모습을 한심하게 생각하기도 하고, 왜 내가 이 상황에서 이런 말을 했을까 하는 후회도 자주 합니다.

주변 지인에게는 이런 고민을 털어놓아 본 적이 없습니다.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익명이 보장된 곳이기에 이곳에 조심스럽게 고민을 털어놓아 봅니다.
 

사진_픽셀


A) 인간은 누구나 저마다의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자신의 삶에서 상황에 맞는 가면을 쓰는 것이지요. 결코 이상한 게 아니에요. 정신분석가 칼 구스타프 융은 이를 페르소나(persona)라 불렀어요. 인간은 페르소나를 통해 타인에게 자신을 표현하고, 사람들과 적절하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셈이지요.

그런데 그 가면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요? 아마 정작 가면 뒤 자신의 본래 모습을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해서일 겁니다. 정작 가면 뒤의 자신의 본모습이 당당하지 못하니, 타인에게 보이는 가면 또한 그리 멋들어지게 보일 수 없습니다. 타인에게 보이는 모습에 회의가 들기도 하지요. ‘내가 가식적인 것은 아닐까?’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이는 건 아닐까?’ 하고요. 뿌리가 흔들리니 뿌리에서 뻗어 나온 줄기며 가지가 흔들리는 것과 같아요.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지만 자퇴를 결심하게 된 것이 영향을 주었을 것 같습니다. 처음의 의지와는 달리 또래들과 비교하고, 후회하고, 선택한 자신을 비난하게 되었던 건 아닐까요? 다른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을 걸어가는 게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겁니다.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자꾸 작아지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후회와 자책이 반복되었다면 자신과 타인,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부정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성인기로 나아가는 길목에서 받은 트라우마는 정작 성인이 된 뒤에도 생각, 감정, 태도에 영향을 미칩니다. 질문자님께서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대학에 합격하여 ‘남들과 비슷한 삶’을 살기 시작한 후에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발목이 잡힙니다. 상황은 달라졌지만, 상황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은 바뀌지 않은 탓이지요. 다른 이들의 사소한 말에도 크게 상처를 입고, 움츠러듭니다. 무심코 던진 돌이 호수에 큰 파문을 일으키듯, 생각과 감정이 출렁거려요. 이런 상황에서는 적절하게 가면을 쓰는 일이 불가능합니다. 어설프게 자신의 모습을 포장하려다 더 큰 상처를 입고, 자책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은, 마음 안에 있는 과거의 ‘나’의 흔적을 돌아보라는 겁니다. 자퇴를 결심하고, 또래들과 다른 성장 과정을 거치며 받았던 상처의 흔적을요. 그저 잊고 싶어서 애써 덮어 놓았던 기억인가요? 하지만 당시의 힘든 상황을 온 마음으로 공감하고, 그때의 자신에게 위로를 건네줄 수 있는 이는 바로 질문자님, 자신밖에 없어요. 과거의 자신을 위로할 수 있다면 지금의 상황에 대한 두려움, 자책, 후회는 힘들었던 자신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잊고 싶은 기억일수록 온전히 떠올리고 충분한 위로와 더불어 흘려보내는 과정이 필요할 것 같아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본래의 ‘나’가 건강하고 당당해질 겁니다.

과거의 흔적이 그리 쉽게 씻겨 나가진 않을 거예요. 아직은 과거의 영향력이 남아있는 시기입니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이별하고, 관계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과정들을 겪을 기회가 앞으로 엄청 많을 겁니다. 그러면서 어떤 상황에서 무슨 가면을 써야 할지,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한 경험들이 생겨날 거라 생각합니다. 내면을 건강하게 만드는 데 집중하시면서, 많은 관계를 경험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고여서 썩은 물은 결국 새로운 물을 통해 흘려보낼 수 있으니까요.

작은 도움이나마 되었길 바라봅니다. 멀리서 질문자님을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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