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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ctor's Mail] 매 맞는 애인과 학대받았던 나

기사승인 2018.10.02  09:5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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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학신문 : 김정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30대 중반 여자이고 충동조절장애를 가진 남자 친구를 만나고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저희 아버지는 가부장적이시고 폭력적이셨습니다. 저나 제 동생이 잘못한 것이 있으면 손찌검도 하셨고, 술 드시고 들어오신 날은 더했어요. 저는 어렸고 제 입장에서 아버지는 너무 큰 태산 같아서 대들지도 못하고 혼자 힘들어하며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물론, 어렸을 때 일이고 지금은 아니라 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 이후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맞고 힘들어하던 제 모습이 자꾸 생각이 납니다. 

제 남자 친구는 충동조절장애로 계속해서 거짓말을 하는 증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지난주 토요일 남자 친구와 데이트가 약속되어 있었는데, 당일 아침 못 만날 것 같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본인이 형에게 거짓말을 해서, 형이 약속을 다 취소하라 했다길래 일단 알았다고 했고, 잠깐이라도 보려고 남자 친구 집 근처 커피숍에서 만났습니다. 남자 친구를 만나던 중 어떤 한 남자가 올라오더니 저희 쪽으로 걸어오는데, 느낌이 남자 친구 형 같더라고요. 그런데 갑자기 그분이 남자 친구 머리를 주먹으로 때렸고, 저에게는 “오늘은 (만날 날이) 아닌 것 같다.”라고 얘기했습니다. 너무 놀라고 당황스럽고 무서워서 남자 친구에게 얼른 들어가라고 했고, 남자 친구는 형을 따라 먼저 일어났습니다.

저도 자리를 정리하고 집에 가려고 나가던 중, 커피숍 앞 길거리에서 남자 친구의 형이 남자 친구의 뺨을 때리는 장면을 봤습니다. 뺨을 맞은 남자 친구는 휘청댔고, 저는 너무 놀라 남자 친구 형을 막아서며 왜 그러시냐고 소리쳤습니다. 남자 친구 얼굴에 빨간 손자국이 선명했습니다. 남자 친구에게 괜찮냐 물어보니, 괜찮다고 저에게 집에 들어가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한발 물러섰습니다. 남자 친구는 모든 걸 포기한 것 같은 표정으로 자기 형 앞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습니다. 그 날 하루 종일 남자 친구 걱정, 이 생각, 저 생각에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남자 친구와 그날 일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남자 친구 말로는 본인이 충동조절장애로 자꾸 사고 치고 기억도 못하는 것 때문에 형이 참고 참다가 때렸다는 겁니다. 그날도 집으로 들어가서 남자 친구가 형한테 죄송하다고 하니까 "죄송하냐? 죄송하면 좀 맞자"라고 하며 종아리를 맞았다고 하더라고요. 

남자 친구의 발병시점부터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기 때문에 그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고 집안일에 제가 끼어들 입장은 아닌 걸 알지만,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동생을 때리는 형도, 그걸 본인이 잘못해서 그렇다고 받아들이는 남자 친구도, 그리고 형이 동생을 때리는 줄 아시면서도 말리지 않으시는 부모님도 잘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날 이후 그 장면이 머릿속에 맴돕니다. 커피숍에 앉아있는데 남자가 혼자 들어오면 흠칫흠칫 놀라고 남자 친구를 때리던 남자 친구 형의 모습이 떠오르며 가슴이 두근대고 머리가 쭈뼛쭈뼛 섭니다. 그리고 힘들어했던 제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자꾸 떠올라 괴롭습니다. 그냥 단순히 그날의 충격일까요. 아니면 그동안 잊고 있었던 제 안에 가정폭력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일까요?
 

사진_픽셀


답변) 

세상일은 참 묘합니다. 낮과 밤이 반복되고, 사계절이 반복되며, 윤달도 반복해서 돌아오죠.  하지만 무수한 반복 속에서도, 완전히 똑같은 것은 없습니다. 질문자 분의 삶에서도 완전히 똑같지 않은 반복이 느껴져 가슴이 아픕니다.

얘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정리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남자 친구 분의 '충동조절장애'입니다. 적어주신 글에서는 충동조절 장애를 거짓말을 계속하게 되고, 사고를 치고,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묘사하셨습니다. 하지만 충동조절장애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은 '다른 사람은 자극받지 않는 상황'에서 '발작 같은 공격성'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거짓말이나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은 충동조절장애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남자 친구 분, 자기 자신이 맞는 상황은, 일반적으로 공격성이 나올 수 있는 상황입니다. 이 상황에서 공격성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남자 친구 분은 충동조절장애라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최근 언론을 통해 충동조절장애라는 용어가 대중화되면서, 실제로 충동조절장애가 아닌데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뭐 그리 깐깐하게 구는 거야?'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죠. 하지만 자기 자신을 충동조절장애라고 표현하시는 분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자신의 행동을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이죠.

'나는 충동조절장애가 있어, 그래서 이런 행동을 하는 거야. 병 때문에 그런 거니깐,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야.'

쉽게 말해, 자신이 하는 행동의 원인을 충동조절장애 탓으로 돌리는 거죠. 음주운전자가, '술에 취해서 실수를 한 것이지,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술 탓을 하면서, 교묘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남자 친구분이 스스로가 충동조절장애가 있다고 생각해서, 치료를 받고 있다면 얘기가 다르겠죠. 자신의 치료가 끝나기를 기다려 달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할 수는 있으니까요. 하지만 치료를 받고 있지는 않으시겠죠.

종합해 보면, 남자 친구 분은 충동조절장애가 아니라, 거짓말을 하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의향이 없는 사람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그런 특성을 가지게 된 사연이 있겠지만, 지금 제가 알 수는 없네요. 

 

질문자 분이 현재 남자 친구 분을 사랑하게 된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겠죠. 남자 친구 분도 분명한 장점과 매력을 가지고 있으실 거고요. 하지만 단순히 남자 친구 분이 가진 긍정적인 부분 때문에, 사랑에 빠지신 게 아닌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현재 본인이 가지고 있는 '남자란 이런 사람이야.'라는 이미지에 어린 시절 폭력적인 아버지가 강력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보통의 남자란 폭력적인 존재'라는 이미지를 마음속에 가지고 계시는 듯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속의 이미지가 현실로 나타나는 사건, 즉 남자 친구 형이 남자 친구를 때리는 장면을 봤을 때 강한 충격을 받으신 거겠죠. 마음속 끔찍한 악몽이 현실로 나타났으니 얼마나 놀라셨겠어요.
 

사진_픽사베이


현재 남자 친구 분은 적어도 신체적 폭력을 사용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 남자 친구가 평소에 자기 스스로를 피해자로 묘사할 가능성도 있어 보이고요. 이런 면이 남자 친구에 대한 질문자 분의 사랑에 영향을 주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거짓말을 좀 해도 적어도 나를 때리지는 않겠지.' 또는 '어린 나처럼 당하는 사람이니깐, 나와 비슷한 사람이고, 그러니깐 더 믿을 수 있겠지.' 이렇게요. 올바르지 않은 근거가, 사랑을 하는 데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죠.

일반적으로, 폭력적이고 거짓말을 하는 특성은 내가 사귈 사람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요소지, 그 사람을 평가하는 요소가 아닙니다. 우리는 먹어도 죽지 않는 음식에 대해서 맛을 평가하지, 먹으면 죽는 음식에 대해서 맛을 평가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질문자 분도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정신적 어려움에 대해서 어렴풋이 알고 계신 듯합니다. 왜냐하면 남자 친구에 대한 걱정과 그 가족에 대한 분노에 대해서 길게 적어주셨지만, 결국 마지막 문단에는, 본인 안에 있는 무언가에 대해 걱정하시며 질문을 했으니까요.

정리하면, 질문자 분이 가지고 있는 '보통 남자'에 대한 이미지가 상당히 왜곡되어 있고, 판단 기준도 함께 왜곡되어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남자를 반복해서 만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질문자 분은 괜찮은 사람이라고 판단해서 사귀지만, 그 판단 기준이 왜곡되어 있기에 이런 비극이 일어납니다.

앞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인생은 반복됩니다. 하지만 그 반복 속에는 변화가 있죠. 가을은 늘 돌아오지만, 단풍은 언제나 다른 것처럼요.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단풍나무가 붕어빵 나무가 되지는 않겠죠. 하지만 어떤 단풍나무를 심고, 어떻게 가꾸는지에 따라서 어느 정도는 내가 원하는 단풍을 얻을 수는 있습니다. 먼저 본인이 어떤 단풍을 원하고 있는지 충분히 고민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주변 정신과 선생님들께 얘기해 보세요. 분명히 마음이 맞는 분을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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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kpdco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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