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노현재 의사]

 

환자의 병이 재발하거나 치료 요법이 듣지 않는 경우가 생긴다 해도 그것이 반드시 의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탓이라고 할 수는 없다.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은 이유는 이와는 별개일 수 있다.

환자가 의사에게 협력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로 “순응”을 뽑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순응도나 협력과 같은 요소와 관련하여 사람들이 근거 없이 믿고 있는 몇 가지 신화들이 있다. 사회경제적으로 유복한 사람들은 규정된 치료 계획을 벗어날 가능성이 적다는 믿음도 그런 신화들 중 대표적인 하나이다.

실상을 들여다보면, 앞서 언급한 믿음과는 반대임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가 잇따라 나오고 있다. 규칙을 준수하지 않는 모습은 사회 계층이나 인종을 비롯해, 어떤 기준으로 나누었는가와 상관없이 모두에게 나타나는 현상이기에 환자별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결론을 무시하는 것은 각 개인뿐 아니라 환자 집단 전체를 평등하게 치료하는 문제에 위험한 오판을 낳을 수 있다.

예컨대 미국에서 일부 전문의들은 세 가지 약을 혼합하여 쓰는 HIV 칵테일 요법에 대하여 차별적 사용을 고려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긴다. 심각한 개인적, 사회적 문제가 있는 환자들은 제외하자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치료를 포기할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약에 내성을 가진 HIV의 보균자가 될 가능성을 높일 뿐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이것은 환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일 뿐 아니라, 감염된 사람들로부터 감염 관리가 가능하다는 믿음을 이끌어낼 전략들이 시행될 가능성을 사전에 모두 봉쇄하는 것이다.
 

사진_픽사베이


환자들의 순응도를 높이는 방법들 중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각자의 상황에 맞게 개인별로 특화된 치료 계획을 짜면서 환자를 참여시키는 것이다. 사실 일탈한 사람들이나 신뢰도가 가장 떨어지는 것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에게 낙인을 찍는 것은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순응하지 않는 집단이라고 해서 변태적으로 행동하는 죄를 범하기라도 한 것처럼 취급해서는 안 된다. 그런 행태는 순응도가 낮은 환자들이 전반적으로 널리 퍼져 있다는 사실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일 뿐 아니라, 격려를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것이다. 이 같은 비난을 하지 않는 것은 곧 히포크라테스 아포리즘의 가르침에 부응하는 일이기도 하다.

히포크라테스 아포리즘, 다시 말해 의사는 “스스로 옳은 일을 할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목표는 환자를 치료라는 여정을 함께 걸어갈 동반자로 끌어들일 때에만 달성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건강을 위한 바람직한 행태가 무엇인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어떻게 해야 건강을 유지하며 특정 질병을 예방하고 부상 위험을 줄이면서 노화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쇠약해짐을 줄일 수 있는지 알고 있다.

 

거의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 있다. 건강에 나쁜 음식을 피하고 건강에 좋은 음식을 식단에 추가하며 운동을 많이 하고 안전한 섹스를 하며 특정한 약물을 멀리하며 담배를 멀리하고 직사광선은 가능한 한 피하며 음주를 절제하고 몸의 부스럼이나 타박상, 상처, 형태가 달라진 사마귀, 덩어리 비정상적이거나 달라진 분비액이 있다면 병원에서 점검하고 정상 체중을 유지하며 안전벨트와 자전거 안전모를 착용하며 외국에 여행할 때는 특정한 주의사항을 준수해야 한다는 것 말이다. 

히포크라테스의 권고와 반대로, 이런 문제에 관해서는 의사가 사람들이 협력하게 만들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이렇게 잘 알려진 건강 안전 지침들을 지키는 것은 의사가 함께 지켜줘야 하기보다는 개인 스스로가 책임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담배를 자주 태우거나, 종일 TV만 보는 사람, 혹은 뚱보는 무책임하다는 뜻인가? 그렇게 말하고 싶은 유혹이 있다 해도 “그렇다”라고 대답하는 것은 타인을 도덕적으로 재단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더 나아가 매독이나 에이즈와 같은 특정 질병에 걸린 사실을 근거로 환자를 비난하는 것이 온당한 일인가? 최근에 언급한 바와 같이 행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고 있다. 이는 필시 독선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건강 이상에 따른 비용과 사회적 손실을 고려할 때, 만일 내가 뷔페에서 디저트를 한 그릇 더 먹기 위해 손을 뻗거나, 체육관 등록 기간의 만료를 방치한다면 나는 나쁜 시민인가?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비만한 사람들을 비판하고 누가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면 화를 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미미한 간접흡연 한차례가 우리의 건강에 끼질 수 있는 위험은 얼마나 되는가? 우리는 그런 위험에 정당화될 수 있는 수준보다 더 크게 화를 낸다. 우리의 비판이나 분노에는 경멸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크다. 마치 날씬하고 절제 있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규칙을 어기는 자들보다 어떻든 더 훌륭하다는 듯한 경멸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병에 걸리면 우리는 “병을 자초했다”라고 말하며, 왜 우리가 내는 보험료와 세금이 저런 사람들의 치료비로 쓰여야 하는 의아해한다. 때로는 큰소리로 여기에 불만을 표시하며, 심지어 정책에 영향을 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한다. 이것은 히포크라테스의 추종자들이 염두에 두었던 것이라 할 수 없다. 스스로를 잘 돌보는 것은 건강이 좋아질 가능성이 커지는 보상을 가져다줄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을 도덕적으로 우월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사진_픽셀


그렇다면 개인이 책임져야 할 범위는 어디까지 일까? 오늘날 미디어는 우리의 관심 질병에 대해 치료 성적이 가장 좋은 병원이 어느 곳인지 확인하라고 설득한다. 그리고 수많은 병원 측 실수에 대비하라고 한다. 여러 가지 단체들은 사람들에게 충고한다. “겁내지 말고 따져라 확고한 태도를 취하라.” 

그렇다. 근래에 들어와 무시무시한 책임이 환자의 쇠약한 어깨 위에 떨어졌다. 심지어 건강 유지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의 튼튼한 어깨 위에도 떨어졌다. 우리는 완전히 포위되어 있다. 끔찍한 결과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면 따라야만 할 규칙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다.  

이 같은 독재의 한 형태로는 요즘 과도하게 칭송받는 자기결정권을 들 수 있다. 이는 생명윤리학자들의 총아이자 의사들의 마음속에서 커다란 갈등을 일으키는 원천이다. 의사들을 움직이는 동기는 도움을 기대하는 남녀에게 최선을 다한다는 것밖에 없음에도 갈등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건강이 망가진 상황에서 자기결정권이란 것은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런데도 자기 결정권은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다. 아픈 사람에게서나 건강한 사람에게서나 좋은 결정을 내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건강이라는 단어는 그 위에 독재자처럼 군림하고 있다.  

의술이 가부장적 권위를 가졌던 시대는 오래전에 지나갔다는 사실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양식을 통해야 할 필요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는 모든 환자가 최선을 다한 인간적인 돌봄을 누릴 수 있게 하려면 필수적인 일이다. 

히포크라테스 수칙에 따르면, 이에 대한 모든 해답은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사람을 사랑하고 의사와 환자와 그 가족이 서로 사랑하면 상호 신뢰가 가능해진다. 이는 책임을 공유하는 동지관계와 최선의 의사결정을 낳는다. 내가 보기에 이런 종류의 사랑은 건강의 독재뿐 아니라 의료 가부장주의와, 자발성 없는 자기 결정주의도 막아낸다. 

이 같은 사랑은 환자에게 압력을 가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사람 간에 도덕적 우위를 감별하고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타인을 깎아내리지도 않는다. 그저 무기력한 환자, 불우한 사람들, 혹은 어떤 이유에서든 스스로의 건강을 ‘책임질’ 여건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안아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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