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신재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건드리기만 해도 '욱'하는 세상

최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발표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습관 및 충동장애(분노조절장애)’로 진료를 받은 사람은 2013년 4,934명에서 2017년 5,986명으로 증가했다고 합니다. 또한 경찰청이 발표한 ‘2016 통계연보’에 따르면 강력범죄(상해나 폭행, 폭력 범죄와 방화 등) 40만 8,036건 중 범행 동기가 우발적이거나 현실에 불만이 있는 ‘분노 범죄’가 35%(14만 5,754건)에 달했다고 하네요. 

건강한 감정 표현이 사라진 것 같은 요즘입니다.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는 '분노조절장애'라는 단어가 이제 낯설지 않은 것은 기분 탓만은 아니겠지요. 강력범죄에서 분노란 감정이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따져보지 않더라도, 자신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충돌 안에 분노가 섞이지 않는 때가 있을까요? 특히 100년 만의 무더위를 몸소 실감하고 있는 요즘 같은 때엔 몸에 흐르는 땀과 높은 습도가 정말 사람을 '미춰버리게' 만듭니다. 누가 살짝만 건드려도 머리 안에서 '빠직', 인내의 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나지요.

감정은 금세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마음 안에 분노의 빨간 불이 켜지자마자 언성을 높이거나, 폭언, 과격한 행동이 뒤따라 옵니다. 그런 감정의 행동화(acting-out)가 속이 시원하지도 않습니다. 감정을 터뜨려버리곤 금세 찜찜함이 마음 한 켠을 차지합니다. 분노를 터뜨리는 것은 화낸 사람도, 당한 사람도 불편합니다.
 

사진_픽사베이


♦ 감정 - 기록하기(recording)의 힘

분노를 자주 터뜨리는 이들과 이야기하면, "나도 모르게 화가 나서, 제어할 수 없어요. 나도 왜 이런지 모르겠어요.", "사람 마음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잖아요."라며 볼멘소리로 대꾸합니다. 감정을 조절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거지요. 

일부 맞는 내용도 있습니다. 감정은 말 그대로 감정의 영역에 속합니다. 감정은 지극히 무의식적인 과정을 거쳐 마음 안에서 생겨나고, 우리의 몸과 마음에 영향을 미칩니다. 무의식은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부분이라  꽤 오래전부터 정신의학에서 무의식의 탐구에 지대한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무의식의 언저리를 추측만 할 수 있을 뿐, 이를 제어하고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분노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의 영역이니 그대로 두란 말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감정을 조금이나마 제어하기 위해서는 감정의 영역에 이성을 살짝 끼얹어 주는 작업이 꼭 필요합니다.

감정은 주로 인간의 뇌 중 변연계(limbic system)의 작용으로 나타납니다. 이성은 주로 뇌의 피질 부위, 특히 전두엽(frontal lobe)에서 담당합니다. 이 두 부위는 연결되어 있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감정이 폭풍처럼 휘몰아칠 땐, 변연계가 과도하게 활성화됩니다. 이때는 전두엽의 기능을 압도할 정도가 되기 때문에 hijacking(납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지요. 

그 반대도 가능합니다. 많이 알려져 있듯, 뇌세포들은 신경 가소성(neuroplasticity)을 가지고 있어 인간의 활동이나 습관, 노력에 따라 세포 간의 연결이 조금씩 변합니다. 우리가 감정을 잘 조절하기 위해 이성적 영역의 활동을 하거나, 습관을 들인다면 전두엽의 영향력이 점차 강해질 수 있습니다. 이는 감정 조절의 튼튼한 밑바탕이 될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출발선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더라도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면 무분별한 감정의 분출을 줄일 희망이 있다는 말이기도 하겠네요. 

치료의 영역에서 사용하는 방법은, 바로 기록하기(recording)입니다. 기분 장애와 불안 장애에서 효과적인 치료 방법으로 사용되는 인지행동치료(cognitive behavioral therapy)에서 주로 사용하는 접근입니다. 현재의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점수를 매기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그런 다음, 감정이 느껴진 이후 이어진 행동을 기록하고, 그 결과를 기록합니다. 과도한 분노와 더불어 나타난 생각 또한 기록하고, 생각의 왜곡 정도를 판별하기도 합니다.

감정이 터지기 직전에도 노트를 꺼내 가만히 자신의 감정을 기록하고 판별하다 보면, 신기하게도 서서히 감정이 가라앉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그런 것도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스스로 감정을 통제하는 경험을 했다는 것이지요.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 같던 감정에 이성이 조금씩 뿌리내리는 순간이라 할 수 있겠네요.
 

사진_픽셀


♦ 감정이 지나가는 '첫 경험'을 해보자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감정은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일뿐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며 즐거운 일, 행복한 일, 화나는 일, 슬픈 일을 번갈아 겪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반응하고 대처하지는 않지요. 어떤 일은 가만히 두어도 절로 해결되거나, 사라지기도 합니다.

감정도 이와 같습니다. 이 감정을 꼭 풀어야만 성에 찰 것 같고, 이 분이 풀리지 않으면 하루 내내 기분 나쁠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서 하늘 위의 구름처럼 서서히 감정이 옅어집니다. 이 사실을 마음에 새겨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감정을 이미지화하는 연습을 자주 해 두세요. 약간의 불안, 분노, 우울이 느껴진다면 하늘의 구름이 천천히 느린 속도로 움직여 시야에서 사라지듯 감정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에서 비켜납니다. 그리 강하지 않은 감정을 느낄 때면 눈을 감고 감정이 흘러가는 것을 이미지화하는 것도 좋습니다. 

자신이 분노를 비롯한 감정에 자주 휘둘린다면, 노트를 하나 마련하세요. 감정 일기, 감정 기록지, 내 마음 기록지... 제목은 뭐든 그럴싸하게 지을 수 있습니다. 자주 분노에 휘둘리는 순간을 기록해봅시다. 반복되는 상황, 그리고 그 상황에서 예상되는 감정을 적습니다. 또, 감정의 점수도 0-100점 사이로 적어봅니다. 평소에 했던 반응을 기록합니다.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는 행동들이 되겠지요. 어느 쪽이든 분노에 이끌린 반응(emotion-driven behavior)은 찜찜한 결말만을 남깁니다. 

이제, 감정이 찾아왔을 때 할 수 있는 다른 건강한 시도를 찾아봅시다. 위에서 설명했듯 조용한 곳에서 차분하게 노트에 감정과 상황, 현 생각들을 기록하거나 이미지화하며 눈을 감고 명상하는 것도 좋습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는 차가운 물로 하는 샤워, 땀을 내는 뜀박질, 시끄러운 음악을 들으며 몸을 움직이는 등 주의를 분산하는 수단을 사용할 필요도 있습니다. 물론, 주의 분산은 감정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습관화될 수 있어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분노를 조절할 수 있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감정이라 이름 붙여진 '마음의 현상'이 지나가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정말 중요한 것은 <단 한 번의 경험>입니다. 이전에는 감정에 휘둘린 행동으로 분노를 분출했다면, 그 감정을 이성적으로 파악하고, 다른 건강한 행동으로 대처했던 '첫 경험'이 필요하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분노를 잘 통제했던 첫 경험은 향후 변화의 중요한 동기가 될 겁니다. 물론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변화란 원래 가랑비에 옷 젖듯 서서히 나타나기 마련이니까요. 

 

 

* 참고 자료

분노 조절하기 : 내 마음 속의 헐크를 길들이는 법, 건강나래-마음의 소리(http://hirawebzine.or.kr/14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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