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실제 상담 내용을 재가공하여 구성한 내용입니다. 내담자의 동의를 얻어 작성되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실제 상담과 비교해 설명을 많이 덧붙였습니다. 실제 상담의 흐름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점 미리 밝힙니다.)

 

내담자: 안녕하세요. 저는 27살 여자입니다. 사귄 지 1년 된 남자 친구가 있는데요. 소위 말하는 성격 차이인 건지, 다툴 때가 자주 있는 거 같습니다. 남자 친구도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만 저한테는 이해가 잘 안 되는 거 같아요. 얼마 전에도 조금 다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남자 친구가 친한 친구랑 약속이 있어서 술자리를 가졌는데요. 저는 중간중간에 저한테 연락을 할 줄 알고 기다렸거든요. 그런데 연락이 한 통 없는 거예요. 9시, 10시까지는 이해를 한다 쳐도 12시가 넘어서 친구랑 헤어지고 나서야 연락이 오더라고요. 제가 그래서 툴툴거렸더니, ‘친구 만나는 거 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그러냐’고 오히려 저한테 뭐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그래도 톡 하나는 할 줄 알았다. 연락이 없으니까 걱정이 되어서 그랬다.’고 이야기를 했는데요. 남자 친구는 이해를 못하더라고요. ‘자기가 애도 아니고 무슨 걱정을 하냐고. 지금 전화를 하지 않았냐고.’ 그러더라고요.

얘기를 들어보니까, 친구가 여자 친구랑 헤어지고 심각한 일이 있어서 고민 상담을 해주느라 톡을 할 여유가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둘 밖에 없는 자리였고 친한 친구가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데 어떻게 핸드폰을 신경 쓰고 있냐고 하는데 이해가 안 되지는 않더라고요. 제 친구들한테도 이 문제로 이야기를 했었는데, 제 친구들이 ‘말이냐, 방귀냐. 그럼 화장실 갈 시간도 없냐.’라면서 더 화를 내더라고요. 그런데 제 남자 친구는 원래 좀 multi-tasking이 안 되는 편이기는 해요. 운전을 할 때 제가 말을 시키면 길을 놓친 적도 여러 번 있었거든요. 자기는 한 번에 하나 이상의 일은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원래도 한 군데에 집중력이 높은 스타일이기도 해요.
 

상담자: 이해를 하려고 애쓰시는 것처럼 보이네요.

내담자: 그렇지는 않아요. 남자 친구는 저한테 왜 그렇게 이해를 못 해주냐고 하는 걸요. 제가 잘 삐지기도 하고, 저는 이해를 잘해주는 스타일은 아닌 거 같아요. 

상담자: 이번 일은 어떻게 마무리가 되었나요?

내담자: 그냥 서로 오해를 한 것 같다고 하며 잘 풀었어요.
 

사진_픽사베이


상담자: 잘 푼 게 맞나요?

내담자: 네? 서로 잘못했다 했으니까 풀린 게 아닌가요?

상담자: 잘 풀렸는데, 친구들한테 왜 또 이야기를 했을까요?

내담자: 음... 제 편이 되어줄 사람을 찾고 싶었던 거 같아요. 남자 친구랑 화해를 하기는 했지만 별로 후련하지는 않더라고요. 그래서 그랬던 거 같아요.

상담자: 겉으로는 갈등을 해결했지만 적어도 OOO 씨 내적으로는 갈등이 많고 아직 서운한 마음이, 그러한 감정이 크다는 느낌을 많이 받거든요.

내담자: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면 싸움밖에 더 되겠어요? 그렇게 해야 한다고 배운 거 같아요. 그 사람 입장에서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을 해봐야 한다. 그렇게 배운 거 같아요.
 

상담자: OOO 씨 말씀처럼 남의 입장에서 다 생각을 하고 이해를 하면 가장 좋은 일인 거 같아요. 그 자체가 잘못된 일은 아닌 거 같은데요. 그 과정에 있어서 OOO 씨 스스로의 내적 갈등도 사라지면, 남을 이해하고 나의 내적 갈등도 사라지면, 그건 정말로 이상적인 부분이겠지요. 하지만 OOO 씨는 서운하시잖아요. 화도 나시잖아요. 그 감정을 무시해서 그 감정이 사라지면 좋을 텐데, 우리의 감정은 직접 봐주고 다루어주지 않으면 절대 사라지지 않아요. OOO 씨가 그 감정을 봐주지는 않고 이해하는 것‘처럼’만 하면 안에 서운함과 화는 계속 존재할 수밖에 없어요. 그건 진정한 이해가 아니에요.

남자 친구는 OOO 씨가 이해한다고 하고, 서로 갈등을 풀었다고 하니까 해결이 다 된 줄 알 거 아니에요. 그런데 아닌 걸요? 내 안에는 서운함과 화 같은 내적 갈등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거잖아요. 그렇게 해결되지 않은 감정이 있으니까 친구들에게 찾아가서 토로를 하셨던 거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 감정은 쌓여서 다음에 비슷한 사건이 생기면 축적돼서 내게 느껴지겠지요. 그러면 5만큼 화를 낼 일을 20만큼 내게 되어있습니다. 그만큼 쌓여 있는 게 있으니까요. 그러면 남자 친구 입장에서는 황당하고 부당하게 느껴질 수 있어요. 남자 친구 입장에서는 그만큼 화낼 일이 아닌데 20만큼 화를 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니까요. 그러면 남자 친구도 화가 나고 그렇게 서로 싸움이 커진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그것은 이해하는 것‘처럼’만이지, 진정한 이해가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던 겁니다.

진정한 이해란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 것이 동반이 되어야만 진정한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을 배제한 채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이해를 흉내 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OOO 씨는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학습된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우리의 심리 기제는 갑자기 ‘here & now’에서 ‘뿅’하고 생기는 것이 아니거든요. 과거에서부터 형성된 심리 기제가 지금까지 그대로 작동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아마도 OOO 씨는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그러한 심리 기제들이 형성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내담자: 선생님 말씀이 맞는 거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제 감정을 많이 억누르고 살아왔던 거 같아요. 저는 그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내 감정을 존중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못했던 거 같아요. 그런 생각은 한 번도 못해봤네요. 어렸을 때 부모님이 예의범절을 엄청 중요시하셨어요. 그렇게 교육을 받다 보니 ‘애어른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었어요. 저는 그게 칭찬일 줄 알았고, 더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던 거 같아요.

상담자: 제 추측이 맞다면 OOO 씨가 이해하는 것‘처럼’ 하는 노력을 남자 친구에게만 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해요. 친구 관계에서든 직장 관계에서든 어디에서든 똑같은 패턴이 나타나실 거라 생각해요.

내담자: (말을 끊으며) 네, 맞아요. 저 스스로 ‘착한 아이 콤플렉스’라고 생각한 적이 많아요.
 

상담자: 저는 거기에 ‘착하다’는 표현은 안 썼으면 좋겠어요. ‘착하다’는 표현은 긍정적인 표현으로 느껴지잖아요. 저는 ‘내 감정’을 무시한 채 타인에게만 맞추는 것을 절대 ‘착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건 나쁜 거예요.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 가장 존중받고 이해받아야 할 대상은 ‘나의 감정’이에요. 절대 무시할 대상이 아니에요. 그걸 무시한다는 것은 ‘내 삶 자체’에 대한 방조고 죄라고 생각해요.

OOO 씨가 그렇게 되어온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부모님의 엄격한 훈육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단정 지을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OOO 씨가 어렸을 때의 마음으로 돌아가 그때 마음을 한 번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이가 ‘애어른’처럼 행동하기까지 온갖 마음이 서로 싸웠을 겁니다.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싶은 마음, 애어른처럼 행동해서 부모님이나 다른 어른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내 감정을 억누름으로써 생기는 불안, 노력하지만 스멀스멀 올라오는 감정들 때문에 느껴지는 죄책감 등등등. 분명 5살 때 OOO 씨는 이런 온갖 내적 갈등에 시달렸을 겁니다. 그 마음부터 느끼고 알아주는 게 먼저일 거 같아요. 그 마음도 ‘내 마음’이니까요. 더군다나 마음속 깊이 뿌리박고 있는 그러한 마음이니까요.

그 마음부터 떠올리고 다루어주신다면, OOO 씨는 분명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셔서 좀 더 건강한 마음으로 사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굿 윌 헌팅 영화 주인공인 윌이 했던 게 그거였잖아요(10번째 연재 참조-링크). 그러한 마음의 갈등은 5살짜리 아이가 겪기에 결코 가볍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걸 보듬어 주는 것은 지금의 OOO 씨가 해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착한 아이’는 더 이상 OOO 씨를 괴롭히지 않고, 자유롭게 OOO 씨에게서 떠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마음은 무시하지 말고 바라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해야 할 유일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내 마음’을 바라봐주고 인정해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전체기사 보기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