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세계 2차 대전 당시 독일로부터 해방하기 위한 일환으로 네덜란드 임시정부는 나치군의 병력 수송을 저지하고자 자국 철도 노동자들에게 파업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파업은 실패로 돌아갔고 독일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네덜란드의 식량 보급을 전부 차단하였다. 그 해 10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2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굶어 죽었으며 이는 오늘날 네덜란드 대기근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들은 추운 겨울을 지내면서 하루 800칼로리 미만으로 살아갔는데 이는 임산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쟁이 끝난 후 대기근 동안 탄생한 아이들에 대한 추적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연구자들은 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대기근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보다 비만일 확률이 높고 당뇨 및 심혈관 질병 등을 앓을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렇듯 외부 환경이 우리의 유전자 수준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 후성유전학(epigenetics)의 연구 분야로서 오늘날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사진_픽사베이


최근 미국 메릴랜드 의대의 트레이시 베일(Tracy Bale) 박사와 그의 연구팀은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거나 트라우마를 겪은 아버지는 후에 자식들에게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연구를 발표하였다. 아버지의 정자가 스트레스에 대한 경험을 기억하고 다음 세대로 전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자는 어떻게 우리가 겪는 스트레스나 트라우마를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문제는 정자 세포 안에 있는 DNA는 너무 촘촘히 응축되어 있어 외부 환경 변화에 영향을 받는다고 보기에는 논란에 여지가 있다. 대신에, 연구팀은 환경에 영향을 받는 다른 종류의 세포가 정자 세포와 함께 상호작용 한다고 가정하였다. 정자 세포를 성장하게 도와주는 일련의 세포 집단이 있는데 바로 이 세포 집단에서 분비되는 세포 밖 소포체(extracellular vesicles)의 내용물들이 환경에 영향을 받고 최종적으로 정자세포와 융합되기 때문에 아버지가 겪은 스트레스가 자식에게 유전되어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연구팀은 생쥐 정자의 반은 이전에 스트레스 호르몬에 노출되었던 소포체와 융합하고 나머지 반은 정상적인 소포체와 융합하였다. 이후, 체외수정을 통해 정상적인 암컷 쥐의 난자와 각각의 정자들과 수정시켰다. 정상 정자를 통해 수정된 자손 쥐의 태아는 건강하게 성장했지만 스트레스 호르몬에 노출되었던 태아는 스트레스를 경험한 아비 쥐가 보였던 반응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결과적으로 세포 밖 소포체는 부모가 겪은 스트레스 신호를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통로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연구팀의 일원이었던 모건 박사는 동물 실험에서 얻은 결과를 사람에게 적용하기 위해 현재 미국 펜실베니아 의대 정신과 의사 닐 에퍼슨(Neill Epperson)과 함께 인간 정자 샘플에서 단백질 및 RNA 변성을 연구 중이다. 6개월간 20명의 대학생의 정자를 분석한 예비 데이터에 따르면 학생들이 스트레스를 보고한 후 몇 개월 뒤 그들의 정자 속에 유전자를 조절하는 RNA에 변화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를 토대로 연구자들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겪는 작은 스트레스에서부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신경질환과 같은 장기적인 스트레스 요인들이 세포의 분자적 수준의 변화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보다 정확히 밝혀지길 기대하고 있다.

 

* 참고

1. How Dad’s Stresses Get Passed Along to Offspring
https://www.scientificamerican.com/article/how-dads-stresses-get-passed-along-to-offspring/

2. The Famine Ended 70 Years Ago, but Dutch Genes Still Bear Scars
https://www.nytimes.com/2018/01/31/science/dutch-famine-genes.html

3. 태아기 경험이 평생 건강에 영향을 끼치는 이유
http://scienceon.hani.co.kr/257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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