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실제 상담 내용을 재가공하여 구성한 내용입니다. 내담자의 동의를 얻어 작성되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실제 상담과 비교해 설명을 많이 덧붙였습니다. 실제 상담의 흐름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점 미리 밝힙니다.)

 

내담자: 안녕하세요. 저는 26살 남성입니다.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대학생입니다.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친구면 누구나가 다 그렇겠지만, 저는 특히 더 우울하고 불안하고 무기력한 거 같아요. 마음속에는 ‘뭔가라도 해야 하는데’라는 짐은 항상 있는데, 막상 실제로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아요.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안 될 거 같은 마음이 많이 드는데, 막상 몸이 움직여지지가 않는 거 같아요.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거에 대한 죄책감이 들어요. 주변에서 살 좀 빼라고 하고 저도 그런 필요성을 느껴서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는데, 의욕이 생기지가 않아요. 그러고 그냥 넘어가면 되는데, 또 죄책감은 무지 느끼고 있어요. ‘생각만 하고, 죄책감 느끼고’가 반복되는 거 같아요. 세상에는 너무 정해진 기준에만 맞추라고 하는 게 있는 거 같아요. 살을 빼는 것도 그렇고, 회사에 취업하는 것도 그래요. 결국 회사에 취업을 하는 것도 경쟁하는 거잖아요. 결국 친구를 밟고 올라서야 하는 거고. 저는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아요. 제가 살고 싶은 모습이랑 현실이랑 충돌하는 거 같아요.
 

사진_픽셀


상담자: 살고 싶은 모습이라고 하셨는데요. 그게 뭔가요?

내담자: 배우고 싶은 거 배우고, 그렇게...

상담자: 배우고 싶은 게 뭔가요?

내담자: 예술 같은 거, 그런 것도 배우고 싶고...

상담자: 어떤 거요?

내담자: (침묵) 그냥 떠나고 싶어요. 무조건적으로 저를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지금 여기에는 그런 사람이 없는 거 같아요. 저 혼자인 것만 같아요.
 

상담자: 살고 싶은 모습이랑 현실이랑 충돌한다고 표현을 하셨는데요. 막상 물어보니 살고 싶은 모습이 무엇인지를 모르겠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이 하나도 없다는 거 느끼셨나요?

내담자: (작은 목소리로) 네.

상담자: 구체적인 내용이 없이, 살고 싶은 모습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살고 싶은 모습이 있어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도망가기 위한 핑계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살고 싶은 모습이 있다면, 그렇게 추상적인 이야기만 나오지 않습니다. 진짜 하고 싶은 게 있는데, 어떻게 막연할 수 있겠어요? 막연하다는 것은 없다는 것과 동일합니다. OOO 씨는 지금 여기가 싫은 거고,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고 느껴지는데요, 여기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 드세요?

내담자: (침묵) 네, 그런 거 같아요. 사실 제가 ‘워킹 홀리데이’를 준비 중이었거든요. 돈도 벌고, 경험도 쌓아야겠다고 생각을 했었는데요. 지금 준비를 하나도 안 하고 있어요. 두렵기도 해요. 잘 모르는 곳에 가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그냥 여기서 떠나고 싶었던 거 같아요. 사실 안 가고 싶었던 거 같아요. 호주를 가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냥 지금 여기가 싫었던 거 같아요. 맞아요. 저한테 ‘워킹 홀리데이를 가고 싶다’만 있었지,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건 하나도 없네요. 막상 구체적으로 준비하려고 하니까 무서웠어요. 그런데도 주변에는 ‘나 워킹 홀리데이 갈 거다.’라고 하고. 부모님이 준비 어떻게 하고 있냐고 물어보시면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라.’고 화만 냈던 거 같아요.

그러네요. 저한테는 도망갈 ‘어떤 곳’이 필요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냥 이 헬조선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헬조선, 헬조선이라고 하면서 순응하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 신기해요. 평범하게 살아야 되는 걸 인정 못하는 것 같아요. 어렸을 때는 제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었던 거 같아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고등학교 때 많이 깨졌어요. 제가 중학교 때까지는 중상위권 성적은 유지를 했었거든요. 그런데 고등학교를 들어가면서 성적이 많이 떨어졌어요. 그때부터 자신감도 많이 잃고. 학교 가는 것도 싫었어요. 사실은 자퇴하고 검정고시 준비하려고 했는데, 부모님이 반대해서 일단 졸업은 하라고 하셨거든요. 예전에는 뭘 해도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때 이후로는 뭘 해도 못 할 거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거 같아요. 한국은 너무 성적, 외모 이런 기준으로만 사람들을 평가하는 거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괜히 헬조선이 아닌 거 같아요.

상담자: 고등학교 때도 비슷하게 회피하려 하셨었네요.

내담자: 말을 하다 보니까 그러네요. 자신감이 많이 떨어지면서 그때부터 도망가려고 많이 했던 거 같아요. 저도 제가 계속 이렇게 회피하려고만 하고 있었는지 인식을 못 했던 거 같아요. 회피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닌 거 같은데...
 

사진_픽사베이


상담자: 중요한 말인 거 같습니다. 사실 무언가를 해결하기 위해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는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대상’이 없으면 해결할 무엇도 없어집니다. 그런데 ‘회피’라는 방어기제는 ‘대상’을 없애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해결하거나 변화할 수 있는 여지조차 없애 버리게 됩니다. 야구를 잘하고 싶은데, 공이 날아오면 무섭다고 눈을 감아버리면, 그 무엇도 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회피해서는 안 된다.’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명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얼마나 ‘회피’를 하고 있는지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OOO 씨께서도 “계속 이렇게 회피하려고만 하고 있었는지 인식을 못 했던 거 같다.”라고 말씀을 하셨었죠. 우리가 스스로 면밀히 살펴보지 않으면 내가 회피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회피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좋은 척도 중에 하나가 ‘구체성의 여부’와 그에 따른 ‘행동화의 여부’입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 여기’가 불편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무언가’를 찾게 됩니다. 이것은 누구나 그렇습니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고요. ‘지금 여기’가 불편한 데 계속 머무르려고 하는 게 더 이상한 겁니다. 실험실 생쥐에게도 전기 충격을 주면 다른 철장으로 넘어가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그 ‘다른 무언가’에 대해서 구체화하고 행동하려는 시도가 있다면, 이것은 회피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대안이지요. 회피가 아니라 대안을 추구하는 게 됩니다. 그런데 ‘다른 무언가’에 대한 구체성이 떨어지고 행동하려는 노력이 동반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회피’ 자체가 목적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무엇도 이루어지지 않고, 불편한 ‘지금 여기’서 변화되는 게 하나도 없이 그냥 그렇게 똑같이 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OOO 씨도 현실과 다른 살고 싶은 모습이 있다고 하셨죠? 그런데, 제가 계속 질문을 드려도 그 ‘다른 살고 싶은 모습’이 무엇인지를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회피라고 말씀을 드렸던 겁니다. OOO 씨께서 ‘워킹 홀리데이’도 구체적인 무언가가 없다고 말씀을 하셨었죠? 그건 ‘회피’ 자체가 목적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인생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원하는 게 있다면 구체화하고 행동화하려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나의 바람들’을 구체화시키려는 노력을 해보세요. 구체화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회피입니다. 그런 신호가 느껴지신다면 ‘지금 여기’에서 순응해서 살아갈 방법을 찾으셔야 합니다. 그게 싫으시면 ‘나의 바람들’을 구체화하셔야 하고요. “‘구체화’하기도 싫고 ‘지금 여기’도 싫어요.”라고 하신다면, 그런 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두 마리 토끼는 잡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제가 많이 말씀드렸죠? 할 수 없는 것은 원하지 마라. 그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 토끼를 잡으실지는 OOO 씨께서 결정하셔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 본 글은 이일준 정신과 전문의가 Transmind 마음변화 연구소에서 무료 상담했던 내용을 각색한 글입니다.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