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신재현 강남 푸른 정신과 원장]

 

관계에는 감정이 관여되기 마련입니다. 아니, 감정 에너지가 투입되지 않는 관계는 피상적인 관계일 뿐이죠. 내가 맺고 있는 친구, 부모, 자식, 연인, 부부 등의 관계처럼, 내가 소중히 여기고 깊이 관여되어 있는 관계일수록 내가 가진 감정 에너지를 많이 투여합니다. 그래서 같이 나누는 기쁨은 배가 될 수 있지만, 그만큼 감정적 상처를 더 입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가장 가깝다 여겼던 관계에서, 상대방이 하는 ‘사소할 수 있는’ 말 한마디가 나의 감정에 파도를 일으킨 경험을 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마음에 격랑이 일고 화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데, 상대방이 이를 가벼이 여긴다면 섭섭함과 화는 배가되는 경우가 많지요. 그리고 그런 상대방을 보면서, ‘왠지 내가 혼자서 날뛰는 것 같은’ 부끄러움, 수치심은 분노의 감정 표현을 참 어렵게 만듭니다. 그렇게 내 감정을 안으로 삭이고, 삭이고 또 삭이다 보면 응축된 분노가 어느 순간 일제히 터져 나오는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사진_픽사베이


건강하게 분노를 표현하는 것

내 마음속에서 느끼는 화를 ‘건강하게’ 표현하기란 참 어렵습니다. 내가 맺은 관계 안에는 상대방이 있기 마련이고, 그 상대방에게 화를 ‘잘’ 표현한다는 것이 왠지 어색합니다. 상대방에게 탓을 미루는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 화는 나는데 상대방에게 표현하지 못하는 나에게 느끼는 감정들이 복잡 미묘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특히 상대방의 시선에 영향을 많이 받는 동양권 문화에서는, 화를 비롯한 감정들을 적절하게 밖으로 표출하기보다는 안으로 쌓아두고 삭이며, 겉으로는 짐짓 영향을 받지 않은 척, 평온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미덕으로 여깁니다. 심지어, 죽을 만큼 슬프거나 화가 날 때도, 이를 꽉 깨물고 눈물을 보이지 않는 이에게 오히려 ‘침착하다’ 혹은 ‘과묵하다’라는 칭찬의 말을 하기도 하죠. 이런 성향이 결국 국내에서만 특이적으로 보이는 ‘화병’이라는 병을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말이죠. 

 

건강하게 분노를 다루는 4단계

건강하게 분노를 다루는 4단계를 따라가 보도록 합시다. ‘건강하게’라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합리적으로’ 혹은 ‘적절하게’ 자신의 감정에 대처하는 것입니다. 아래의 단계는 칼로 자르듯이 구분되는 과정은 아니며, 익숙해지면 자연스럽게 단계를 밟게 될 겁니다. 


1. 첫 번째는 <감정을 환기시키기>입니다.

압력밥솥에 김이 가득 차 있는 상태로 그대로 둔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상상도 하기 싫지만, 가열된 압력밥솥이 내부의 압력을 견디다 못해 굉음을 내며 폭발하게 될 겁니다. 그러기 전에 먼저 내부의 압력을 조금씩 줄여주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한 번에 뚜껑을 여는 것도 곤란하겠죠? 자신의 감정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면, 자신의 분노의 압력을 조금씩 줄여나갈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맞는 방법은 개개인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감정을 환기시키는 좋은 방법으로는 1) 주의를 돌리거나  2) 이완시키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경계성 인격장애 환자들의 치료에 사용되는 변증법적 행동치료(DBT)의 기법을 응용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는 것보다는, 변화의 첫걸음을 떼기 위해서 작은 것부터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감정을 환기시킨 이후에는 일단 자리를 피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1) 주의 돌리기 

얼음을 꼭 쥐거나, 손목에 채워 놓았던 밴드를 당겼다가 놓는 행동, 뜨겁거나 차가운 물에 샤워하기 등과 같은 순간적인 감각으로 주의를 돌립니다. 혹은, 친구나 가족에게 전화를 하는 식으로 타인에게 주의를 돌리거나, 밖에 나가 주변 사람들이 하는 말, 행동, 표정 등에 관심을 돌리는 것도 좋습니다. 과거 즐거웠던 장면을 회상하거나 사진을 꺼내 보기, 주변의 자연경관에 주의를 기울이기, 좋아하는 기도문이나 격언을 꺼내 읽기 등도 주의를 환기하는 방법의 하나이지요. 미리 언제든 실행 가능한 즐거운 활동 목록을 만들어 놓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2) 이완하기 

우리의 오감을 이용하여 이완할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음식 냄새, 꽃 냄새 등을 이용하거나(후각), 내가 좋아하고, 마음이 편해지는 그림, 내가 즐거웠던 경험을 담은 사진을 이용하고(시각), 따뜻한 물로 샤워하거나, 애완동물의 보드라운 털을 쓰다듬는 것도 성난 마음을 위로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촉각). 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먹거나, 혀가 아릴 정도로 달콤한 초콜릿을 먹기도 하고(미각), 내가 즐겨 듣는 음악,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고, 혹은 창문을 열고 들리는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청각).

나에게 익숙하고, 나에게 위로와 위안의 의미가 있는 무엇이든 이용할 수 있어요. 다만 감정이 고조된 순간에 사용할 수 있도록 미리 그 목록을 작성해 놓고, 감정이 터져 나올 때 내가 그 목록의 것들을 이용해 자신을 위로하는 장면들을 자주 머릿속으로 그려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찰나의 순간에 그 목록들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두 번째는 <공감하기>입니다.

‘으잉? 안 그래도 열 받는데 공감을 하라고?’라는 말이 나올 법합니다. 하지만 공감하라는 것이 상대방의 말에 무조건 따르거나 복종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리고, 관계를 끝내도 아쉬울 것 없는 상황이 아닌 다음에야, 결국에는 감정을 봉합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 과정을 그냥 대충 풀로 삐뚤빼뚤하게 붙이느냐, 섬세하고 차분하게 수습을 하느냐의 결과는 큰 차이를 보이게 될 것입니다.

감정을 환기시킨 상황이라면, 감정의 압력이 서서히 낮아지면서 방금 있었던 상황에 대한 현실 인식이 조금씩 나타납니다. (“아오... 내가 왜 그랬을까!”) 현 상황에 대한 이성적인 이해의 바탕 위에, 상대방이 그 상황에서 어떠한 감정을 느꼈고,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에 대한 공감을 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감정을 환기시켰고, 현실 인식은 돌아왔지만, 도저히 용서를 못 하겠다는 마음이 든다면, 이 말을 기억해 보세요. “내가 나에게는 가장 소중하기 때문에, 내가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서 바뀌어야 한다”라고요. 100가지 중의 100가지를 다 공감하고 이해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100가지 중 1-2가지 정도에만 공감해도 충분합니다. 나만큼 상대방도 감정이 격앙되어 있었다면, 내가 공감의 말을 넌지시 건네는 순간 상대의 감정의 압력도 서서히 낮아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관계가 변하기 시작하는 것이죠. 결국, 나를 위한 긍정적인 관계 변화의 신호탄이 됩니다.
 

사진_픽사베이


3. 세 번째는 <상황을 깊게 파악하기>입니다.

두 단계를 거치면서 두 사람 사이의 긴박한 긴장 상황은 일단락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음에 같은 상황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내적 성장을 위해 조금 더 깊은 곳을 들여다보도록 합시다. 내가 가졌던 분노가, 단순히 ‘상황에 의한 분노’였을까요? 그 상황에서 상대방의 표정이, 행동이, 말 한마디가 내 마음 깊은 곳의 ‘무엇’을 건드렸던 것은 아닐까요?

스키마(schema)는 내가 나와, 세상과, 미래를 보는 ‘눈’입니다. 스키마는 타고난 유전적 기질의 바탕 위에, 성장 과정의 경험들이 조금씩 살을 붙이면서 완성됩니다. 완성된 스키마는 나의 무의식에서 떠돌아다니며, ‘촉발 자극’이 있을 때마다 나의 감정적, 행동적, 사고적인 패턴을 자동적으로 선택하게 만듭니다. 

이를테면, ‘버림받음’의 스키마를 가진 이는 상대가 나에게서 떠나려고 한다는 느낌이 조금이라도 들면 감정을 폭발시킵니다. ‘감정적 박탈’의 스키마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는 상대의 무관심한 말 한마디에서 폐부 깊은 곳을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끼게 됩니다.

아까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던 상황이, 무의식에 떠돌아다녔던 어떤 상처를 건드린 것은 아닌가요? 그래서 나의 스키마가 자동적으로 작동하여 상황을 왜곡시켜 이해하게 하고, 분노를 폭발시켰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 순간의,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해할 수 없었던 격렬한 감정의 폭발을 조금씩 이해하게 될 때, 조금씩 성장하게 되는 것이죠. 


4. 마지막 단계는 <건강한 감정 표현을 연습하기>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이 부분이 가장 어려울 것 같습니다. 감정을 숨기고, 누르고, 참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워 왔으니까요. 감정을 표현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가장 어려운 것이 ‘수위조절’입니다. 상자 안에서 눌려있던 스프링이 뚜껑을 여는 순간 튀어 오르게 되듯이, 감정 표현이 엇나가거나 과도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튀어 오른 스프링은 언젠가는 제자리를 찾게 되기 마련입니다. 반복적인 연습만이 적절한 수준의 감정 표현을 할 수 있게 합니다.

저는 주로 <비폭력 대화>라는 책의 ‘비폭력 대화법’을 가르쳐드립니다.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대화를 (상황) - (감정) - (욕구) - (부드러운 부탁)의 순으로 배열합니다. "OO 상황에서(상황), 나는 OO(감정)을 느꼈어. 나는 OO가 필요해.(혹은 OO를 받고 싶지 않아 : 욕구)  그러니 OO 해주지 않겠어?(부드러운 부탁)"라는 식의 대화법입니다. 상황의 객관적인 인식의 바탕 위에, 감정과, 더 깊은 곳의 욕구를 표현하는 방법이죠. 비폭력 대화법의 경우에도 대중을 상대로 하는 워크숍이 자주 열리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절대로 한 번에 되는 길은 없습니다. 자신 스스로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 어색하기 마련입니다. 뇌세포들끼리 연결되어 ‘신경전달 트랙’이 형성되어, 행동적인 습관으로 정착되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건강하게 분노를 다루는 4단계를 소개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조금은 떨어져서 차분하게 감정을 바라보고, 대처하려는 ‘방향성’입니다. 내가 겪었던 최근의 격렬한 감정 변화를 돌아보고, 상대와 함께 그 순간의 마음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되겠습니다.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