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전문의 x 힙합 저널리스트 연재 <마음과 힙합> 07

‘킵잇리얼(Keep It Real)!' 

랩 음악을 들을 때, 혹은 래퍼들의 인터뷰를 볼 때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말이다. 무슨 뜻일까. 아마 이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1) 너 자신의 진짜 이야기를 할 것. 2) 거짓말하지 말고 늘 진실할 것.

힙합의 세계에는 다른 음악 장르에는 없는 전통이 있다. 자기 가사는 자기가 직접 써야 한다는 전통이다. 실제로 래퍼들은 자기 가사는 자기가 직접 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기 가사는 자기가 직접 쓰는 것이 옳고, 그래야 떳떳하다는 생각을 한다. 어찌 보면 이상한 일이다. 다른 음악 장르에서는 좀처럼 발견할 수 없는 광경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발라드 가수의 앨범 크레딧을 보면 분업화가 철저히 돼 있다. 작사는 김이나가 하고, 작곡은 김형석이 하고, 노래는 성시경이 부름. 그리고 이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자연스럽다. 때문에 우리는 성시경의 발라드를 들으며 그 노래가 성시경 자신의 실제 이야기일 것이라고는 기본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우연히 혹은 때때로 가사가 가수의 실제 경험과 겹칠 수는 있다. 하지만 김이나가 그럴듯하게 꾸며낸 노랫말을 성시경이 부른다고 해서 그걸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다. 발라드의 세계에서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진_픽셀


그러나 힙합의 세계는 다르다. 힙합의 세계에서는 래퍼가 자신의 가사를 직접 쓰지 않으면 ‘가짜’로 취급받는다. 그것은 자기의 진짜 이야기가 아니라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닥터드레(Dr. Dre)는 힙합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프로듀서 중 한 명이다. 하지만 그는 커리어 내내 비판받기도 했다. 랩을 할 때 가사를 늘 다른 래퍼가 써주었기 때문이다. 에이콘(Akon) 역시 힙합/알앤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보컬리스트다. 그런데 그는 한 사건으로 인해 커리어에 치명상을 입은 적이 있다. 노래에서 내내 내세우던 자신의 수감 경력이 대부분 허위나 과장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즉, 둘 다 힙합의 전통인 킵잇리얼에 위배됐기 때문이다. 이상하면서도 흥미롭고 유치한 것 같으면서도 매력 있다.

자기의 가사는 자기가 직접 써야 하는 힙합의 전통은 우리가 랩 음악을 ‘자서전’처럼 느끼는 중요한 이유다. 또 힙합을 가리켜 가장 ‘자기 고백적’인 음악이라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듯 래퍼들은 음악을 통해 종종 자신의 실제 삶을 털어놓기 때문에 우리는 래퍼의 이름을 네이버에서 검색할 필요가 없다. 만약 당신이 아이유라는 인물에 대해 알고 싶다면 네이버에서 아이유를 검색해야 한다. 그러나 에미넴(Eminem)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고 싶다면 그냥 에미넴의 음악을 들으면 된다. 그 안에 에미넴의 실제 삶이 전부 담겨있기 때문이다.

약물중독으로 몇 년 간 활동을 중단했던 에미넴이 컴백 후 부른 노래는 ‘Not Afraid’였다. 그는 내한 공연 때 이 노래를 부르기 전에 이렇게 이야기했다. “난 약물 때문에 삶의 밑바닥으로 추락했었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아. 만약 이 노래를 듣는 네가 지금 삶의 밑바닥에 있다면 나도 이렇게 해냈다는 걸 말해주고 싶어.” 랩을 통해 흘러나오는 래퍼 본인의 자서전을 듣고 있자면 마치 그 래퍼와 내가 아는 사이라도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아마 사람들은 힙합을 들으며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 음악은 뭔가 다르다고. 이건 뭔가 ‘진짜’ 같다고.
 

사진_위키미디어공용


힙합의 킵잇리얼은 힙합을 듣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늘 진실하게 말하고 행동할 것. 내 입으로 뱉은 말은 꼭 책임질 것. 무엇보다, 기성의 잣대로 보면 자랑스럽거나 아름답게 비치지 않는 부분도 솔직하게 털어놓는 래퍼들의 모습은 큰 감동을 안겨주었다. 많은 사람이 타인에게 자랑스럽거나 아름답게 비치지 않는 모습을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할 때, 래퍼들은 달랐다. 래퍼들은 솔직하게 다 뱉어냈다. 아니, 힙합이 다 뱉어내게 했다. 창피하거나 감추고 싶은 것마저도. 킵잇리얼.

'진실함'을 근간으로 인간 감정의 다채로움과 이면, 어두운 부분까지 어떤 음악보다 풍부하게 담아내 온 힙합의 중심에는 바로 킵잇리얼이라는 전통이 있다. 나는 이것이 사람들의 정신건강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아, 잘못 말했다. 이미 그 광경을 목격하는 중이다.

 

PS. 다음은 힙합의 킵잇리얼에 관해 래퍼 빈지노와 내가 나눈 대화다. 참조를 위해 덧붙인다.

김봉현: 그럼 래퍼는 자기 가사는 자기가 써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빈지노: 자기가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자기가 가사를 쓸 때 그 공간에 같이 있는 사람이 같이 써도 된다고 생각해요. 물론 주체는 자기가 되어야겠지만. 남이 써준 가사로 랩을 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김봉현: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보다는 재미의 문제인가요?

빈지노: 그렇게 물으신다면 뭔가 꼰대 같지만 저는 래퍼가 자기 가사를 직접 안 쓰면 틀린 거라고 말하고 싶어요. 사실 노래하는 사람들은 작사가가 따로 있잖아요. 그런데 그건 논리가 맞는 것 같은데...

김봉현: 제가 바로 그 말을 하려고 했어요. 예를 들어 발라드 쪽에서는 분업화가 자연스럽게 되어 있잖아요. 윤종신의 노래인데 김이나가 작사를 하고, 성시경의 노래인데 윤종신이 작사를 하고. 이런 시스템에 대해 아무도 문제제기를 안 하죠. 그런데 래퍼는 남이 써준 가사로 랩을 하면 되게 문제가 되는 전통(?)이 있잖아요.

빈지노: 래퍼는 랩만 잘해서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의 시선이 결국에는 사람 자체로 가거든요. 이 가사가 정말 이 사람의 생각이 맞는지 본단 말이에요. 만약 가사가 너무 멋있는 래퍼가 있는데 이 사람의 생각으로 알고 있었던 가사가 사실은 다른 사람이 써준 가사였다면 혼란스러워지는 거죠. 두 개가 일치하는 멋이 힙합에서는 되게 중요하기 때문에.

김봉현: 그렇다면 래퍼로서의 빈지노와 자연인으로서의 빈지노는 얼마나 비슷한가요?

빈지노: 글쎄요. 특별히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거의 일치한다고 생각해요.

 

* 김봉현

작가, 힙합 저널리스트. 현재 <에스콰이어> <씨네21>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등에 글을 쓰고 있다. <서울힙합영화제>를 CGV와 개최했으며 랩 다큐멘터리 <리스펙트>를 기획하고 개봉했다. 레진코믹스에서는 힙합 웹툰 <블랙아웃>을 연재했다. 지은 책으로는 《한국 힙합 에볼루션》 《힙합: 블랙은 어떻게 세계를 점령했는가》 《힙합, 우리 시대의 클래식》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힙합의 시학》 《The Rap 더 랩: 힙합의 시대》 등이 있다. 김경주 시인, 래퍼 엠씨메타와 시와 랩을 잇는 프로젝트팀 <포에틱 저스티스>로 활동하고 있으며 셋이 《일인시위》 단행본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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