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실제 상담 내용을 재가공하여 구성한 내용입니다. 내담자의 동의를 얻어 작성되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실제 상담과 비교해 설명을 많이 덧붙였습니다. 실제 상담의 흐름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점 미리 밝힙니다.)

 

이번 연재는 고등학교 여학생과의 상담 내용입니다. 이 고등학생은 공부를 하는 게 힘이 들어서 저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고등학생이 공부가 힘든 게 당연한 게 아닌가 싶지만, 그 안에는 학생 각자마다의 삶의 내용이 묻어나 있으며, 그 무게를 덜어낸다면 공부라는 짐이 한결 가벼워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공부 자체의 무게만 해도 벅찰 텐데, 공부라는 행위를 할 때 다른 커다란 짐이 짊어져 있다면 어린 학생이 감당하기에 쉽지 않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 학생에게는 어떠한 짐이 짊어져 있었을까요?
 

사진_픽셀


내담자: 안녕하세요. 선생님. 공부하는 게 쉽지 않아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드렸습니다. 저는 수학교육과를 진학하고 싶은 꿈이 있는 학생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른 공부보다 수학 공부만 하려고 하면 부담이 너무 많이 돼요. 잘하고 싶은 생각 때문일까요? 책장에 꽂혀 있는 수학책을 꺼내려고만 해도 가슴에 돌뎅이가 있는 것 같이 무거운 마음이 들어요. 제가 수학을 그다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부담이 되는지를 모르겠어요. 수학교육과를 가고 싶은데, 수학 공부가 제일 부담스러우니 이것도 웃긴 거 같아요. 

상담자: 수학교육과를 가고 싶었던 계기가 있나요?

내담자: 음... 원래 수학을 잘하기도 했고요. 또 친오빠가 지금 소위 명문대 수학교육과에 다니고 있는 중이에요. 저희 집안이 원래 수학이나 물리 등 이과 계열 학문에 관심이 많은 거 같아요. 친척 오빠랑 언니들도 거의 이과 쪽 전공을 하고 있거든요. 주변에 영향도 받았던 거 같고, 그러다 보니 수학 잘하는 사람이 멋있어 보이기도 하더라고요. 저희 오빠는 수학 경시대회에서 상도 받았었거든요. 

상담자: 수학 이야기를 하면서, 오빠 이야기가 많네요. 오빠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해주실 수 있으세요?

내담자: 저희 오빠는 공부를 무척 잘했어요. 반에서 1등은 물론, 전교에서 1등을 한 적도 있어요. 주변 어른들한테 칭찬도 많이 받는 모범생이었어요. 그런데 저한테는 그렇게 좋은 오빠는 아니었던 거 같아요. 싸우기도 많이 싸웠었거든요. 그런데 꼭 오빠랑 싸우고 나면 저희 엄마는 저한테 뭐라고 했던 거 같아요. 동생이 그렇게 오빠한테 달려들면은 안 된다고요. 억울했던 기억이 많아요. 그래서 저는 오빠를 별로 안 좋아해요. 지금도 별로 안 친해요. 그러고 보면 엄마는 항상 오빠 편만 들었던 거 같아요.

사실 엄마한테는 오빠밖에 없어요. 오빠가 공부를 잘하니까... 그런데 저도 못 하는 건 아니거든요. 오빠만큼은 아니지만 며칠 전에는 제가 학교 끝나고 집에 왔는데 엄마가 거실에 누워 있더라고요. 누워서 인사하길래 저도 인사하고 방에 들어가서 정리를 하고 나왔어요. 그런데 그때 오빠가 집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런데 엄마가 갑자기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현관으로 가서 ‘아들, 왔냐.’라고 하더라고요. 속으로는 속상하더라고요. 차별 대우하는 거 같고. 치사해서 말은 못 했는데, 기분이 좋지는 않았어요. 늘 그랬어요. 우리 엄마한테는 오빠밖에 없어요. 생각해보니까 서럽네요.

 

이후 학생은 엄마와 오빠와 관련된 일을 눈물과 함께 30분간 쏟아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속에 그런 차별 대우가 그렇게나 상처로 자리 잡았는지 새삼 놀랐다고 표현했습니다. 이렇게까지 울 줄은 몰랐다고요. 우리의 마음은 나 스스로가 잘 살펴봐주지 않으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꽁꽁 얼어있습니다. 생각나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결된 줄로만 알지만, 그 마음은 스멀스멀 올라와서 이상한 방식으로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래서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 학생에게는 어떻게 이상한 방식으로 영향을 주었냐고요? 상담 중에 학생이 엄마에게 꾸지람을 들었던 일들을 회상하였습니다. 오빠랑 비교를 많이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학생의 마음 안에는 엄마의 그 말, ‘논리적으로 똑바로 말 못 해?’라는 그 말이 가슴에 깊이 남아있다고 했습니다. 자신은 혼나는 상황에서는 머리가 하얘져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답답하다는 듯이 더 다그쳤고, 오빠와 비교를 하는 일이 잦았다고 했습니다. 연상을 이어가다가 학생은 ‘수학은 제게 한이에요.’라며 주먹을 책상으로 쾅 치는 행동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깜짝 놀라더군요. 처음 보는 선생님 앞에서 자신이 이럴 줄 몰랐다고요. 지금까지 이렇게 명징하게 인식을 하지는 못했었는데 ‘수학은 자신에게 한과 같은 거’라며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내담자: 어렸을 때는 제가 논리적이지도 못하고 공부도 못해서 엄마에게 예쁨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을 했었던 거 같아요. 오빠가 엄마한테 그렇게 예쁨을 받는 건 공부도 잘하고, 특히 수학을 잘해서 그런 거라는 생각이 있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수학에 집착을 하나 봐요. 오빠랑 똑같이 수학교육과를 가겠다고 생각을 하는 것만 봐도 제게는 수학이 남다른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도 깜짝 놀랐어요. 선생님 앞에서 책상을 그렇게 칠 줄은. 제가 원래 감정 표현도 잘 못 하고 내성적인 편인데, 너무 죄송했어요. 그런데 그 덕분에 조금은 알게 된 거 같아요. 수학이 제게는 ‘한’이라는 거. 엄마에게 예쁨을 받지 못했다는 거. 엄마의 사랑을 오빠에게 다 뺏겼다는 거. 그 모든 의미가 ‘수학’에 들어있었던 거 같아요. 제가 ‘수학 책’을 책장에서 꺼내는 것조차 왜 그렇게 힘이 들었는지 조금은 알 거 같네요. 제게는 수학이 그냥 수학이 아니었던 거 같아요. 엄마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중요한 수단 같은 거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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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담자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준다는 생각을 합니다. 글 서두에, 학생이면 누구나 하는 공부라는 행위조차도 각 학생에게는 남다른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는 말씀을 드렸었는데요. 이 학생의 경우에는 수학 공부가 ‘어머니의 사랑’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어머니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고, 학생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 채, 그냥 그렇게 되어왔던 것이지요.

학생들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르겠지만, 공부라는 행위 안에 다른 짐들이 얹혀 있어서, 공부를 방해하는 요소들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내용과 정도가 다를 뿐이지요. 그리고 많은 학생들에게 공부라는 행위는 부모님의 사랑, 관심과 연결이 되지 않으래야 않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런 부분들을 찾아서 다루어준다면, 공부라는 행위를 하는 데 있어 한결 편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늘 그렇듯 1의 자극은 1로 느끼고, 10의 자극은 10으로 느껴야 하는데, 많은 학생들이 공부라는 5의 자극에 다른 짐들이 얹혀서 10이 되고 20이 되고 그렇게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학생들은 10, 20을 어떻게든 해보려고 아등바등하면서 살구요. 어떤 학생들은 그 짐이 너무 무거운 나머지 회피하면서 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 삶은 전자였던 거 같네요. 혹자는 그럴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적도 좋고 정신과 의사를 하게 되지 않았냐고요.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최고의 성과를 내는 건 적당한 자극이 있을 때입니다. 자극이 적거나 너무 많으면 둘 다 능력을 저해하는 요소가 됩니다. 그렇게 저도 성적이 하강되는 경험을 했었습니다. 감당하기 힘들더라고요.

어렸을 때 저를 만난다면, 공부에 얹힌 짐에 대해 다루는 법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저는 이제야 그 짐을 깨달았거든요. ‘좀 더 빨랐다면 좋았을 텐데.’라는 후회가 들기도 합니다. 인생 후배인 우리 학생들은 좀 더 빨리 깨달아, 그 짐들을 덜어내고, 공부는 공부로써, 예술은 예술로써(예술을 준비하는 학생이라면), 체육은 체육으로써(운동을 준비하는 학생이라면), 그 짐을 온전히 있는 그대로 짊어지고 살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 덧붙여 얹혀 있는 그 짐들은 훌훌 털어내고요.

‘나조차도 알지 못했던 진짜 내 이야기’는 조금이라도 더 빨리 알수록 남은 인생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감정이입이 되는 거 보니, 제 학창 시절도 꽤나 힘들었나 봅니다. 이 세상 모든 학생들에게 응원과 격려를 보내고 싶습니다. 공부(or 예술, 체육)를 더 열심히 하라는 응원과 격려가 아니라, 내가 많은 에너지를 들이고 있는 그 행위 안에 어떤 의미들이 있는지를 발견하고 찾아가는 그 응원과 격려를 드리고 싶네요. 멀리서나마 계속 응원하고 있겠습니다.

 

※ 본 글은 이일준 정신과 전문의가 Transmind 마음변화 연구소에서 무료 상담했던 내용을 각색한 글입니다.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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