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려원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아직 엄마의 뱃속에 있을 무렵, 아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습니다. 필요한 영양분과 적당한 온도, 편안한 환경이 저절로 제공되었거든요. 그저 가만히 있어도 모든 것이 해결되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태어나고 나면 아기의 처지는 사뭇 달라집니다. 엄마와 연결해 주던 탯줄이 일단 끊기고 나면, 아기의 내적 욕구, 즉 공복의 불쾌감과 같은 각종 신체적 욕구는 더 이상 저절로 충족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아기는 생애 처음으로 불쾌한 느낌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아동 발달을 연구했던 헝가리 출신 의사 말러(Margaret S. Mahler)는 아기의 첫 한 달을 <정상적 자폐단계>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이 시기의 아기는 주로 자신 안에서 올라오는 배고픔과 같은 긴장에 반응하여 잠을 깨고 울음을 터뜨리는 듯 보입니다. 아기의 관심사는 아직 외부의 세상이 아니라 내부의 생리적 욕구에 있는 듯합니다. 도널드 위니컷이 최초의 관계를 ‘자비 이전의 관계’라고 표현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 입니다. 자비라는 개념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우선 외부 대상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야 하거든요.

이제 아기의 욕구에 적절히 반응하고 불쾌감을 해결해 주는 역할은 고스란히 부모의 몫입니다. 배고픔에 울면 젖을 주고, 기저귀가 축축하면 갈아줍니다. 이런 일은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됩니다. 그리하여 아기는 점차 깨달아 갑니다. 자신이 배가 고플 때 엄마, 아빠가 어떤 행동을 할지 희미한 믿음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이죠.

젖을 빠는 동안 강렬한 허기짐이 조금 누그러지면, 아기는 드디어 세상을 탐색할 여유가 생깁니다. 자신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사람의 윤곽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기분 좋은 포만감 (내적 감각)과 자신을 편안하게 만들어 준 사람(외적 대상) 사이에 연결고리가 생겨날 것입니다. 이러한 연결고리는 비단 포만감뿐만이 아니라 갖가지 방식으로 내적 안도감을 주는 대상과 상호작용하며 만들어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번 머릿속에 각인된 관계의 틀은 평생토록 마음 안에 남아, 앞으로 성장해나가며 만나게 될 다른 사랑하는 이들과 교류할 때도 쓰이는 일종의 원형으로 작용하겠지요.

이 시기를 지나는 부모님들은 힘들어도 묵묵히 견디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아기에게 타인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는 위대한 과정 중에 있으니까요. 이 시기를 견디고 나면 아기는 곧 조그마한 기적을 선사할 것입니다.

 

려원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대구 원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과 졸업
서울대학교병원 인턴 수료
국립서울병원 (현 국립정신건강센터) 전공의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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