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대한정신건강의학과 봉직의협회 신예니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그림_haerin

“아이고, 의사 (자칭 ‘세계대통령’인 그녀는 주치의를 이렇게 부른다) 왔나~! 의사야, 왜 아직 안 가고 있노!”

"종일 뭐하다 이제야 뵙네요. 오늘도 잘 지내셨어요?"

“아이고, 내야 잘 있지! 종~일 회의하느라 바쁘다. 세계대통령이 오죽 바쁘나~! 인자 고마 가그라. 날도 찬데 우얄라꼬. 힘들어 우야꼬! 신랑 밥도 해미개야지~!”

 

하루 대부분을 한 손으로는 ‘착한 사람 눈에만 보이는’ (그래서인지 도무지 보이지 않는) 폰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 기밀정보가 새 나가기라도 할까 봐 입술을 움켜쥐듯 가리고서, 속국 격인 ‘각국 대통령’이라는 이들과 마치 겨울 가지 사이 앙상하게 불어오는 바람소리 마냥 쉭쉭쉭쉭~ 통화를 하는 ‘세계대통령’.

어렴풋한 기억 속 겨울 이맘때, 망상의 세계에서 ‘범죄조직의 명단 작성’에 여념이 없던 그녀가 일순간 투명 수화기의 존재는 잊고 필자를 보듬듯 쓰다듬으며 위로해준다. 간혹 불편한 심기를 심한 욕설과 호통으로 표출하다가도, 주치 ‘의사’에게는 다시금 정감 있고 따뜻한 아낙네로 돌아온다. 대개는 ‘나랏일과는 비교도 안 되는 전 세계 대소사’를 치르느라 바쁘나 걸음은 의외로 유유자적하다.

‘청색’ 문양 돋보이는 하얀 환의에 ‘빨간 마후라’ 걸친 그녀는 오늘 이 병동의 패셔니스타(fashionista)이다.

 

◆ 보색: 반대색? 보완색!

청색과 적색, 이 색의 관계(색상에도 ‘관계’를 부여하는 명명법이 흥미롭다)를 일컬어 보색(補色)이라 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다른 색상의 두 빛깔이 섞여 하양이나 검정이 될 때, 이 두 빛깔을 서로 이르는 말”로, 『색채용어사전』에서는 빛의 색감을 더해 “임의의 두 가지 색광을 일정 비율로 혼색하여 백색광이 되는 경우”로도 보색을 정의한다.

보색은 색상환에서 서로 마주 보게 배치되어 ‘반대색’의 이미지가 강하나, 실제는 한자(補)나 영어 표기(complementary color)에서 보듯 ‘상호보완’, ‘보충’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망막에는 색을 인식하는 원추세포가 있는데, 그중 일부는 청색에는 활성화, 보색인 적색에는 억제가 되고, 다른 일부는 적색에 활성화, 청색에 억제가 된다. 활성화된 세포는 해당 색상에 피로해져 평형을 위해 그 색의 보색에 대한 감수성을 높인다. 따라서 보색대비는 원색상보다 더 선명하고 뚜렷한 인상을 주고, 빨강을 응시하다 눈을 감으면 초록의 잔상이 남는 잔상효과도 일으킨다. 그렇기에 보색은 생동감과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그 차이에서 비롯되는 힘이 있다.

색상의 관계인 보색 대비를 인간의 관계에 적용해본다면 어떠할까. 참 다른 두 색상, 색상환에서 가장 멀리 그리고 반대되는 위치에 놓여있지만 서로를 통해 서로를 더욱 선명하고 돋보이게 하는 그런 관계. 다양한 환경에서 수많은 ‘갑과 을’, 수많은 ‘나와 너’로 살아가는 우리네 관계에도 적용해볼 수 있지 않을까.

 

◆ 휴브리스 신드롬과 휴브리스

실제 ‘세계대통령’이라는 직책이 존재한다면 그만한 온기를 지닐 수 있을까. 탁월한 실력과 도덕성을 겸비한 공감의 능력자로 서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권력자들의 오만은 예로부터 있어 왔다. 그러나 그것을 정신과 질환으로 진단, 해석, 이해하려는 시도가 2009년에 처음 이루어진다. 신경정신과 의사이자 영국의 외무부 장관을 지낸 데이비드 오웬과 듀크 대학교 정신과 교수 조나단 데이비슨은 1908년부터 2009년까지의 영미 정치 지도자들을 연구하여 “휴브리스 신드롬: 후천적 성격 장애?”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다.

오웬은 성공 가도를 걷는 권력자가 성급한 언동, 타인의 조언 무시, 충동성·무모함·부주의함이 두드러지는 무능함을 드러낸다고 보고, ‘특정 기간 동안 상당히 성공적으로, 큰 견제 없이 권력을 행사한 지도자에게 생길 수 있는 장애’로 휴브리스 신드롬을 정의한다.

『정신장애의 진단 및 통계편람(DSM-5)』에서는 채택되지 않았으나, 『DSM-IV』의 제안 진단으로 소개되는 휴브리스 신드롬은 권력자가 지양해야 할 직업병이자 ‘리더십 성격 장애’로 일반인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진_픽셀


휴브리스(hubris, ὕβρις)는 고대 그리스어로 ‘오만, 자기과신’을 뜻하며,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신들을 넘보는 자만이나 반항, 그로 인해 결국 천벌을 면치 못하는 오만’을 의미했다.

『그리스 신화』에서 이카루스는 밀랍 날개를 달고, 아버지의 경고를 잊은 채 마치 멈추지 않는 중독회로가 악순환되듯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한다. 그는 신의 경지에 도전하듯 더 멀리 더 높이 태양을 향해 날아오른 결과, 밀랍 날개가 녹아 추락하고 만다. 이에 ‘이카루스의 날개’는 종국에는 파멸하고 마는 권력자들의 권위와 능력으로 대유(代喩)되기도 하였다.

이후 문학 작품에서 휴브리스는 경고와 법체계를 무시한 등장인물이 파멸과 죽음으로 귀결되는, 비극의 원인이 되는 개념과 장치로 사용된다.

19세기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문명비평가였던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역사해석학 용어로 휴브리스를 사용한다. 그는 문명을 이끄는 소수의 지배자들, 이름하여 ‘창조적 소수’에 의해 역사가 바뀌어가지만, 일단 성공한 후에는 그 능력이나 방법을 과신하여 ‘우상화의 오류’를 범하고 일을 그르치기 쉽다고 보았다.

32년간 정계에 있었던 오웬은 ‘권력중독’으로 일컬었던 그 성격 문제를 이러한 맥락에서 휴브리스 신드롬이라 칭했고, 최근에는 성격장애보다는 성격특성으로 이해하고 있다.

 

◆ 휴브리스 신드롬 진단 기준

이러한 배경에서 오웬과 데이비슨은 『DSM-IV』의 B군 성격장애(Cluster B Personality Disorders) 질환들, 즉 자기애성 성격장애 8개 항목, 반사회성 성격장애 2개 항목, 연극성 성격장애 1개 항목, 그리고 휴브리스 고유의 진단 기준 5 항목을 조합하여 총 14개 진단 기준 중 3가지 항목 이상을 충족하는 경우 휴브리스 신드롬으로 진단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 진단은 정신과 질환이나 뇌 손상의 기왕력이 없는 사람에게 진단 가능했다.

휴브리스와 휴브리스 신드롬에 대한 논의는 다분히 정치, 경제, 군사 집단의 소위 성공한 권력자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사실 교육, 사회, 문화, 종교 분야에서도, 나아가 개개인의 다양한 정체성과 역할, 그리고 소시민적 삶의 다양한 관계들에서도 엿보인다.

미숙한 권력자와 리더는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려는 경향이 줄고, 자신의 경험과 판단에 더욱 치우친다. 더욱이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인지적 유연성(cognitive flexibility)’이 떨어져 사고가 경직되고 고집스러워지는데, 이 삼박자가 맞아떨어져 거울신경세포의 거울 역할이 희미해지다 보니 공감과는 더 멀어진다.

이 시대를 살아가며 다시금 휴브리스를 논하는 것은,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아픔과 분노의 이야기들, 대중매체의 스포트라이트, ‘갑질’ 논란과 속된 말로 ‘지랄’스러운 풍경들을 힐난하기 위함이 아니다. 다만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또 하나의 틀을 제시하고, 나 자신이 어느 자리에서는 오만한 권력자로 변모하고 있지 않나 잠시 되돌아보기 위함이다.

 

◆ 권력자의 뇌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권력자들의 입장에서는 다소간에 변호가 될 만한 연구가 있다. ‘권력자의 뇌’를 연구한 버클리 대학 심리학과의 다처 켈트너 박사는 20년간의 추적 연구로, 연구 대상에게 권력을 부여할 경우 그들이 마치 ‘외상성 뇌손상’을 입은 사람처럼 충동적이고, 위험 감지력이나 타인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진다고 밝혔다.

뇌의 거울뉴런 즉 거울신경세포 시스템은 우리가 보고 듣는 지각을 시작으로 흉내내기(mimicking), 반사, 반영하기(mirroring) 작업을 활성화하여 감정과 정서, 그리고 경험 공유를 가능하게 한다. 이로써 우리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사건이나 사물을 인지, 공감하게 된다.

신경과학자인 석빈더 옵하이 박사에 따르면, 권력자의 뇌에서는 이 반영 과정이 손상되어, 타인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감퇴된다고 한다.

물론 모든 권력자나 리더에게 해당되는 변화는 아니나, 우리 각자가 어느 ‘갑’의 위치에 서게 될 때, 휴브리스를 범하지 않기 위한 예방적 차원으로 이 위험성을 인지할 필요가 있겠다.

 

◆ 인지적 유연성의 감소

굳이 권력자나 성공한 ‘창조적 소수’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일반 노화(aging) 과정에서 인지적 유연성이 감소한다. 이것은 지위나 요구 사항에 맞게 사고와 주의를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상자의 밖에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 낯선 상황을 헤쳐 나가는 능력”인 셈이다.

인지적 유연성과 관련된 뇌 부위가 곧 공감에 작용하는 부위이다. 뇌가 노화로 위축되면 물리적, 기능적 변화를 겪고 용량도 감소하여 사고의 유연성뿐만 아니라 공감도 약화된다. 각 상황에 대응할만한 역량이 부족한데, 그 역량을 키우려 하기보다는 과거의 익숙한 방식이나 과정을 답습하여 실수하거나 실패하기 쉽고, 따라서 변화를 더욱 두려워하게 되는 악순환을 겪는다.
 

사진_픽사베이


◆ 휴브리스 신드롬, 예방 가능한가

휴브리스 신드롬은 권력이 사라짐과 동시에 그 증상도 약화되거나 사라지기도 한다. 그러나 겸손하고, 비판을 경청하고, 유머감각이 뛰어나다거나, 비꼬는 말도 어느 정도 감당해내는 사람에게는 발생률이 낮다고 알려져 있다.

만일 리더의 측근자가 유력한 조언자이자 충심 어린 멘토여서 겸손과 공감이 퇴색되지 않도록 조력한다면 이 또한 보호막이 된다. (그러나 오만한 리더는 대개 아첨꾼의 언어와 반응, 태도에 익숙해져 타인의 충언과 멘토링을 싫어하고, 공감 자체를 하지 못하게 되니 아쉽다.) 휴브리스 신드롬을 고안한 오웬은 ‘과거 자신의 자만심을 깨부순 사건 떠올리기, 일반인을 다룬 다큐멘터리 시청, 직원들이 보낸 편지 꾸준히 읽기’와 같은 현실감 유지 방법을 제안한다.

 

오웬은 2011년 다이달로스 트러스트(Daedalus Trust)라는 자선단체를 설립해 휴브리스와 휴브리스 신드롬을 널리 알리고 예방하고자 노력해왔다.

다이달로스는 전술한 이카루스의 아버지이자 ‘이카루스의 날개’를 만든 장본인으로, 손재주가 좋아 세인들의 존경을 받는 천재적 건축가였다. 그러나 자신보다 훌륭한 사람이 있으면 질투심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속 좁은 성격 탓에 아테나의 벌을 받는다.

오웬은 이같이 성격적 결함이 있는 다이달로스도 아들에게 ‘용감하게 날아오르되, 태양으로 날개가 녹을 수 있으니 너무 높이 날지는 말거라’는 조언을 할 줄 알았고, 조언을 무시한 아들의 이야기에서 터무니없는 자신감과 권력 남용의 결과가 어떠한지를 알리고 예방하고자 하여 다이달로스 트러스트라는 명칭을 내세운 듯하다.

 

◆ 자기복잡성(self-complexity)의 실천: 내 안의 보색과 관계의 보색 파악

우리 모두는 다양한 정체성과 역할로 살아간다. 누군가의 배우자로, 부모로, 자녀로, 손주로, 선후배로, 동료로, 손님으로, 친구로 다양한 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여러 모습들을 나타내고, 인지하고, 비로소 자기 자신을 개념화하는 방법을 배운다.

자기-측면들이라 이름하는 이러한 과정에서 개개인이 자신의 모습을 다양하고 분별력 있게 인식하고, 이로써 인지적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다면 휴브리스도 극복 가능하지 않을까.

 

휴브리스는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가 굳이 대통령, 기업의 총수, 기관의 장이 아니더라도 둘 이상의 관계에서 사회경제적 지위고하에 따라, 경험의 시간 그리고 능력의 차이에 따라, 권력자 혹은 리더의 자리, ‘갑’의 자리에 처하게 되는 때가 있다. 한 사람이 ‘갑’이자 동시에 ‘을’이다. 자기복잡성을 가진 인간이기에 그렇다.

사고가 경직되어 자신의 직책이나 권력, 군기를 가정에서도 일관되게 발휘한다면, 가정이라는 공동체에서 맛보지 못하고 놓쳐버리는 것이 너무나 많을 것이다. 애석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의 정체성과 역할, 그중 어느 것 하나라도 공감의 빛을 잃고, 어느 자리에선가 권력자의 오만을 발산하고 있다면, 이제 공감의 거울을 닦고 다시 서로를 비추어야 할 때이다. 자신의 역할을 문맥과 상황에 맞게 발휘해 나갈 필요가 있다.

과거 MBC 뉴스데스크 앵커였던 조정민 목사는 『사람이 선물이다』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와 다른 관점은... 이 세상에서 내가 외눈박이로 살지 않도록 하는 선물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두 눈 멀쩡한 사람들이 오히려 추상적 의미의 외눈박이로 살아가는 경우를 왕왕 본다.

둥근 눈동자, 둥근 안구가 네모지거나 세모였다면 어땠을까. 그에 따라 또, 완벽한 조물주의 뭔가 다른 맞춤 설계가 있었겠지만, ‘마음의 창’이라는 둥근 눈동자로 세상을 둥글게 보며 공감하라는 은연의 메시지는 아니었을지.
 


바야흐로 공감을 점검하고 실천해보기 좋은 계절이다. 수많은 색상환에 채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나와 타인의 색깔, 그 차이와 ‘다름’을 어색한 ‘틀림’이 아닌 똘레랑스의 유연한 받아들임으로 실천해보면 어떨까.

크리스마스를 즈음해 곳곳에 적색과 녹색의 어우러짐이 한창이다. 보색의 대비로 한껏 치장한 포인세티아와 각종 크리스마스 용품들에서 휴브리스의 면역법을 엿본다.

이 조화로운 계절에 우리 각자는 어떤 색상으로 어느 자리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 파스텔의 고요한 어우러짐으로 타인과 공존하든 강렬한 보색의 대비로 서로를 돋보이게 하든, 휴브리스를 극복하고 공감이라는 따스한 온기를 전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 참고 문헌

1) Eagleman, DM(2001). "Visual illusions and neuroiology." Nat Rev Neurosci 2(12):920-6.
2) Owen, D and Davidson, J(2009). "Hubris syndrome: an acquired personality disorder? A study of US presidents and UK prime ministers over the last 100 years', Brain 132: 1396-1406.
3) 토인비, 아놀드 조셉 저, 김규태, 조종상 역(2012). 『역사의 연구』, 서울: 더스타일.
4) Keltner, Dacher(2016). The Power Paradox: How we gain power and lose influence. NY: Penguin Books.
5) Owen, David (2008b). "Hubris syndrome." Clin Med 8(4): 428-32.
6) 김완일(2008). “자기복잡성과 인지적 유연성이 심리적 적응에 미치는 영향.” 한국심리학회지: 상담 및 심리치료 20:3: 715-734.
7) Owen, David. "Dedicated to exploring hubris." Daedalus Trust, 2011-2017.
http://www.daedalustrust.com/
8) 조정민(2011). 『사람이 선물이다』, 서울: 두란노.

 

* 대한정신건강의학과 봉직의협회는 정신건강의학과 봉직의들로 구성된 비영리단체로, 일선 정신건강의학과 진료현장의 불합리한 제도를 개선하고 정신건강의학과 봉직의들의 권익과 처우를 증진시키며 이를 통해 환자의 치료받을 권리 보호와 정신 건강 향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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