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저는 외국에서 10년 가까이 지내고 있는 30대 후반 여성입니다. 너무 힘들고 죽고 싶은 생각도 들어서 글 올립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의 극심한 폭력과 진로에 대한 압박, 기타 이유로, 30대 초반부터 뒤늦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고 있고요. 오랫동안 너무 참고만 지내서 심리치료를 간헐적으로 시작한 지 몇 년 됐지만 제대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달까요.

몇 년 전부터는 이런 모습에 거부감을 느낀 오래 사귄 남자 친구와도 헤어져, 외국에서 가족도 가까운 친구도 없이 혼자 지내는 시간이 무섭도록 많아지고 있습니다. 직장은 있지만 상사의 가족과 마찰이 심해 인종차별 등으로 스트레스 많고요. 크게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으면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도 활성화돼서 응급실에 가는 일도 일 년에 한두 번씩 꼭 생겨요.

최근에는 계속 힘이 빠져서 우울증에 걸린 것 같고요. 정신과 상담을 받으면 정신병원에 몇 주 입원하라고 권유하지만 솔직히 일을 쉬면서 그렇게 하기는 비현실적이고요. 가격이 비싸지만 심리치료만 가끔씩 받고 있습니다.

 

문제는, 한국에 돌아가서 친구들도 만나고 그냥 제가 하고 싶은 직업으로 욕심부리지 않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데, 저를 제외한 가족 구성원들의 성향이 너무나 공감능력이 부족하고 비이성적으로 저의 삶에 공격적으로 잔소리하고 간섭한다고 할까요. 특히 어머니와 동생은 없이 살아서 돈에 환장하고 허영심이 가득한 인간 유형이에요. 피가 섞였어도 너무나 다르죠. 한국에 돌아가고 싶어도, 귀국해서 남부럽지 않은 일자리를 구하지 않으면 마치 인간실격인 것 같이 항상 말하고 압박해요. 전 능력 있고 가족에게 손 벌릴 것도 아닌데, 이름 있고 권위 있는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요. 전 외국에서 지금 너무나 지쳐있고 매일 무언가를 하는 것조차 부담인데 말이죠.

저를 위해서 현실적으로 말한다 하지만, 나의 가족은 내가 가장 힘들 때마다 항상 더 힘들게 합니다. 제가 구체적으로 뭘 하는 사람인지도, 제 삶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지도, 단 한 번도 질문한 적 없는, 그런 영혼 없는 인간들이 가족이라는 게 너무 슬프고 기와 자존감만 다 바닥나는 원천이 됩니다.

그래서 가족에게서 오는 깊은 서포트가 없으니 항상 불안하고 악몽 속에 붕 떠있는 기분으로 사는 것이 힘겹습니다. 어머니가 특히 죽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많이 합니다. 무방비 상태의 나에게 했듯이 칼을 가져와 "꼭꼭 찔러 죽여버린다"라고 말하고도 싶고요.

외국에서 오래 생활하면서 PTSD까지 감당하는 게 어떤 것인지, PTSD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들은 전혀 이해를 못하겠지만, 적어도 상처 주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가족 때문에 한국에 들어가기 싫다는 게 말도 안 되지만 진심입니다. 심지어 제가 갖고 있는 PTSD의 원인 중 하나가 성폭력인데, 그런 얘기를 해도 가족들은 아무런 반응도 없고 오히려 화를 내요. 그런 얘기를 해서 싸움 나기는 기름에 라이터 던지기고요.

외국에서 계속 이렇게 지내면 외로움도 지쳐 마음이 닳고 찢어지고 다 너덜너덜해져서 자살할 것만 같고요. 한국에 들어가도 내 행복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악마 같은 가족과 연을 끊고 지낼 수는 없어, 가족들을 살해하지나 않을까 걱정됩니다.
 

사진_픽셀

 

답변) 

질문자 분의 표현만으로도 입원치료를 권할 만한 상황이라는 것이 전해져 오네요. 자살에 대한 생각과, 다른 사람에 대한 공격성이 함께 나타나고 있으니까요. 자기 자신과 타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입원을 하여 치료를 받는 것이 가장 합당하고 현실적인 선택지일 것 같습니다.

다리가 부러지면 누구나 입원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부러진 다리가 눈에 보이니까요. 부러진 다리로 직장에 나가도, 보통의 직장에서는 입원 치료받기를 권할 겁니다. 그런 다리로 계속 일을 해봐야 비효율적이기도 하고, 또 영영 다리를 못 쓰게 될지도 모른다는 인간적인 걱정도 들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마음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언제 어느 정도의 치료를 받아야 하는지 스스로 알아차리기가 어렵습니다. 나도 내가 어떤 상태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도 알 수가 없죠. 그렇기 때문에 만신창이인 마음을 가지고도, 일을 쉴 수 없다며 또는 공부를 쉴 수 없다며 달리다가 결국 파국을 맞이하는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일반적인 이미지는, 건강한 성인이 어떤 사고를 겪은 뒤 정신적인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죠.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반복적인 트라우마에 노출된 경우에는 이런 일반적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는 전혀 다른 증상이 더해져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에게 매일 맞으며 자란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성인 남성을 볼 때 위험한 사람으로 인식하겠죠. 실제로 그 성인 남성이 어떤 사람인지와는 전혀 상관없이요. 이렇게 자신이 겪은 사건에 의해, 그 사람 마음속에는 특정 상황과 인물을 평가하는 체계가 형성이 됩니다. 이런 체계가 있어야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데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죠. 아버지와 비슷해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얼른 알아차리고 도망갈 수 있으니까요.

문제는 이런 마음속의 체계가, 현실과 너무 차이가 나는 경우에 발생합니다. 폭력적인 아버지와 비슷해 보여서 도망치고 또는 내가 먼저 공격을 했는데, 사실 그 남자가 공격적이지 않은 보통 남자라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주변에서는 나를 멀쩡한 사람을 싫어하고 공격하는,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보겠죠.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질문자 분의 사연 속에도 이런 흔적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상사와의 마찰은 흔히 있지만, 상사 가족과의 마찰은 흔치 않죠. 또 가족에게 손 벌릴 일이 없는데, 가족을 신경 쓰는 일도 흔치 않고요.

어린 시절 트라우마로, 남들과는 다른 체계가 생겼고, 그로 인한 고통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더해진 듯해요. 그런데 질문자 분의 경우는 상황이 조금 더 안 좋죠.

말씀하셨듯이, 정서적 지원을 받지 못하는 외국 생활을 지속하면 정신적으로는 병들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나라에 있든 이방인은 쉽게 고립될 수밖에 없고, 사람은 군중 속에서 고립될 때 심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군중이 악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죠. 내가 타인을 미워할수록, 타인은 나에게서 멀어지게 되어, 결국 더 확실하게 고립이 됩니다. 이런 이유로,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외국인이 자신이 더 인종차별을 당한다고 보고하기도 하죠.

이런 이유로 이미 마음의 상처가 있는 분들이, 외국 생활을 하다가 더 큰 병을 얻어서 오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질문자 분도 이 경우에도 해당할 듯하네요.

 

앞에서 설명했듯이, 지금 질문자 분에게는 휴식과 치료가 필요하며, 따라서 입원 치료가 적절한 선택입니다. 여건이 된다면 한국에서 치료를 받으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짧은 기간이라도 입원을 하면, 본인이 가진 정신적인 강점들이 회복이 될 것이고, 그 이후에는 주변 환경에서 악순환되던 요소들이 선순환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 회복되실 거예요.

세상에서 가장 이기기 힘든 존재는, 내가 이겨보지 못한, 이미 죽은 경쟁자입니다. 가장 강한 모습이 내 기억 속에 있으니까요. 지금 너무 힘들 때는 가족들과 연락을 끊는 것도 도움이 되죠. 하지만, 가족들과 연을 끊는다 한들, 내 기억 속에 있는 가족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질문자 본인을 위해 적절한 치료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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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삼성마음숲 정신건강의학과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국립공주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저서 <정신건강의학과는 처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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