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신재현 강남 푸른 정신과 원장]

 

행복한 결혼식 장면을 떠올려 보자. 웨딩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신부와 멋지게 턱시도를 차려입은 신랑이 함께 버진로드를 걷는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많은 이들 앞에서 사랑을 서약한다. 결혼행진곡이 부드럽게 울려 퍼지고, 많은 이들의 축복 속에서 그렇게 두 사람은 부부의 연을 맺는다. 그 날은 두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날일 것이다.
 

사진_픽사베이


꿈은 깨라고 있는 것일까? 한없이 올라가던 인생의 상승 곡선은 다시 변곡점을 맞이한다. 조금씩 둘의 관계가 삐그덕거리기 시작한다. 결혼식을 준비하던 분주함에, 사랑의 결실을 기대했던 달콤함에 가려져 있던 그 무엇인가가 점차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보이지 않던 상대의 결점일 수도 있고, 뜻하지 않게 맞이하는 처가, 시댁 식구들과 얽힌 갈등일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행복했던 결혼식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허니문에서 관계에 작은 균열을 경험하기도 한다. 작은 틈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벌어지고, 결혼 이전에는 겪어보지 못한 갈등으로 비화된다.

이쯤에서 인정하도록 하자. 결혼은 철저하게 현실의 영역이다. 바꾸어 말하면, 결혼 전 준비 기간은 일종의 판타지(fantasy)라 할 수 있다. 제각기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은, 뜻하지 않게 여러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잘 한들 예습과 실전은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부부가 겪는 첫 다툼은 대개 둘이 살아온 삶의 습관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신이 만들어낸 인류의 다양한 모습에 새삼 놀라지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다. 칫솔을 세워 놓는지 눕혀 놓는지, 잠옷을 입고 자는지 아닌지, 설거지는 바로 하는지 미뤄 뒀다 하는지 등 일상의 모든 것에서 불협화음이 일어난다. 한 사람이 쓰던 침대에서 두 사람이 자야 한다는 사실이 편할 리가 없지 않은가. 연애 과정에서 경험한 상대방은 결점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은 허점투성이로 보인다.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이유는 자명하다. 둘은 각기 다른 양육 환경과 성장 과정을 겪었다. 즉 다른 삶을 살았다. 그들의 부모는 아이에게 한없이 허용적이거나, 혹은 엄격했을 것이다. 부모가 삶을 대하는 모습을 보며 각자가 자신의 부모를 닮아왔을 것이다. 타인에게 마음을 드러내는 방식을 배웠거나, 관계에서 상처를 받고 마음을 감추어야 했을 수도 있다. 성장과정을 경우의 수로 따지자면, 60억 가지나 될 것이다. 단언컨대, 지구 상의 60억 인구 중 유전자, 양육 환경, 성장 과정이 동일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일란성쌍둥이라 할지라도 부모가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그들은 성장과정에서 다른 친구, 스승, 연인을 만난다. 그러니 서로 다른 시각을 갖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아직 사랑과 환상의 세계에 사는 이들은 배우자가 자신을 속속들이 알고 있고, 심지어 자신과 같을 거라 ‘착각’한다. 나를 사랑해서 함께 살기로 결심한 사람이니 조금 다를 수 있는 생활습관과 결점을 충분히 이해해 줄 수 있기를 바란다. 으레 자신과 같은 시각과 생각, 감정을 느끼고 있겠거니 생각한다. 미숙한 동일시(identification)라 할 수 있다. 물론 삶에서 즐거운 일만 생긴다면, 행복이 꽃피는 판타지에서 살 수만 있다면 이런 동일시는 해롭지 않다.

하지만 부처가 말했듯이, 살아가는 것이 바로 고해(苦海)이지 않은가. 부부가 함께 걸어가는 길이 늘 평탄할 수만은 없다. 심지어 이런 착각은 다분히 무의식적이다. 그래서 갈등이 터져 나오면 마음이 한층 불편해진다. 무의식적 착각은 사소한 다툼을 그저 사소한 채로 두지 않는다. 자신과 동일한 존재로 여겼던 상대에게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라는 마음이 절로 든다. 너무도 당연하다 여겼던 기대가 무너지면, 인간의 마음은 분노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무의식이 만들어낸 착각이 싸움을 자아낸다. 의식하지 못하기에 대처 또한 명쾌하지 못하니 싸움에 기름을 끼얹거나, 들판에 바람을 일으키듯 불씨를 더 키우기도 한다.
 

사진_픽사베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이제 상대방에게 기대를 좀 낮추고, 놓아주자. 오해하지 마시라, 상대를 밀어내기보다는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자는 말이다. 상대의 모습을 부풀렸던, 혹은 왜곡시켰던 눈앞의 볼록렌즈를 걷어내고, 이제 도수에 맞는 렌즈를 써야 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이렇게 되뇌어보자. ‘그래, 내가 착각하고 있었구나’라고. 그리고 나와 다른 삶을 살아왔을 배우자를 인정하자. 부부는 서로의 삶을 살아보지 못했기에, 상대에게 당연한 것이 자신에게 한없이 불편할 수 있다. 그러니, 초보 부부에게 반드시 필요한 마음은 ‘네가 그렇게 살아왔었구나’ 하는 것이다. 그/그녀의 성장 과정을 연민과 동정으로 추측하자. 너와 내가 다름을 인정하는 것, 그거면 충분하다. 부부에게 필요한 사랑의 모습은 바로 이러한 배려이지 않을까.

그리고, 결혼은 관계의 결승선이 아니다. 출발 신호를 기다리는 출발선임을 인정하자. 처음부터 모든 열정과 힘을 쏟아 달린다면, 경기를 완주하지 못한다. 결혼을 시작으로 삶의 모든 영역이 클라이막스가 되리라는 기대도 조금은 내려놓자. 모든 세상사가 그렇듯, 부부간의 관계에도 오르막과 내리막이 함께 존재한다. 오르막의 희열만을 그리며 살기보다는, 내리막을 함께 하면서도 다시 변곡점이 올 것임을, 그리고 관계의 오르내림이 긴 시각에서 보면 결국 평탄한 직선이 됨을 생각하자. 너무 큰 기대와 실망 모두 관계를 위태롭게 만든다. 결혼과 동시에 연인관계는 작별이다. 부부로서의 관계를 이제 새롭게 쌓아가야 한다.

 

생각해 보면, 인류는 불협화음의 충돌에서 나타나는 균형점을 좇으며 발달해왔다. 정(正)과 반(反) 사이를 오가며 합(合)을 찾아가는 과정이 쉽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부부가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다른 가치관으로 의견 충돌이 생기는 것은 가정 내의 인지부조화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더 중요한 것들을 발견하게 되면서 서로의 간극은 점차 좁아질 것이다. 인간에게는 인지부조화를 품어내고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발전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듣기 싫어하는 소음(noise)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아는가? 물리학자 프랭크 모스 교수는 바닷가재가 포식자의 접근을 감지하는 데 있어, 물결과 같은 소음이 오히려 주변 자극에 대한 역치를 더 쉽게 넘게 했음을 밝혀냈다. 작은 소음이 원자극을 더욱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를 ‘소음 공명(stochastic resonance) 현상’이라 한다. 소음 공명 현상은 여러 자연계 현상뿐 아니라 체내의 뇌세포들과 같은 미시적인 영역에서도 나타난다. 외부에서 주입한 작은 전류가 신경세포(neuron) 간의 연결 신호를 증폭시키기도 한다. 우리 관계도 이러하지 않을까? 분명, 부부의 관계를 더 성숙하게 다듬기 위해서는 서로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부부를 둘러싼 안팎의 소음들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이를 겪어나가며 경험하고 인내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어떠한 관계의 역치를 조금씩 넘어서는 것이 아닐까. 이를 통해 관계는 더욱 단단해지는 것이다. 불협화음은 부부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 수 있다.

 

 

♦ 정신의학신문 정신건강연구소 강남센터 개소 기념 ♦ 

     무료 마음건강검진 이벤트 안내 (클릭)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