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이제 대학을 졸업한 20대입니다. 

학교 다닐 때는 공부하는 게 잘 맞았고, 교우관계도 좋고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철저한 자기 관리를 했습니다. 식사도 최소량만 하며 몸무게도 45kg을 유지하려고 했고요.

덕분에 외적으로도 가장 빛나는 시기였는데요, 자존감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누가 봐도 정말 당당하다는 소리가 나올 만큼요.

사실 대학교 내내 애인이 늘 있어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괜찮은 스펙의 애인의 사랑을 받은 게 자존감이 높아진 요소인 것 같습니다.

특히 마지막 애인은 약 2년 정도 만났는데, 그분이 유학을 가게 되어서 헤어졌습니다. 아직도 가끔씩 연락하고, 한국 오면 보기는 하고요.

마무리는 항상 ‘공부가 끝나는 8년 후에 결혼하자.’인데 괜히 저는 진짜 기대를 하게 됩니다. 진실되게 저를 사랑해주는 사람은 보지 못했었거든요.

나중에는 이렇게 저랑 잘 맞는 사람 찾기 어려울 것 알아서 이 사람을 더 놓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8년 너무 길잖아요?

저도 이성적으로는 잘되기 힘든 거 잘 압니다. 그런데도 이렇네요. 이 친구 때문에 저도 미국 유학을 결심하게 된 케이스입니다.

그럭저럭 좋은 대학 합격하고도 마음이 불편한 게, 전 애인이랑 가까운 학교가 아니거든요. 가까운데도 합격을 했는데 학교 랭킹이 너무 떨어져서 못 가긴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설령 전 애인이랑 재결합을 한다고 해도 둘 다 수입이 없기 때문에 저의 유학이 끝나고 나면 직업 문제도 있고 또 헤어질 게 뻔합니다.

 

이성적으로는 정말 잘 압니다. 대학원 랭킹 높은 데로 일단 가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 그 다음에는 그다지 잘 맞는 것 같은 적당한 사람이랑 결혼해서 아등바등 살다가 아기 낳고, 은근 내조해줘야 되고 그렇게 살다가 죽겠죠. 제 인생에서 이런 그림이 그려질까봐 벌써부터 힘이 빠지네요.

 

그마저도 아직 미국에서 살고 싶은지 한국에서 살고 싶은지 정하지도 못했기에 어느 곳에서도 소속감을 크게 느끼지 않습니다. 낙동강 오리알이 된 느낌일까요...

 

저는 돈과 명예에 은근 신경 씁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해서인 걸까요. 이 성향을 내려놓고 싶어서 백방으로 생각해보는데도 절대 안 버려지네요.

비교적 풍족한 가정환경인데도 돈을 잘 벌고 사회적 인정을 받아야 하는 강박관념이 있습니다. 제가 대단한 사람이 되거나, 제 남편이라도 대단한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제 남편으로 대단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저부터 그에 걸맞은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 힘듭니다.

 

학부 때 전공 무시하고 노력해서 내가 그래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분야의 회사에 들어갔는데, 전공자보다는 항상 떨어지고, 너무 어렵고 제가 탑이 되지 못할 것 같은 넘지 못하는 산이 있어서 결국 퇴사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넘버원이 되지 못하는 그 느낌이 정말 패배자 같아서요.

그리고 회사 자체도 큰 편이 아니라 더욱 위축되었던 것 같아요.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난 내가 제일 잘났어!’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말이죠.

 

인생은 왜 살까요? 죽으면 모든 고민이 없어지는 상상을 하지만, 전 쉽게 죽지 않을 겁니다!

인생의 목표가 없어져서 너무 당황스럽습니다. 제가 이때까지 살아온 25년 동안엔 항상 목표가 있었는데...

현재 가끔 하는 알바 빼고는 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잠자는 시간 빼고 '항상 나 뭐해서 먹고 살지?'하는 생각이 듭니다.

애인 없이 이제 비로소 혼자라고 생각하니 가이드해주거나 의지할 사람이 없고 막막하네요.
 

사진_픽셀

 

답변) 

제가 이전에 어르신들을 모시고 해외여행을 간 적이 있었어요. 거의 제가 다 준비했었죠.

제가 계획하는 해외여행은 처음이라 완벽한 계획을, 분단위로 짰어요.

그런데 그때는 스마트 폰도 없어서, 지도를 프린트 해 갔었는데, 좁은 골목까지는 잘 나오지 않으니깐 길을 잃었죠. 그래서 여기저기 헤매다 보니, 당황스럽고 화도 나고 그러더라고요. 발걸음도 빨라지고요.

그런데 같이 가신 어른이 말씀하셨습니다.

"일단 카페에서 좀 쉬자."

 

카페에 앉아서 일단 쉬면서, 주변 풍경도 좀 구경하고, 배도 채우고, 천천히 지도를 보니깐 우리가 어디 있는지 알겠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계획을 세우고, 목적지로 이동했죠. 일정이 조금 미뤄지긴 했지만, 괜찮았어요.

 

질문자 분도 지금 비슷한 상황인 듯해요.

졸업이라는 명확한 목표가 있는 과정이 끝났고, 또 길안내를 해 주던 남자 친구분이 사라졌네요. 지도 없이 혼자서 골목길을 헤매고 계신 것 같아요.

 

유학, 결혼관, 전공, 취직, 외모, 같은 다양한 고민들 사이에서 헤매고 계신 것 같지만, 그 고민들의 공통점이 하나 보이네요.

'사랑'이죠.

사랑을 찾기 위한 유학, 대단한 사람과의 사랑과 결혼, 남들의 사랑과 인정을 받기 위한 직업, 누가 봐도 멋진 외모.

이 사랑에 대한 다양한 고민들을 다시 생각하면, 이런 가정을 하고 계신 것 같아 걱정이에요.

'사실, 나란 존재 그 자체만으로는 사랑받기 어려운 것 같아.'

 

요즘 같은 세상에서, 뭔가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은 좋은 가치로 받아들여지죠.

하지만 이렇게 노력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날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끊임없는 노력을 강요하는 일도 있어요. 이런 경우에는 노력 자체가 고통스럽게 느껴져요.

 

스스로의 존재만으로 사랑받을 수 없다는 믿음이 생기게 된 원인은 다양해요.

정말 뛰어난 형제가 있어서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거나, 내가 뭔가 잘할 때만 부모님이 사랑을 주거나, 또는 부모님이 기준이 몹시 높아서 사랑을 거의 주지 않는 등의 일이 반복되면, 내가 좀 더 노력을 해야만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길 수밖에 없죠.

그래서 진실 되게 질문자 분을 사랑해 주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말이 슬프게 느껴져요. 어린 시절 사랑으로 마음 앓이를 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에요.

또 성인이 된 이후에는, 진실 되게 질문자 분을 사랑해 주시는 분이 있었더라도, 질문자 분 본인이 '이 사람은 내가 노력해서 얻은 부분을 좋아할 뿐이야!'라고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한 사람에게 늘 진실된 사랑을 받을 수는 없어요. 사랑을 주는 쪽도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누구나, 적어도 한 순간은 진실된 사랑을 줄 수는 있어요.

우리 곁에 있는 수많은, 짧은 진실된 사랑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요. 그 믿음 없이는, 순간순간의 진실된 사랑을 내가 거짓으로 받아들일 테니까요.

 

나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먼저 알아차려야겠죠.

그래서 혼자만의 시간을 견딜 수 있다면, 여행, 템플 스테이, 어떤 형태이든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도움이 될 거에요.

만약 혼자서는 나 자신을 마주할 자신이 없거나,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정신과 전문의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을 듯하네요.

아마 늘 빛나셨을 거고, 미래에도 빛나시겠죠.

지금 잠시 내가 눈을 감고 있는 동안만, 그 빛을 보지 못할 뿐이에요. 

 

 

♦ 정신의학신문 정신건강연구소 강남센터 개소 기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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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삼성마음숲 정신건강의학과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국립공주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저서 <정신건강의학과는 처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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