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장재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의사들은 평생 아픈 사람들만 봐야 하니 얼마나 불행하냐? 매일 찡그린 얼굴만 대해야 하니 분명 삶이 행복하지 않을 거야. 그에 반해 교사는 파릇파릇한 학생들을 평생 대하면서 매일 미래에 대한 희망의 에너지로 충전이 되니 삶이 행복하지 않을 수 없지.”

중학교 때 한 선생님이 직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면서 말씀하신 내용인데요. 그때도 저는 의사가 되길 꿈꾸고 있었기에 선생님의 이야기가 남다르게 들렸더랬습니다. 잠시나마 꿈이 흔들렸던 기억이 나네요.

 

선생님의 말씀처럼 의사들은 늘 병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대합니다. 이것이 의사 개인의 내면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의사도 사람이니까요. 그래서 의사들은 마음에 일종의 타협을 합니다. 상대의 고통을 그다지 생생하게 느끼지 않도록 마음을 차단하는 것이죠.

이것은 의사들이 직업적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반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매번 환자들의 고통을 자신이나 가족의 고통처럼 생생하게 느낀다면 의사의 심장은 버텨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환자들을 다소 냉정하게 대하는 듯 보이게 됩니다. 의사들이 환자의 고통을 잘 공감해주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곤 하는 데에는 이러한 이유도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추정해봅니다.
 

사진_픽사베이


정신과 의사들은 어떨까요?

정신과 의사들은 환자를 사무적으로 덤덤하게 대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정신과 의사들만 환자를 인간적으로 대하는 훌륭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정신과 의사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정신과 일의 특수성 상 그렇게 되기가 어렵습니다.

대개의 타 진료과들은 일반적으로 이야기를 오래 하지 않습니다. 짧은 면담을 통해서라도 치료에 핵심적인 요소들만 빠르고 정확하게 짚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요. 하지만 정신과 치료는 상대적으로 긴 시간 면담을 통해 그 사람 인생의 전체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감정이입이 쉽게 되기 마련입니다.

물론 그러한 감정이입은 정신의학에서는 동정(sympathy)*이라고 표현되며, 환자의 치료에 좋지 않다고 배우긴 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공감(empathy)*과 구별되게 그러한 감정을 잘 다루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제 역전이(countertransference)*가 작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환자분들을 대할 때마다 많은 에너지 소모를 느끼곤 합니다.

하는 거라곤 앉아서 다른 사람 이야기 듣는 것이 다인데 왠지 모르게 저 자신이 굉장히 소모되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냥 앉아서 이야기하는 게 뭐 그리 힘드냐고 할 수 있지만 하루 종일 상대의 힘든 이야기, 특히 우울, 불안, 자살생각, 분노, 원망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퇴근시간 즈음에는 너무 지치면서 온몸의 기운이 다 빠지는 듯합니다.

 

종종 정신과 의사들은 어떻게 스트레스를 푸느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정신과 의사라 해서 스트레스를 푸는 비법 같은 게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제가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스트레스는 부정적 에너지가 몸속에 축적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충분히 배출해주는 방법과 중화시켜 희석시키는 방법, 두 가지가 있습니다.

 

배출하는 것은 우리 몸의 여러 구멍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제일 보편적인 것이 입을 통해서 배출하는 것입니다.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사람들과 대화를 통해서 푸는 것입니다. 사실 때론 스트레스 요인이 되는 사람에 대한 험담도 좋은 배출구가 됩니다. 화가 치밀어 오를 때는 소리를 지르게 되는 것도 이러한 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 감당이 안 될 정도의 부정적 에너지가 몸에서 느껴지면 이를 급하게 발산하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죠. 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몸과 마음의 손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일종의 무의식적 응급조치라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함을 치는 행동은 상대를 힘들게 하므로 이런 식의 합리화는 금물입니다. 그보다는 평소 운동을 하면서 기합소리를 크게 내거나 노래방에서 목청껏 크게 노래를 부르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겠죠.

눈을 통해서 눈물을 흘리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힘든 일로 슬픔에 휩싸일 때 실컷 울고 나면 감정이 조금이나마 정화된다는 느낌을 받으신 분들이 있으실 겁니다. 목 놓아 울고 나면 입과 눈을 통해 동시에 에너지가 배출되므로 다소 후련하다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피부를 통해 땀을 배출하는 것입니다. 운동을 열심히 하다 보면 기분이 상쾌해지는 경험, 다들 해보셨을 겁니다. 정신과 의사들이 평소 운동을 권하는 게 괜한 소리가 아닙니다.
 

사진_픽사베이


두 번째는 긍정적 자극을 몸속으로 유입시켜 부정적 에너지를 중화시키는 방법인데요.

여행, 독서, 영화나 음악 감상, 공연이나 모임 참석, 종교 활동, 명상 등이 긍정적 자극의 좋은 예입니다. 맛집을 찾아 좋은 음식을 먹는 것도 좋은 자극이 들어오는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가 많은 시대에 여행과 먹방이 유행인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일상에서 쉼과 사색의 시간을 가지려 노력합니다. 물론 집에 가면 아이들이 저를 가만 놔두지 않지만 주어진 환경 안에서 가능한 한 '쉼'을 확보하려 하는 것이죠. 그래서 사실 저는 직장 외에서는 상담을 잘하지 않습니다. 가끔 개인적 친분이 있는 분들을 통해 따로 카페 같은 곳에서 상담 요청을 하시는 분이 계시지만 웬만하면 정중히 사양합니다. 업무 외 시간에 진료로 봉사활동을 하시는 주변의 의사들을 보면 존경스럽기도 하지만, 저는 전화로 문의를 하는 것도 가급적 피하는 편입니다. 심리적 내상에 늘 노출되어 있는 저로서는 그렇게나마 '쉼'을 확보하는 것이 자그마한 스트레스 해소법입니다. 또한 그것이 병원에 저를 직접 찾아오시는 분들께 최선을 다하기 위한 저 나름의 방법이기도 합니다. 제게 있어 VIP는 친분을 통해 쉽고 편하게 도움을 받으려는 분보다 일부러 제가 있는 병원에 직접 시간과 비용을 들여 찾아오시는 분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정신과 의사는 어떻게 스트레스를 해소하는지, 듣고 보니 시시하죠?

맞습니다. 정신과 의사라고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저 또한 틈틈이 좋아하는 운동하고 취미활동을 통해 즐거움을 찾고 쉼을 누리려 애쓰는 것 외에는 별 다른 것이 없습니다. 실망시켜드린 것 같아 죄송하지만 특별히 더 내세울 것이 없네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스트레스를 해소하시나요? 자신에게 맞는 스트레스 해소법을 찾는데 제 글이 자그마한 도움이라도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 공감(empathy)이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상대의 생각이나 감정이 내 것처럼 느껴지고 이해되는 정신현상이다. 공감은 논리와 언어를 넘어선 마음으로의 이해로 정신치료적인 효과를 갖는다. 그러나 공감에서 중요한 요소는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독립된 개체로서, 주체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마음을 나누되 독립성은 잃지 않는 것이 건전한 공감이다. 독립성을 잃게 되면 상대방의 감정에 전염이 되어 그 감정에서 갇힌 채 빠져나오지 못하게 되는데 이를 동정(sympathy)이라 한다. 그렇게 되면 상대방을 도울 수가 없고 자신도 상처를 받게 된다. (정신분석에로의 초대, 이무석)

* 역전이(countertransference)란 상담자가 자신의 과거 중요한 인물을 대하듯 환자를 경험하는 느낌과 태도를 말한다. 이에 반해 전이(transference)는 환자가 과거 중요한 인물과의 관계를 상담자와 재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역전이 현상이 일어나면 상담자의 환자에 대한 감정이 깊어지면서 상담자의 무의식적 요소가 치료 장면에 포괄적으로 개입되고, 이렇게 됨으로써 상담자의 환자에 대한 이해와 분석과정에 영향을 주게 된다. (신경정신의학, 대한신경정신의학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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