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당신은 분노한 발걸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옵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당신은 당신이 세상으로부터 얼마나 지독한 일을 당했는지, 그리고 당신이 세상을 얼마나 원망하는지를 증명하려는 것처럼 쏟아내었습니다.

당신은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지옥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응당 가져야 했던 모든 것들은 압제자로부터 모조리 빼앗긴 상태였으며 당신의 주변은 마치 악마와 같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타는 듯한 당신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고자 잠시 분노를 접어두기를 권하고 세상의 무엇이 당신을 그토록 분노케 하는지를 말해보도록 하였습니다.

 

당신은 분노를 삭이고 괴로운 표정으로 말을 하려다 이내 소중한 것을 손에 꼭 쥐고 놓지 않는 아이처럼 다시 분노를 부여잡습니다. 급기야는 당신의 분노에 동조해주지 않는 나에게 실망감을 표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갑니다. 당신이 떠난 자리에 나는 잠시 우두커니 있다가 어떻게 하면 당신을 도와줄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시간은 당신이 고통받은 시간에 비하면 아주 찰나에 불과하죠. 언어는 당신의 고통을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수단이죠. 하지만, 언젠가 당신이 나를 다시 만나러 온다면 이번에는 전하고 싶네요. 딸을 잃은 한 분노에 찬 어머니의 이야기를요.

 

딸을 강간치사로 잃은 이혼녀 밀드레드는 하나 남은 아들과 함께 분노에 찬 삶을 이어나갑니다. 분노는 그녀의 일상을 잠식해버리고 이제 그녀는 분노 외에는 다른 어떠한 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됩니다.

그녀의 모든 내면을 태워버린 분노의 불길은 이제 세상을 향해 옮겨 붙습니다. 그녀는 딸의 죽음을 잊어가는 세상과 범인의 단서 하나 잡지 못한 경찰에게 분노합니다. 밀드레드는 대중들이 딸의 죽음을 잊지 못하도록, 그리고 경찰이 적극적으로 수사하도록 압박을 넣기 위해 그녀가 살고 있는 에빙 외곽의 광고판에 경찰서장 윌러비를 비판하는 세 개의 광고를 냅니다. 그리고 이 세 개의 광고판은 조용했던 마을을 휘저어놓습니다.

“내 딸이 강간당하면서 죽었어.”

“근데 아직도 범인을 잡지 못했다고?”

“윌러비 서장, 어떻게 이럴 수 있지?”
 


하지만 이 영화는 딸을 잃은 어머니의 위대한 투쟁에 대한 영화가 아닙니다. 영화의 다음 장면은 우리의 예상을 배신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분노에 찬 그녀의 광고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늘 공격적이었고 때로는 자신이 남들에게 욕설을 날리고 폭력을 휘둘렀거든요. 더군다나 그녀가 공개적으로 비난한 윌러비 서장은 마을 사람들의 신망을 받는 인격자였고 더구나 췌장암으로 앞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밀드레드는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여생마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벌인 일이 자극적일수록 사람들의 관심이 사건에 집중되고, 그래야 딸을 죽인 범인이 잡힐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녀는 피해자에서 점점 가해자로 변해갑니다. 급기야 암 투병을 하던 윌러비 서장은 자살해버립니다.

 

그렇다고 밀드레드가 맞서는 경찰들이 정의롭게 그려지지도 않습니다. 경찰들이 사건 해결의 의지가 적고 무능한 것 또한 사실이었습니다. 이는 영화의 주인공 밀드레드의 광고판에 그 누구보다도 심한 반감을 보이는 경찰관 딕슨에 대한 묘사로 나타납니다.

거친 성격의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경찰관 딕슨 또한 좌절과 분노로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그는 유색인종을 함부로 체포하여 고문을 하고 밀드레드의 광고를 실어준 광고업자 웰비를 2층에서 던져버립니다.

딕슨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려워진 가정 사정 때문에 형사의 꿈을 접어야만 했죠. 그는 그 분노를 세상의 소외되고 차별받는 이들에게 마구잡이로 발산하는데, 재미있게도 이 마초적인 남자는 어머니에게는 꼼짝 못 하는 마마보이로 묘사됩니다.

그의 인종차별주의적 경향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 설정은 주변 사람들이나 미디어가 던져준 혐오를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대한 은유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영화들은 보고 나면 마음이 통쾌해집니다. 선과 악을 깔끔하게 두 부분으로 나누고 주인공을 절대적 선에 그리고 반대편에 악당을 배치하지요. 악을 처벌한다는 거대한 명분 아래에서 선역인 주인공의 사소한 도덕적 딜레마나 흠결은 생략되거나 최소화됩니다.

하지만 영화 ‘쓰리 빌보드’는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에서 벗어납니다. 주인공은 피해자로 출발하지만 점점 더 큰 가해자가 되어갑니다. 악인을 잡기 위해 주인공이 노력하는 과정이 점점 주변 사람들과 사회에 큰 피해를 끼치면서 영화 초반의 명쾌한 선악구도를 점점 흐려놓습니다.

이 영화는 분노가 망가뜨리는 어떤 소중한 것들에 대한 영화입니다. 그리고 이 절대 두 개로 깔끔하게 양분될 수 없는 인간 사회의 회색지대에 대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보고 나면 가슴이 오히려 답답해지지만 우리를 생각하게 해주는 건 이런 영화들이죠.

 

그리고 이제 영화는 카메라를 돌려 이제는 분노의 상징이 된 세 개의 광고판의 뒷면을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딸이 죽던 날, 밀드레드는 자신의 딸과 심한 말다툼을 벌였고 화가 난 그녀는 딸에게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물론, 그녀의 말 때문에 딸이 죽은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끔찍한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불행히도 죄책감과 좌절을 먹고 거대해진 분노는 범인이나 범죄에 대한 미움, 정의에 대한 갈망으로 향하는 대신, 그녀의 마음을 완벽하게 망가뜨리고 이제 그녀의 통제를 벗어나 세상을 태워버리려고 합니다.

그녀는 범인을 잡지 못하는 경찰에 대하여 분노하고, 자신의 의견에 동조해주지 않는 세상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그녀와 똑같이 증오를 품은 누군가가 그녀의 광고판에 불을 지르고 급기야 그녀는 성급한 오해로 경찰서에 화염병을 던져 불태웁니다.

 


분노는 달콤하지요. 분노는 우리의 생각을 단순하게 만들고 우리를 행동하게 만듭니다. 분노는 우리가 좌절을 망각하게 하고 행동에 대한 책임이라는 쇠사슬을 벗기고 행동력이라는 날개를 달아줍니다.

책임감과 합리성에서 해방된 우리는 전능감에 취해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끔찍하고 비합리적인 행동을 남에게 하게 되기도 합니다. 분노에 잠식된 우리는 그 끔찍한 행동들마저 세상을 정화시키는 계몽활동처럼 느끼고 정당화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자제시키려 하는 사람에게 분노의 방향을 돌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노는 결코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않아요. 분노가 끝나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좌절했던 비참한 나로 돌아가기 때문에 이 찰나의 안식을 이어나가기 위해 분노를 유지시킬 콘텐츠와 분노를 쏟아부을 대상에 탐닉하게 됩니다.

혹자는 폐쇄된 집단을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분노한 이들과 절대 그곳에서 나오려 하지 않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분노를 쏟아부을 다른 대상을 찾아 자신의 분노를 전치하게 되기도 하죠.

대개 그 대상은 내가 분노를 마음껏 표출해도 될 만큼 안전한 소외되고 약한 이들이기가 쉽지요.

 

딕슨은 자신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대신, 자신이 지켜주어야 할 소외된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두릅니다. 밀드레드는 자신의 광고판이 불에 타자 누가 불을 질렀는지 알아보지도 않고 경찰서에 불을 지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누구도 분노를 통하여 자유로워지지는 못했죠.

딕슨은 밀드레드가 지른 불에 큰 화상을 입고 자신이 창문에서 던져버린 광고업자 바로 옆 침대에 나란히 눕게 됩니다. 그렇게도 타인에게 분노 섞인 폭력을 휘둘러대던 밀드레드는 막상 범인으로 의심되는 사람이 눈 앞에 나타나자 한 마디도 하지 못합니다.

결국 방향을 잃어버린 분노는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했습니다. 남은 것은 자신의 분노로 인하여 상처 받은 사람들과 분노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신들뿐이었죠.

 

출구를 찾지 못하던 분노를 상징하던 세 개의 광고판에 대한 영화의 이야기는 자살한 경찰서장 윌러비가 남긴 유서로 크게 흔들립니다.

윌러비는 유서로 자신이 범인을 잡지 못했음을 정중히 사과하고 자신도 이로 인해 마음이 아팠음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죽음은 광고판과는 상관없다며 선을 그으며 분노의 확대를 막습니다. 동시에 이를 증명하기 위해 밀드레드의 광고판을 유지하기 위해 익명으로 돈을 보낸 것이 자신임을 밝힙니다.

밀드레드는 세상 모두가 자신처럼 분노하기를 원했고 윌러비는 자신의 죽음으로 인하여 누군가가 새로이 분노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윌러비는 딕슨에게도 편지를 남깁니다. 그는 딕슨에게 분노로는 원하는 것을 아무것도 얻지 못할 거라 전합니다. 그리고 분노에 사로잡히지 말고 침착하게 생각할 것을 당부합니다. 영화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었듯이 방향을 제대로 찾지 못한 분노는 결국 우리에게 미래를 위한 동력과 세상에 대한 신뢰를 빼앗아버리기 때문이죠.

자신이 창문에서 던져버린 광고업자 옆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로 누워서, 자신으로부터 상처 입은 피해자가 자신을 걱정하며 건네준 오렌지주스를 보며 딕슨은 생각에 잠깁니다.
 


결국 영화의 마지막은 그 누구보다도 큰 분노를 가지고 서로 적대해왔던 밀드레드와 딕슨 두 사람이 연합하여 아직 확실하지 않은 범인을 잡으러 떠나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이 마지막 장면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 밀드레드와 마지막으로 연합한 것이 딕슨이라는 점입니다.

사실 밀드레드와 딕슨은 서로를 증오할 이유가 전혀 없었죠. 하지만 밀드레드의 방향을 잃은 범인에 대한 증오심이, 딕슨의 방향을 잃은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한탄이 서로를 증오의 전쟁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리고 둘의 분노는 방향을 찾았기에 서로를 그토록 미워했던 두 사람은 이제 든든한 동료가 되어 범인을 잡으러 갑니다.

 

두 번째 의미는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나누는 대화에서 드러납니다. 둘은 자신들이 잡으러 가는 남자가 범인인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예전의 그들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그 남자를 죽이려 들었겠죠.

하지만 둘은 그 남자를 찾아내면 어떻게 할지 가면서 결정하기로 합니다. 그들이 분노에 차 있었을 때 밀드레드와 딕슨은 그 자리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분노와 저주를 퍼부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분노를 버리고 생각하기 시작하자 비로소 이들은 일어서서 문제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합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앉아서 분노하지 않고 가면서 생각합니다. 자신들을 괴롭히던 문제를 해결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작은 희망을요.

 

아마 당신이 누군가에게 지독한 일을 당했더라면, 그래서 당신이 그 일로 좌절해서 일어설 용기를 잃었다면, 아마도 당신의 눈에 비친 세상은 아주 단순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와 같은 상처 입은 사람들, 나를 괴롭히는 악마 같은 세상. 상처 받은 마음은 좌절로 가득 차 있기에 너무나 쉽게 세상의 모든 복잡한 요소들을 단순하게 규정짓고, 그 단순하게 규정지은 둘로 나뉜 공간에 자신의 분노를 채워 넣습니다.

그 단순한 세상에서 분노를 발산하는 동안 당신은 당신의 좌절을 잊고, 잠시의 활력을 얻고, 어쩌면 동지를 얻어 위안받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요.

하지만 우리는 이제 알죠. 분노가 그동안 당신과 당신 주변을 얼마나 망가뜨려 왔는지를요.

 

일단 당신 눈앞의 분노하라고 속삭이는 목소리들을 끄세요. 누군가를 증오하라고 끊임없이 외치는, 함부로 누군가를 악마로 규정하고 일부의 치부를 돋보기로 확대하여 세상이 얼마나 끔찍한지 증명하여 당신을 계속 분노하게 만들려는 그런 영상과 드라마, 댓글들 말이에요.

좌절에 빠진 당신에게 그런 목소리가 얼마나 달콤하고 유혹적일지 알아요. 하지만 누군가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좌절에 빠진 당신에게 다가와 더욱더 분노하고, 미워하라고 말하진 않을 거예요.

 

분노가 보여주는 둘로 나뉜 세상은 그 둘로 나뉘지 못한 그 안의 무수한 중립적인 희망마저 절망으로 규정해버린 세상이기에 그 세상에 머물러 분노하고 있는 한 당신은 당신의 문제를 해결할 출발선상에 서는 것조차 어렵게 되지요.

우리 앉아서 분노하고 있지만은 말아요. 대신 두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나 걸어가면서 분노의 눈이 아닌 우리의 눈으로 직접 세상을 보도록 해요. 그리고 함께 가면서 답을 내는 거죠. 우리가 좌절하게 된 진정한 원인들과 여전히 세상에 남아있는 희망들을요.

괜찮아요. 분노가 없어도 당신은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니까.

 

“왜냐하면 진정한 사랑은 차분하고, 차분해져야만 생각을 할 수 있거든.
그리고 무언가를 찾아내기 위해선 생각하는 게 필요할 거야.
분노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지만 차분함은 할 수 있어.
기분 전환하는 겸 한번 해보는 거야. 행운을 빌어.
넌 참 괜찮은 놈이야. 근데 운이 좀 없더라.
괜찮아. 이젠 너에게 좋은 쪽으로 변화할 거야.”

<영화 쓰리 빌보드 중에서>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당신의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분당서울대병원 전임의
(전) 메디플렉스 세종병원 정신건강의학과장 치매전문센터장
저서 <약한 게 아니라 아팠던 것이다>, <이제 독성관계는 정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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