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서한 강남 푸른 정신과 원장]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자꾸 핑계를 대고, 거짓말을 하는 버릇 때문에 고민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입을 빌리자면 '거짓말을 자꾸 한다.'라고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제가 한 일 또는 잘못이 분명한데도 '내가 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제 입장에선 이 중 3분의 1은 제가 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고, 다른 3분의 1은 기억이 나질 않는 애매한 상태이며, 남은 3분의 1은 제가 했음에도 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즉각적으로 '내가 하지 않았다.'라고 말이 나와버립니다.

 

저도 이런 버릇은 인지하고 있지만 막상 고쳐야 한다 생각해도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원인이라도 대략적으로 짚어본다면 아마 어릴 적의 경험이 원인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제 어머니는 제 잘못에 대해 경중을 따지지 않고 과하게 신경질을 내시거나, 아니면 손에 닿는 물건으로 저를 때렸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본다면 정말로 그런 방법밖에 없었나, 그냥 차분하게 앉혀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방법도 있지 않았나 싶지만, 이 글에서 이건 중요한 일이 아니지요.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제가 조금만 거짓을 섞으면 매를 피할 수 있다는 걸 깨닫고 거짓말을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그게 반복되고 반복되다 보니 버릇이 된 것이 아닐까,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와서는 저한테 도움이 되진 않네요.

그런 버릇이 반복되고 반복되니 같이 일하는 상관들이 짜증을 내더라고요. 실수를 연발하는데 고칠 생각은 안 하고 오히려 거짓말을 한다고.

그 때문에 이때까지 알바를 한 곳 중 가장 맘에 들었던 곳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같은 수준인 알바 자리를 찾는 건 하늘의 별따기이겠죠.

 

저는 유독 기억을 잊어버리는 일이 잦습니다.

그게 일상의 영역만이라면 모를까, 일하는 데에 필요한 지식이나 상식, 기억 같은 것들마저도 필요할 때마다 불쑥 한두 조각씩 잊어버렸다가, 직후에서야 다시 떠오르는 식입니다.

정말 간단히 비유하자면 5+3×4를 무심코 32로 계산했다가 지울 수 없는 펜으로 32를 써놓고 나서야 곱셈을 먼저 계산해야 한다는 상식이 떠오르는 식으로요.

이런 식의 건망증 비슷한 게 시작된 건 아마 제가 우울증에 걸렸다는 걸 스스로 자각하기 시작한 전후 같습니다.

이게 계속 반복이 되다 보니 저도 속상하고 상관들도 저를 이해할 수 없다며 넌더리를 내는 게 반복됐습니다.

차라리 어떤 증상인지라도 알면 그나마 속이라도 시원하겠습니다만, 제 스스로 알 수 있는 방법은 없겠지요.

 

이렇게 써놓고 보니 제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제 잘못에서 회피하려는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차라리 이리 단순한 이야기가 들어맞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렇다면 이렇게 골머리를 앓을 일 없이 스스로 고쳐가면 되겠지만, 지금의 저는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2년 전을 마지막으로 지긋지긋한 우울증은 떨쳐버렸지만, 저에게 남은 심상은 폐허뿐이라는 느낌이 조금은 씁쓸하게 다가옵니다.

어떨 때는 저 스스로 안 될 사람인가, 남들보다 떨어지는 인간인가 하고 가벼운 자괴감이 들기도 합니다.

심리치료를 받아볼까 했지만 이런 일로 받기엔 무언가 애매한 느낌인데다가 지갑 사정도 받쳐주지를 않더라고요.

 

누군가가 도와주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일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진_픽사베이

 

답변) 

안녕하세요, 강남 푸른 정신과 서한입니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건 누구에게나 어려울 겁니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 일의 그르침이 나 때문임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불편함을 만들기 때문이지요.

인간은 위기 상황을 마주하면 일단 회피하려는 동물적 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웬만큼 이성의 힘이 강하거나,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이상 본능에 이끌리는 것이지요.

질문자님께서 성장 과정에서 겪었던 어머니의 부당한 훈육은 그런 왜곡된 대처를 더 부추겼을 것 같아요.

당장 부당한 대우에 대처할 힘이 없는 어린아이는, '일단 이 자리를 피하고 보자'는 식으로 핑계나 거짓말을 시작했을 테고, 이를 통해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면 행동이 강화되었을 겁니다.

현재 하고 있는 행동의 뿌리는, 결국 한참 전에 그 씨앗이 뿌려진 것이지요. 

 

질문자님께서도 어렴풋이 원인을 알고 계신 것 같아요. 하지만, 원인을 아는 것이 해답의 전부는 아닐 겁니다.

현재 삶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문제들이 오롯이 자신의 탓, 내 인생이 재수 없는 탓, 혹은 나를 그렇게 만든 어머니 탓으로 돌리기보다 그 과정에서 힘들었을 '어린 시절의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당시에 그렇게 대처할 수밖에 없었던 어린아이를 공감하고, 정서적인 이해를 하는 것이 변화의 첫 번째 과정일 거라 생각합니다. 

 

그다음 과정은, 반복적인 현재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핑계를 대고 거짓말을 하게 되는 상황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당시의 감정과 생각은 어떠한지, 몸의 반응은 어떠한지, 그 행동을 부추기는 촉발 요인(방아쇠 요인)이 뭔지를 찾아보고, 다음에 맞이할 동일한 상황에서는 이전과 다른 건강한 행동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10번 중 1-2번 정도라도 동일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상황의 인식과 다른 대처의 반복을 통해 조금씩 그 빈도가 늘어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과정을 혼자 해낸다는 것이 쉽지는 않아요.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전문가와 함께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기억력의 저하는 오래된 우울로 인한 걸로 보이네요.

우울증으로 인해 집중력이나 기억력과 같은 인지기능의 저하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울증 증상들로 인해 업무에 방해를 받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2년 전 우울증을 떨쳐버렸다 하지만, 우울증은 언제든 다시 나타날 수 있는 놈이니까요. 그리고 내재된 내적 우울감은 쉽게 떨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제가 질문자님의 모두를 알 수는 없어요. 하지만, 글에서 알 수 있는 정보들로 추정해 보았습니다.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들과 함께 간다면 이전과 달리 멀리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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