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살다 보면 한 번쯤 그럴 때가 있다. 

이렇게는 더 이상 살 수 없는데, 어떻게 살지도 알지 못하는.

 

정신과 레지던트로 첫 근무를 할 때의 설렘이 기억난다. 피 말리는 수험생 시절과 지루하고도 버거운 6년의 의대 생활로도 모자라, 심전도 촬영 기계, 관장 기계(의료행위라 의사 자격증을 가진 인턴이 직접 해야 한다)였던 1년의 인턴 시절을 더 버티고 겨우 얻은 자격이었다.

힘든 이들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함께 치유의 길로 나아간다는 흔한 판타지가 내 마음속에도 가득했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 명명된 가운을 입은 모습이 좋아 거울을 보며 몰래 웃었던 기억도 난다. 

 

내가 수련했던 병원의 경우 1년차 전공의는 주로 조현병과 조울증 환자의 주치의를 담당했었다. 환자-의사 관계와 면담이 중요하지 않은 질환군은 하나도 없지만, 해당 질환들의 치유에 가장 중요한 요인은 약물의 조절과 관리이다. 환자들의 예후는 면담보다는 약물치료가 그들에게 잘 맞는지, 그렇지 못한지로 결정되었다. 점차 그들 삶의 고충보다는, 증상에 그들의 이야기를 맞추어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응급실과 외래를 내원하는 급성기의 불안정한 환자들을 (해당 질환군의 환자들이 모두 그러한 양상을 띤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뺐다. 담당 환자가 폭력적일 땐 병동 간호사, 기사님들과 함께 이를 온몸으로 받아냈다. 응급실, 외래, 입원병실, 기타 등등.. 몸은 하나인데 세네 군데에서 동시에 전화가 오느라, 빠른 조치를 취해주지 않는다는 불평도 감내해야 했다. 정신과 전공의라기보다 기숙사 사감 같다는 자조적인 농담이 오고 갔다.

주 4일 당직을 섰고, 공휴일에는 추가로 당직을 섰다. 나머지 날에는 저녁과 자정 사이에 퇴근을 할 수 있었다. 연인과 헤어졌고, 7kg가량 체중이 불어 새로 옷을 구입했다. 무엇을 위해, 라는 생각을 하기에도 너무 바빴다. 가끔 쉴 땐 자야 했다. 그래야 일어나면 다시 일상을 버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져 갔다. 익숙해졌다기보다는, 삶이 말을 걸어와도 대꾸할 힘이 없는 느낌이었다.

 

의국 사정으로 이르게 겨울 휴가를 썼다. 지치는 것과는 다른, 지극히 가을스러운 스산함이 마음에 감돌았다. 왠지 오래도록 소중함을 간직하는 곳이 그리웠다. 촌스럽지만 홀로 경복궁에 갔다. 반복하여 불타고도 끊임없이 되살아나 그 자리에 있는, 망한 나라의 궁을 보며 애잔함을 느꼈다. 흔한 반전 하나 없이, 정신의학도의 길에 대한 환상은 상투적으로 무너지는 중이었다.
 

사진_픽셀


소진 증후군, 탈진 증후군으로도 일컫는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은 미국의 정신분석가 프로이덴버그가 처음 제시한 개념이다. 그는 자신을 포함하여, 중독 치료자들에게서 관찰되는 일련의 증상들을 기술하기 위해 해당 용어를 도입했다.

도박, 마약, 음주 등의 만성적인 중독 환자군의 치료는 매우 버거우면서도 단기간 내에 가시적인 성과를 얻기는 힘들다. 신념을 가지고 열성을 다하던 치료자가,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큰 변화가 없는 환자들을 보며 점차 무기력해진다.

그럴수록 더욱 자신을 채찍질하지만 큰 성과의 변화는 없는 상태가 지속되다, 어느 순간 무너져 내리듯 소진된 자신을 발견한다. 이와 함께 예민하고 우울한 기분, 감정조절의 어려움, 통증 등 불특정 다수의 신체 증상들이 동반되기도 한다.

 

번아웃은, 고도로 세분화, 전문화된 직무 능력을 요구하는 현대 사회에 흔하다. 이는 일련의 단계를 거쳐 녹이 슬듯 조금씩 마음을 좀먹는다. 처음에는 꿈과 야망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업무에 몰두한다. 하지만 드는 노력에 비해, 기대한 만큼의 보상(승진, 직장 내 인정, 시험 합격 등)은 주어지지 않는다.

노력에 더 박차를 가할수록, 기대와 현실의 괴리는 점점 커지고 마음의 여력은 고갈되어 간다. 해내야 할 일은 여전히 산더미 같은데,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져 내린 것처럼 아무것도 해낼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사소한 일에도 예민해지고, 현재 상황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기만을 꿈꾼다. 마치 나 자신이 모두 타 버리고 재만 남은 것 같은 마음 상태, 그래서 번아웃(burn - out)이다.

번아웃 증후군은 아직 현대 정신의학의 여러 진단 기준(DSM, ICD 등)에서 정식 질환명으로 등재되진 않았다. 하지만 여러 질환의 환자들과 면담하다 보면, 기저에 해당 증후군의 증상으로 고생하는 경우를 흔하게 본다. 병원 내에서 뿐 아니라, 친구들과의 술자리, 인터넷 커뮤니티의 글들, SNS의 심경토로에서도 번아웃의 징후가 엿보이는 경우가 많다.

 

번아웃의 치료적, 대안적 개념으로 제시된 것이 일과 삶의 균형(work-life balance)이다. 소진 증후군은, 역설적으로 열정인 이들에게 잘 찾아온다. 업무와 성과에 지나치게 많은 가치를 부여하였고 이를 위해 한정된 시간과 노력을 모두 투자하였으나 원하는 만큼의 결과가 주어지지 않아 좌절한다. 인생에 일이 전부는 아니다. 여행을 떠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때 지친 몸과 마음이 쉰다.

그런데,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이 어쩐지 짐작이 간다.

‘속 편한 소리 하네. 그걸 몰라서 힘들까, 그렇게 하지 못하니 힘든 거지.’

맞다. 실은 처음 번아웃과 그 치료 개념을 접하는 내 마음이 그랬다. 하루만큼의 일과를 따라가기가 버거워서, 삶의 다른 소중함을 돌아볼 만한 여유조차 없었다. 그저, 어서 이 고단한 과정이 종료되기만을 간절히 바랬다.

 

그러던 중 특별할 것 없는 오프 날이 찾아왔다. 서둘러 침대로 들어가거나, 무리한 술 약속을 잡는 것이 일상적이었겠지만, 그날따라 바다가 보고 싶었다. 병원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바다가 있었던 건, 지금 생각해도 참 다행한 축복이었다.

천천히 커피를 마시며 해진 바다를 보았다.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는 바다를 바라보고 파도에 달빛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다. 주차장 옆 트럭에서 주문한 커피를 손에 쥐고, 히터를 틀었다. 잠이 들었고, 더우면 히터를 끄고, 추우면 히터를 틀었다. 10% 정도만 잠들지 않은 정신으로는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일어났다. 왠지, 마음이 괜찮아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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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두 가지를 생각했다. 최소한, 손을 뻗으면 닿는 행복을 놓치진 말자. 그리고 소중한 삶을, 성공을 위한 시간들로 치환하지 말자.

그 날부터 식사를 거르지 않으려 노력했다. 응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바빠도 식사를 챙기고 꼭꼭 씹으며 그 맛을 느꼈다. 의국에서 담소가 오고 갈 땐, 일 생각을 제쳐 두고 크게 웃었다. 귀가 시간을 한 시간 늦추고 단골 라멘 집을 찾았다.

그러고도 지칠 땐 그 바다를 찾았다.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잊을 수 없는 그 겨울밤이 그리울 때마다. 흔한 드라마 같은 에피소드도, 반전도 없는 그저 그런 시간이 쌓여갔다. 그리고, 언제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르게 사랑에 빠진 것처럼, 다시금 내 일을 사랑하고 있었다.

물론 수련을 받는 동안 생의 마지막 날까지 기억할 환자분들도 만났고, 정말 감사한 말씀들에 힘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일상을 지극히 의사다운 그 보람으로만 버텼다는 기만도, 허세도 부리고 싶지 않다.

기약도 없고, 모호한 일의 성과보다는 작은 일상이 선사하는 아름다움이 나를 살게 했다. 그리고 끝에 무엇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이 길이 내게 옳은지, 한 번만 걸어갈 수 있는 삶의 길로 선택해도 후회가 없을지만을 끊임없이 자문했다. 그러자 꼭 처음의 판타지처럼만은 아니지만, 그와 닮은 정신의학도의 길이 천천히, 하루에 촛불 하나만큼 밝아져 왔다.

 

아파도 되는 청춘은 없다. 모든 과정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결과도 없다.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고난이 우리를 짓누르거나, 우리의 존엄이 부정당하는 중이라면, 그때는 과감히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할 때일지도 모른다.

다만, 오늘의 고단함, 불안함, 슬픔이 삶을 모두 되돌려야 할 증거는 아니다. 삶의 연산 속도는 우리의 조급함보다 훨씬 느리고,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순간에는 긴 로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은 어떤 목표보다 소중하다. 이 당연한 명제가, 눈앞의 지점만을 좇다 보면 모호해질 때가 있다. 기다림은, 보통 마음이 바라는 만큼보다는 조금 더 길다. 어서 닿아야 하는 데 닿지 못함에 조바심을 내기보다, 차라리 닿아야 할 곳은 애초에 한참 멀리 있다고 인정하면 어떨까.

하루에 한 걸음씩, 한 걸음에 어울리는 보폭과 바람으로 나아가고, 때론 멈추기도 하면서. 마라톤 선수들이 전력질주를 하지 않는 것은 더 빨리 달릴 줄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더욱이 우리는, 결승선을 통과하기 위해가 아닌, 달리는 순간, 살아가는 그 자체의 기쁨을 느끼기 위해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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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1분만 시간을 낼 수 있다면, 가장 가까운 창 곁에서 오늘의 구름과 하늘의 색을 확인하자. 잿빛 미세먼지가 가득하든, 하염없는 구름이 가득하든, 벅차게 푸르든 상관없다. 지금 살아가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라는, 삶에 쫓기지 않고 삶과 함께 흐르고 있다는 자각이 중요하다.

30분의 휴식이 가능하다면 차 한 잔과 그 시간만큼의 사색을, 하루를 마치는 저녁에 한 시간 남짓한 여유가 허락한다면 단골집의 늘 반가운 그 맛을 즐기자. 산책, 바다, 영화, 그이, 하늘을 바라보는 것과 결이 비슷한, 소소하고 뭉클한 행복을 줍자.

삶이 어떤 목표를 위한 수단이 아닌, 그 자체로 선물임을 되새겨주는 고마운 것들. 이를 인생이라는 앨범에 차곡차곡 하나씩 모으고, 이따금씩 열어 보는 것. 그것들이, 삶의 무게에 질려 살아갈 의미조차 모호해지는 소진의 슬픔이 찾아올 때, 우리를 보듬고 나아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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