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내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이유"
33. 스카이 캐슬 드라마가 우리에게 남긴 것

 

최근에 이렇게나 이슈가 되었던 드라마가 있었을까요?

스카이 캐슬이 이슈가 되었던 건, 드라마적 재미도 있었지만, 우리나라에 만연한 입시 문제를 다루어서 더더욱 이슈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드라마는 우리나라 입시 제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드라마가 이슈가 된 후 입시 코디네이터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였다는 기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준다고 생각합니다.
 

사진_픽셀


우리나라 입시 제도는 늘 비판받아오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계속 변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변화해봤자 똑같은 문제는 늘 반복되었습니다.

정말 입시 ‘제도’의 문제일까요?

입시 ‘제도’만 바꾼다면 해결이 될 문제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제도’의 문제였다면 그렇게 많이 바뀌었던 ‘제도’ 중에 하나 정도에는 답이 있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아무리 ‘제도’를 바꾸어도 똑같은 문제가 반복된다는 것은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입시제도’의 문제가 아니라면 무엇이 문제였던 걸까요?

답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우리는 왜 이렇게 ‘입시’에 목을 매고 있는 것일까요? 드라마의 비유로 이야기하자면, 왜 꼭 서울의대를 가야만 하는 것일까요?

‘입시’를 ‘입시’ 문제에만 국한해서 바라보면 풀리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입시’는 결국 ‘자원 배분’의 문제와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먹고 산다.’는 인간의 좀 더 원초적인 문제인 것이죠. 원초적인 문제이기에 더 해결이 쉽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가 결국 사회주의를 채택하지 않는다면, 자원의 ‘차등 배분’은 있을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차등 배분을 하느냐’의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우리나라는 그 기준이 ‘대학이라는 명분’이 되어 왔습니다.

제가 ‘명분’이라는 단어를 굳이 붙인 것은 실제 그 사람의 능력과 가치와는 상관없이, ‘대학’이라는 것은 그냥 ‘명분’만 제공해주면 되는 거라 생각해서입니다.

제가 ⌜내 인생, 내 마음⌟ 연재 번외편에서 한 번 언급을 했던 실험인데요. 한 번 더 설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최후통첩게임이라는 것을 진행합니다. 최후통첩게임이란 두 명의 사람이 자원 배분을 어떻게 하는지 알아보는 실험인데요. 한 사람은 제안자(A)가 되고, 다른 한 사람은 응답자(B)가 됩니다.

과학자는 제안자에게 10만원을 주고 일부 금액을 응답자와 나누어 가지라고 지시를 합니다. 응답자는 제안자가 제시한 금액을 보고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하면 됩니다. 응답자가 수용할 경우 제안자가 제시한 금액대로 나누어가지게 되고, 응답자가 불응할 경우 양쪽 다 돈을 받지 못하는 형태의 게임입니다.

이 게임을 진행해보면 대부분 5:5 ~ 6:4 (제안자 : 응답자) 정도의 비율로 자원배분이 일어납니다. 제안자가 극단적으로 9:1 정도로 배분하겠다고 하면, 응답자가 1만원이라도 받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불공정하다고 생각해서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응답자가 수용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범위 내에서 자원 배분이 결정이 됩니다. 그것이 5:5~6:4 정도가 됩니다.
 

사진_픽사베이


그런데 이 실험에서는 추가적인 설정을 하나 더하였습니다. 제안자와 응답자를 랜덤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시험을 보게 한 다음 점수가 높은 사람을 제안자로, 점수가 낮은 사람을 응답자로 배정을 한 채 실험을 진행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재미있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제안자와 응답자의 자원배분 비율이 7:3 정도로 수렴하는 현상이 보였습니다. 자원의 배분이 더 불평등하게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시험을 잘 본 것과 자원배분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 것이지요? 시험을 잘 보는 것이 자원 배분을 더 공정하게 하는 원인이라도 되는 걸까요?

당연히 시험 성적과 자원 배분 사이에는 그 어떠한 인과관계도 없습니다. 단지 명분만 제공해줄 수 있다면, ‘자원 배분’이라는 첨예한 문제에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이 실험이 알려줍니다.

우리 사는 세상의 ‘시험’과 ‘대학’도 이렇게 ‘자원배분의 명분’으로서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입시’ 문제를 ‘자원 배분’의 문제와 따로 접근을 하게 되면 아무런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대학 서열’이 ‘자원배분의 명분’으로서 계속 작동한다면, 결국 어떠한 입시 제도를 내놓아도 문제는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의 본질은 대학 입시 제도라는 수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 서열’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놓고 벌어지는 이전투구에 있으니까요. 이렇게 본다면, 결국 입시 문제는 대학 입학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인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의 본질이 하나 더 있습니다. 스카이 캐슬에 나온 교육열이 전통적인 부자들에게서는 상대적으로 심하지 않다는 것이 하나의 힌트가 됩니다. 그들은 이전투구에 낄 필요 자체가 없습니다. 어차피 부가 부를 낳는 상황에서 괜히 몸과 마음이 힘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 커다란 부를 제하고 남은 먹이를 가지고 이전투구를 하고 있는 것이 지금 현 입시 제도의 민낯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지지 못해 힘들다고 울부짖는 사람들에게 기득권은 말 한마디면 됩니다. 네 노오력이 부족해서이니 불만 갖지 말라고. 정작 노오력을 하지 않고, 그럴 필요조차 없는 사람들이 자신임에도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은 다시 작은 시장에 내던져져 자책을 하며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너무나 큰 시장이 이전투구의 장 밖에 있는 것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요.
 

사진_픽사베이


이전투구가 되면 될수록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는 더 도움이 됩니다. 사람은 시간적, 심리적 여유가 생기면 더 많은 것을 보려고 하니까요.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흙탕 속에서 ‘어떻게 하면 쟤를 이길까?’가 아니라, 같이 함께 진흙탕 밖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계속 시험을 자원배분의 명분으로 남겨두어야 할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결국 시험장은 개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진흙탕이고, 대부분의 자원은 진흙탕 밖에 개 주인이 가지고 있는 형국과 흡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고기 한 조각 더 먹겠다고 진흙탕 안에서 서로 싸울 게 아니라, 진흙탕 밖에 무엇이 얼마나 있는지를 보고, 진흙탕 안으로 더 많은 고기를 들여올 수 있다면 피 터지게 싸울 이유도 많이 줄어들 거라 생각합니다.

이 바깥세상에 대한 논의 없이, ‘너희들 어떤 규칙으로 싸울래?’라고 아무리 규칙을 바꾸어봤자 계속 진흙탕 싸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출발점은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결국 허공에다 헛손질하는 것과 동일하니까요.

그래서 지금까지 아무리 입시 ‘제도’를 바꾸어도 해결이 되지 않았던 것일 수 있습니다. 문제의 본질은 ‘진흙탕 안에서 싸우는 규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흙탕 밖’에 있었으니까요.

이 부분을 함께 논의할 수 있다면, 우리 아이들이 청춘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의미가 없는 곳에 소비하고 불행의 나락에 빠지는 것을 막아줄 수 있지 않을까요?
 

사진_JTBC


‘시간은 금이다’라는 진부한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시간’은 너무나 소중한 자원입니다. 게다가 청춘이라는 시간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제가 이어오는 연재 동안 계속 강조했던 것인데요. 그 소중한 시간을 자신의 마음 안을 들여다보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게 해 준다면 우리 아이들이, 그리고 그네들의 미래가 좀 더 행복하고 아름다워질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 현재 상황은 그러기에는 이전투구의 장이 너무 치열합니다.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 깊이 진심으로 전해봅니다. 제가 직접 겪어왔던 일이고, 지나온 시간 동안 후회되었던 일들이 인생 후배님들에게는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나 자신’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마음’이니까요.

스카이 캐슬 강준상 교수(정준호 분)의 입을 통해 제 진심을 전해봅니다.

 

강준상: 어머님은 도대체 언제까지 절 무대 위에 세우실 겁니까? 그만큼 분칠하고 포장해서 무대 위에 세워놓고 박수받으셨으면 되셨잖아요. 어머님 뜻대로 분칠하시는 바람에 제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근 50 평생을 살아왔잖아요.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겠다고. 여태 병원장 그 목표 하나만 바라보고 살아왔는데 그것 쫓다가 내 딸 내 손으로 죽인 놈이 돼버렸잖아. 병원장이 뭐라고. 그까짓 게 뭐라고. 내가 누군 줄 모르겠어. 허깨비가 된 거 같다고. 내가.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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