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어머니는 도대체 언제까지 저를 무대 위에 세우실 겁니까? 그만큼 분칠하고 포장해서 무대 위에 세워 놓고 박수받으셨으면 되셨잖아요. 어머니 뜻대로 분칠하시는 바람에 제 얼굴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도 모르고 근 50 평생을 살아왔잖아요.”

“여보, 당신 얼굴이 뭔데요? 어머니 아들, 예서, 예빈이 아빠, 내 남편, 주남대 교수, 그거 말고 당신 얼굴 뭐? 뭐가 더 있는데요?”

“강준상이 없잖아, 강준상이! 내가 누군지를 모르겠다고!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허깨비가 된 것 같다고 내가!”
 

인기리에 종영된 드라마 스카이 캐슬의 한 장면이다.

남부러울 것 없던 50세의 대학병원의 교수가 무너져 내린다.

학력고사 전국 1등, 유명 대학병원 주임교수이자 기획조정실장, 전교 1등 고3의 아빠, 더 바랄 것 없어 보이는 그는 왜 내가 누군지를 모르겠다며 울먹였을까.

 

인간은 혼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생산성을 위해 인간은 분업을 택했다.

자본주의 하에서, 생산성의 지속적인 증대를 위해 분업은 갈수록 세분화되어 왔다.

그 덕에 인류는 풍요를 누리게 되었지만, 개개인은 당장 혼자서는 생존에 필요한 식량조차 조달할 수 없게 되었다.

현대인은 살아남기 위해 타인에게 전문성을 요구하고 또 타인으로부터 요구받는다.

이제 개인이 자신의 역할을 해 내려면 고도의 전문적 직능이 필요하다.

각자가 자기 분야의 첨단에 서서 다른 사람들은 감히 해내지 못할 일을 해내도록 요구받는 것이다.

 

그렇기에 한 사람의 사회적 평가는 결국 그 사람의 사회적인 효용에 달렸다.

효용에는 희소가치의 개념이 포함된다.

그가 얼마나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가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그를 대신할 사람이 얼마나 드문가이다.

나를 대체하는 사람이 없을수록 수입과 명예가 늘어난다.

이에 사람들은 좀 더 특별한, 좀 더 드문 사람이 되려 한평생 공을 들인다.

 

세상은 이를 부추긴다.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스스로의 전문적인 직능에 몰두하라. 그리하면 직책, 찬사, 부가 주어질 것이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되묻는 이는 부적응자,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 패배할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이미 우리에게 부를 쌓는 것, 명예를 좇는 것, 남들이 보기에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은 당연히 좋은 것이자, 근본적인 삶의 원리이다.
 

사진_픽셀


이러한 암묵적인 압박은 ‘대학 가는 데나 집중하라’는 부모와 선생의 핀잔으로, ‘가정 챙기다간 여기 오래 못 남아 있을 걸’이라는 선배의 충고 같은 협박으로, ‘나이가 있는데 집은 좀 넓혀야 하지 않냐’는 걱정을 가장한 자랑으로 삶 도처에 전시된다.

오를 것이 눈앞에 보이면 오르면 되지, 그 나이 먹도록 아직도 그 간단한 원리를 깨닫지 못했냐는 한숨이다.

 

그래. 옳은 말이야. 그렇게 살아가면 되지.

실제로 흔하지 않은가? 성공, 부 어떤 성과를 위해 매진하고, 그에 따르는 보상을 삶의 의미로 삼는 사람들이.

노력이 부족하면 실패할 것이고, 충분히 성과를 위해 몰두한 사람들은 충만함 속에서 살아가다 생을 마감할 수 있겠지.

 

그런데 사람들을 바라보다 보면, 왠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성취에 실패한 이들,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한 이들뿐 아니라, 끊임없이 경쟁에 이겨온 사람들, 더 가질 것 없이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들도, 마치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겠다며 무너져 내린다.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회가 평가하는 그의 가치, 효용가치이지, 스스로가 정의 내린 자신의 정체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아 정체성(identity)은 스스로 생각하는 확고한 자기 자신의 상이다.

이는 절대적인 속성을 띤다.

시간이 지나도 불변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가치체계로 인해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엇을 먹을 때 기쁘고, 어디에 있을 때 홀가분하며, 누구와 함께 있을 때 감동하는지에 대한, 나만이 내릴 수 있는 답들이다.

결국, 하나뿐인 삶을 어떻게 채우고 싶은지에 대한 나만의 답이 자아 정체성이다.

당연히 옳고 그름이 있을 수 없고, 정체성이 확고한 이는 일시적이고 표면적인 찬사와 비난에 휘둘리지 않으며 자신의 길을 나아간다.

 

사회적인 요구에 부응하고자, 이를 테면 좋은 아빠, 믿음직스러운 아내, 유능한 직원이 되고자 하는 노력이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다만, 여기에만 몰입하다 보면 사회에서의 역할을 획득하는 것과 자신의 정체성을 동일시하게 된다.

‘아무개의 직업은 정신과의사’가 아니라, ‘정신과의사 아무개’가 되는 것이다.

 

되고 싶은 스스로의 모습, 살아가고 싶은 삶에 대한 섬세한 고민 없이는 자아 정체성, ‘내가 생각하는 나 자신’의 빈칸을 채울 수 없다.

직업이 무엇인지, 얼마나 가졌는지, 어떠한 명예나 권력이 있는지는 타인이 씌워준 꽃목걸이에 불과하다.

정체성이라는 빈칸을 오래 비워둘수록 자본주의가 조장하는 욕망, 사회적 필요, 가족의 기대 같은 타인의 답들이 이곳을 채울 가능성이 높아진다.

누가, 언제 썼는지도 모를 답들이 마음대로 쓰이다 보면, 그 결과물이 아무리 매력적이라 해도 스스로 쓰지 않았기에 낯설 수밖에 없다.

문득 거울에 비친 이 사람은 누구일까, 고민이 드는 것이다.

 

자아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그림 그리기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빈 캔버스처럼 하얗게 태어난 우리는, 살아가며 나 자신이라는 그림을 그 위에 그린다.

직업, 부, 명예 같은 것들은, 이를테면 붓, 물감, 지우개다.

조금 더 섬세하게 그리기를 도와주거나 예기치 않은 선을 깔끔하게 지워줄 수는 있지만, 그뿐이다.

그 자체로 그림은 아니다.

 

부모, 교사, 선배, 상사, 같은 체제에서 먼저 살아본 이들이 말한다.

더 섬세한 붓, 더 매끈한 캔버스, 더욱 미묘한 물감이 있다면 자랑할 만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어설픈 재료로 이내 잊힐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남들은 엄두도 못 낼 재료를 손에 넣는데 전력을 다해라.

 

삶이 흘러간다.

그림을 한 번도 그려보지 않은 소년은 배운 대로, 살아온 대로, 내 캔버스는 몇 평이야, 내 물감은 XX 브랜드야, 비교도 해 가며 열심히 도구를 모은다.

그에게 삶을 가르치던 이들은 죽음과 이별로 그의 곁을 떠나가다.

한 때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소년은, 최신형의 붓을 구입할 때의 쾌감을 위해 하루를 온전히 몰두한다.

이따금씩 텅 빈 캔버스를 바라볼 때의 공허함은 애써 무시한다.

괜찮잖아. 이렇게 내 캔버스가 넓은데, 이렇게 비싼 물감들이 가득한데.

그렇게 캔버스에는 하나의 선조차 그어지지 않고 그 곁을, 마치 그 자체가 삶의 의미인 것만 같은 값비싼 도구들만이 가득 메운다.
 

사진_픽셀


삶은 고객과의 상담이 아닌, 연인과의 영상통화 속에 있다.

TV 속 유명 맛집의 정찬이 아닌, 처음 끓여 본 된장찌개에 있다.

회식에서가 아니라, 요즘 유달리 어려운 친구와 부딪치는 소주 한 잔 안에 있고, 너른 평수가 적힌 집문서에 가 아니라, 처음으로 내 방이 생긴 아이의 웃음 속에 있다.

오늘까지 해내야 할 일들 보다는,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하고 싶은 일 속에 있다.

 

자신의 소명, 바라는 바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모두 허망하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알아차리려는 태도다.

지금 나아가는 길이, 한 번뿐인 내 삶에 후회가 없을 그 길인지.

배웠던 대로, 주변의 기대대로, 살아왔던 대로가 아닌, 지금 여기에서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이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돌아보며, 선택의 기로에서 다른 무엇도 아닌 나 자신을 믿고 나아갈 때, 비로소 캔버스에 색이 입혀지기 시작한다.

 

오늘부터 ‘나 라는 그림’을 그리자.

언제 기뻐하는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곁에 누가 있고, 누가 떠나갔는지, 좋아하는 옷은 어떤 것이고 싫어하는 스타일은 무엇인지, 어디로 떠나고 싶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오늘과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삶의 마지막 순간에 어떤 ‘나’이길 바라는지.

 

그렇게, 선이 유려하거나 구성이 화려하진 못하더라도 나만의 감성과 색채로 마음속에 나를 그려낸다면, 더 이상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울음은 짓지 않을 것이다.

대신 다른 이들은 눈치 채지 못할 옅은 미소를 지으며 진솔하게 말할 것이다.

그리 대단할 건 없지만, 이게 내 모습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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