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맥주를 사러 나간 그 잠깐이었죠.

맨체스터에 사는 사랑스러운 아내와 아이들을 가진 아버지 리 챈들러는 잠든 가족들이 따뜻하도록 난로에 장작을 넣어두고 20분 정도 거리의 편의점으로 출발합니다.

맥주를 사 들고 온 그의 눈에 비친 것은 불길에 삼켜지고 있는 자신의 집이었습니다.

다행히 소방관들은 1층에서 자고 있던 아내를 구해냅니다. 하지만 2층의 두 딸과 갓난아기인 아들은 그러지 못했죠. 타다 남은 잔해에서 소방관들은 아이들의 시신을 수습합니다.

그 잠깐이었죠. 리 챈들러라는 인간이 실질적으로 끝나버린 건.

 

마음이 부서져 본 적이 있나요?

주요우울증이나 외상후스트레스장애와 같은 진단명은 이러한 마음을 결코 다 표현해주지 못합니다. 이것은 병과 절망적인 현실이 뒤섞여 현실이 병을 만들고 병이 현실을 만드는 상태죠. 마치 실이 끊어진 마리오넷 인형처럼, 그는 어떠한 생각도 하지 못합니다.

머리가 멍해진 게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죠. 머리가 맑아지면 찾아올 가혹한 현실을 그는 견딜 수 없을 테니까요.
 

영화 <맨체스터 바이더 씨> 中


리는 자신의 고향 맨체스터를 떠나 낯선 도시 보스턴에서 잡역부로 살아갑니다. 오랫동안 영양실조에 있었던 사람이 뼈와 살가죽만 남는 것처럼, 그는 살아있는 게 아니라 단지 살아있는 흉내만 내는 껍데기만 남은 삶을 연명해갑니다.

그는 여전히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생의 기쁨을 구가하게 해주는 활력이나 삶의 의지가 아니라 한 때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를 움직였던 관성 같은 것에 불과합니다. 

생의 의미와 행복을 찾아야 할 그의 눈은 단지 공허한 공간이 되어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을 그냥 흘려버립니다. 그날 이후 그의 눈에서 눈물이 나오는 일은 결코 없었습니다. 생각과 감정을 차단한 그의 육체는 사랑과 기쁨 등의 긍정적인 감정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러다가도 간혹 마음 한 곳에 묻어버린 생각과 감정의 잔재가 수면 위로 떠올라 그를 미치게 만들 때면 그는 술과 싸움이라는 형편없는 방법으로 이를 해소했죠. 자고 일어나면 쌓여있는 눈을 무표정하게 치우는 그의 끝없는 작업처럼, 깨어있는 그에게 삶은 없었고 잠든 그에게 안식은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의 남은 유일한 가족인 형이 심부전으로 위독하다는 소식이 그에게 전해졌고 그는 급히 고향인 맨체스터로 향합니다. 리는 담담한 표정으로 일을 처리합니다. 늦게 도착한 그는 형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고, 땅은 너무 얼어서 시신은 봄이 올 때까지 냉동실에 보관됩니다.

리는 형의 유언장을 통해 알게 됩니다. 형이 자신을 조카의 후견인으로 지정해두었고 리가 자신의 사후 고향에 돌아와 살면서 가출해버린 자신의 부인 대신 조카를 돌봐주면서 살기를 원했다는 것을요.

그러나 마음이 망가져 버린 리는 고향에 머물며 새로운 가족을 꾸릴 자신이 없었고, 하나 남은 고등학생 조카는 방탕한 삶을 살며 사사건건 그와 부딪힙니다. 현실과 과거 모두 쉽지 않죠. 


조카 : 왜 묻을 수가 없어요?

챈들러 : 너무 추워. 땅이 너무 굳어서 봄에 매장할 거야

조카 : 그럼 그때까지 어떻게 하는데요?

챈들러 : 냉동실에 보관할 거야.

 

그가 고향에 도착하면서부터 영화는 현재와 과거의 장면을 교차하며 엮어갑니다.

리가 고향에 도착하면서 떠올리는 고통스러운 과거 이야기는 회상이라는 예고 없이 그냥 바로 진행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이 이야기가 전지적 시점이 아니라 리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임을 알게 됩니다.

영화에서 플래시백 기법으로 보여주는 과거 회상은 리가 그 시점에서 실시간으로 겪는 플래시백 증상 그 자체입니다. 그의 고통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었고 고향에 머물수록 그의 고통은 심해집니다.
 

영화 <맨체스터 바이더 씨> 中


어렸을 적 리를 잘 따랐던 리의 조카는 리만큼은 아니지만 마음이 부서져가고 있는 또 다른 영화 속 인물입니다.

그는 계속 잃기만 합니다. 정신이 건강하지 못했던 어머니는 일찌감치 집을 나갔고 이제 아버지마저 잃습니다. 후견인인 삼촌 리가 고향에 머물길 원하지 않아 이제 그는 행복한 추억의 상징인 아버지의 배와 그의 모든 인생이 담겨있는 고향도 잃을 처지에 놓입니다.

아버지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 친구를 바꿔가며 놀던 그는 끝내 냉동실에 있는 냉동닭을 보며 공황발작을 일으킵니다. 그가 아직 땅에 묻지 못한 아버지의 시신을 떠올렸음은 말할 필요도 없지요.

과거에서 떠나기를 간절히 원하는 리와 과거를 붙잡고 있기를 원하는 조카는 서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감독의 시선은 매정하다 할 만큼 담담합니다. 수첩에 적어서 간직할법한 명대사도 없고 반전을 통한 위로도 없죠. 이 영화는 인간의 고통을 담은 다큐멘터리라고 불러도 손색없습니다.

불행을 앞에 둔 등장인물들의 반응은 마치 현실과 같습니다. 형의 시체를 앞에 둔 동생은 대성통곡을 하는 게 아니라 말문이 막혀 당황스러워합니다. 주변 사람들은 도와줄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도와줄 방법을 찾지 못합니다. 오랜만에 만난 삼촌과 조카는 서로 서먹하고 대화는 서투른 캐치볼처럼 빗나갑니다. 고통은 불현듯 직접적으로 찾아오고 희망은 은유로만 희미하게 존재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고통을 다루는 이 영화의 방식에는 품위가 느껴집니다.

이 영화는 섣부른 위로와 비현실적인 희망을 던져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잿빛 하늘과 바다를 배경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두 남자의 뒷모습에는 가슴을 울리는 진정성이 느껴집니다. 힘든 일이 있을 때 누군가 보내온 예쁜 문자가 아니라 아무 말도 없지만 내내 함께 있어준 무뚝뚝한 친구와 같은 그런 시선이죠.

그럼으로써 픽션에 불과한 영화 속 리 챈들러의 비극은 그 픽션을 다루는 정중하고 품위 있는 방식을 통해 손에 넣습니다. 쉽게 잊히지 않을 진실함을요.

 

치유되지 않는 고통도 있습니다.

먼 미래에는 다를 수도 있겠지만 많은 정신적 고통들은 지금 당장 끝나는 게 불가능합니다. 사랑한다는 위로도, 넌 좋은 사람이라는 격려도, 정신 차리고 현재를 보라는 현명함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이런 일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곁에 있어주는 것뿐이죠. 그들의 절망과 슬픔을 같이 느끼는 내 마음이 답답한 나머지 성급하게 해결책을 던져주어 편해지려는 구원자로서의 욕망을 꾹 누르고요.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큰 상처가 되지 않도록, 위로하려는 말이 단지 자기만족이 되지 않도록 때가 될 때까지 참고 기다리면서요.
 

영화 <맨체스터 바이더 씨> 中


리는 형이 남겨준 총을 팔아 조카의 소원인 아버지의 배를 지켜냅니다. 조카와 오랜만에 기분 좋은 항해를 하고 돌아온 리의 눈에 약간의 빛이 돌아옵니다.

하지만 냉엄한 현실이 보란 듯이 찾아옵니다. 그는 예상치 못하게 그의 전 부인과 마주칩니다. 리와 함께 세 아이를 잃었던 바로 그녀죠. 그녀는 울면서 리에게 고백합니다. 그동안 너무 미안했다고. 아직도 사랑한다고. 하지만 마음이 아팠다고, 지금도 아프다고 말이죠.

그토록 애절한 고백과 용서에도 리는 괴로워합니다. 그가 자신 때문에 아이를 잃은 전부인 앞에서 얼마만큼 괴로워하는지 영화는 말이 아니라 표정으로 보여줍니다. 눈물도 흘리지 못하고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말을 더듬으면서 자리를 피해버리는 리의 모습을 통해서요. 그리고 다음 장면, 리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술에 취해 술집에서 싸움판을 벌입니다. 그는 달라지지 못했죠.

 

그는 새로운 가족과 함께하는 것도 실패합니다. 결국 리는 조카를 친구의 집에 입양 보내고 자신은 다시 보스턴으로 돌아가기로 합니다.

조카는 그동안 몰래 연락하고 있던 어머니를 만나러 갔지만 술을 끊고 독실한 신앙인이 되어 새 사람이 된 어머니의 옆에 아들의 자리는 없었습니다.

있을 곳을 찾는데 실패한 삼촌과 조카는 한 테이블에 앉습니다.

여기서 같이 살면 안 되냐는 조카의 애원에 리는 말합니다. 도저히 안 되겠다고. 도저히 견딜 수 없다고 말이죠.

언젠가 리가 자신의 고통을 끝내고 다시 돌아올 수도 있겠죠. 하지만 지금 리는 고통에 버티는 게 고작입니다. 
 

영화 <맨체스터 바이더 씨> 中


영화 ‘맨체스터 바이더씨’는 주인공 리 챈들러가 고향 맨체스터에 돌아와 겪는 고통과 플래시백, 그리고 이들을 극복하는 데 어떻게 실패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영화는 고통의 해결을 바라는 전지적 시점의 관객의 욕구에 부응하기보다는 등장인물의 심적 고통 그 자체를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이를 통해 우리에게 그 어떤 영화보다도 진실한 위로를 건넵니다.

왜냐하면 영화 속에서 그려낸 정답을 알면서도 고르지 못하는 마음, 기대를 알면서도 부응하지 못하는 나약함, 끊임없이 따라붙는 극복할 수 없는 과거의 기억은 우리의 현실 자체니까요.

그려낸 고통의 묘사가 정성스럽고 섬세하기에 은유적으로 존재하는 희망은 더없이 와 닿습니다. 마치 오랫동안 힘든 시절을 함께 해준 친구가 정말 힘들고 어렵게 꺼낸 진솔한 한마디가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미사여구보다도 더 내 마음을 감싸안듯이요. 

 

겨울이 지나 봄이 되고 얼었던 땅도 조금은 녹아 냉동고 속의 형의 시신은 비로소 땅에 묻힙니다. 리의 전처가 낳은 아이는 아직은 추운 날씨에 칭얼댑니다. 리는 새로 얻은 보스턴의 아파트에 여분의 방을 마련하기로 합니다.

언 땅은 녹고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리의 마음에는 아주 조그마한 공간이 생겼습니다. 언젠가 찾아올지도 모를 조카를 위한 공간이죠.

삼촌과 조카는 여전히 구부정하게 땅을 보고 걸어가며 티격태격 하지만 형이 남겨준 배 위에서 낚시를 하는 둘의 모습을 보면, 둘은 함께 하면서 아주 조금은 서로를 이해한 듯합니다. 

 

마음이 부서져 본 적이 있나요?

그런 시기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단지 숨만 쉬며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칠 테죠. 차라리 이 무너진 마음이 다행이라고 생각될 만큼 버티는 게 고작인 그 시기에는 어떤 위로도 격려도 소용이 없죠.

돕고 싶지만 아직 당신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모르겠어요. 돕고자 하는 마음이 약해진 당신을 더 다치게 할까 봐 두렵기도 하고요.

지금은 어떠한 말로도 위로가 될 수 없겠지만 일단 함께 기다려 보기로 해요. 당신의 고통을 보는 내 마음이 아프다고 하더라도 결코 당신의 고통을 함부로 다루지 않을 거예요. 내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 당신에게 가벼운 위로와 해결책을 들이대고 어깨를 흔들며 재촉하지도 않을 거고요.

위로는 내 마음을 가볍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감싸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오래 참고 그렇게 오래 고른 소중한 말들만이 남아 부서진 마음과 끝까지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당신의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분당서울대병원 전임의
(전) 메디플렉스 세종병원 정신건강의학과장 치매전문센터장
저서 <약한 게 아니라 아팠던 것이다>, <이제 독성관계는 정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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