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착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 진실된 사랑은 행복을 준다. 노력 끝에는 결실이 있다.’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서 사실로 인식하는 문장의 예이다.

어린 시절 우리는 이러한 글들이 참임을 교육으로, 경험으로 체득한다.

가정과 학교는 이러한 기본적인 사회의 준칙을 학습하기 위해 잘 설계된 훈련장과 같다.

보상과 처벌을 통해 사회의 기본 원리는 그렇게 되어있다고 우리의 마음속에 암묵적으로 주입된다.

 

그런데 혹시 ‘세상이 어디 그렇게 되어 있나?’라는 힐난이 떠오르진 않으셨는지.

현실은 도덕 교과서와 다르다.

이별의 아픔은 사랑이 깊었을수록 크다.

기쁨은 노력의 순으로 주어지지 않고, 애초에 노력이 필요 없는 이들도 너무 많다.

착하다는 말이 순박함을 넘어 어수룩함을 폄하하는 단어로 쓰이기도 한다.

당연히 믿어왔던 명제들이 현실 속에서 부정되는 경우를 목도할 때, 우리는 삶이 모순된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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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고교 때까지는 나름대로 체득한 원리에 충실하며 지냈다.

달리 말하면 삶에 크게 모순이 없었다.

꽤나 노력했었고, (지금 생각하면 상당 부분 운과, 감사한 환경에 기인한 것이지만) 만족할만한 성적, 좋은 이들과의 친밀함을 유지했다.

주어지는 기회와 권리들은 노력의 결과일 뿐이라 생각하니 삶이 참 단순했고, 삶을 바라보는 시선도 참 편안했었다.

 

그에 비해 20대는 배신하는 믿음의 연속이었다.

가까이로는, 흔하디 흔하지만 내게는 결코 찾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이별을 경험했다.

매일을 강의록, 프린트 물과 씨름하는 동안 모 고교 동창이 불법 도박 사이트를 운영하며 떼돈을 벌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뉴스를 틀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교묘히 진실을 호도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가득했다.

그 당시엔 누구나 그랬지만 우직한 친구들이 유달리 취업이 되지 않아 힘겨워했다.

 

혼란하다기보다 불안했다.

이렇게 사는 게 맞다고 믿고 살아갔는데, 그 믿음이 자꾸 배반한다.

생각하던 삶의 원리 끝에는 원하던 삶의 모습, 행복이 있을 거라 굳게 믿으며 살아왔는데, 그 믿음이 자꾸 흔들린다.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초조했다.

 

 

수용전념 치료적 관점은, 마음의 고통의 원인 중 하나로 언어에 주목한다.

언어는 우리가 삶을 이해하는 통로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경험을 한다.

그 경험은 내게 행복을 줄 수도, 슬픔을 줄 수도, 아무런 감흥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

개체는 행복을 지향하고 슬픔을 지양한다.

좋은 것을 다시 경험하고 싫은 것을 피하는 방법으로 동물과 달리, 인간은 자신의 경험을 언어를 통해 정리하고 반추한다.

 

그런데 언어는 영구적이고, 또 명료한 특성을 지닌다.

한 번 마음속에 언어적으로 자리 잡은 가치관은 명쾌하며, 오래도록 지속된다.

이러한 특성은 애초에 모호한 것을 기술할 때, 이를 테면 살아가는 이유, 삶이 이루어지는 원리를 설명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빨간 신호등에 길을 건너는 것은 위험하다.’

이 문장은 사실에서 크게 위배되지 않고, 우리의 생존에 큰 이득을 제공한다.

언어라는 도구를 통해 이렇게도 명료한 명제를 한 번 체득한 인간은 평생 그 준칙을 준수한다.

 

하지만 이러한 언어의 특성은 사실 명제가 아닌 당위 명제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혼란을 일으킨다.

앞서 언급한, ‘착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 진실한 사랑은 행복을 준다. 노력 끝에는 결실이 있다.’와 같은 문장들은 그렇고 아님의 문제가 아니라, 그래야 한다, 그랬으면 좋겠다의 문제다.

그렇지만 이러한 문장들도, 명쾌하고 영구적인 언어의 특성에 따라 사실로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

문제는, 현실이 이러한 명제들을 수없이 배신한다는 것이다.

착한 사람은 자주 이용당하고, 진실된 사랑의 끝에도 자주 이별이 찾아오며, 결실을 이루지 못한 노력도 수없이 많다.

그리하여 우리는 노력의 배신에 좌절하고 사랑의 배신에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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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률 통계의 태동은 도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사고의 중심이 신에서 인간으로 옮겨오던 근대 초기, 도박사들 역시 이성의 힘으로 다음에 나올 주사위의 눈을 완벽히 예측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자본력과 수학자들의 지성으로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지만 이러한 생각은 이내 벽에 부딪힌다.

주사위를 던지는 악력은 물론이고 가깝게는 방 안에 부는 산들바람부터 멀리는 태양의 중력, 그날의 온도와 습도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변수가 주사위의 눈을 결정하는 데 작용하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결국 학자들은 백기를 든다.

주사위의 눈은 예언할 수 없다.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눈이 나온다는 법칙도 찾을 수 없다.

다만 어떤 눈이 나올 확률을 1/6로 예측할 따름이다.

그것도, 던질 때마다 모든 외적인 조건이 통제되었다는 전제 하에.

당시에 읽고 아 그렇구나, 넘겼던 이 꼭지가 요즘 따라 자주 떠오른다.

아, 이게 인생이구나 하고.

 

생각보다 삶은 명료하지 않다.

우리가 삶의 모순이라고 믿었던 것은, 실은 과거의 삶으로부터 도출해낸 어떤 결론이 현재에는 들어맞지 않는 것에 불과하다.

10여 년 전, 1년 전까지가 아니더라도, 한 달 하루 전의 나의 삶조차 오늘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사소한 생각, 경험에 작용하는 변수들은 무궁무진하여 모두 예측하기란 불가능하다.

삶의 어느 시점에 정의 내린 삶의 원리가 앞으로도 모순 없이 들어맞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된 요구일 수 있다.

이는, 어제 주사위의 눈이 1로 나왔으니 오늘도 그럴 것이라 믿는 것과 같다.​

 

삶은 본디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지 않다면 구태여 고민하거나 슬플 이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언어로 된 수많은 당위 명제들의 틀을 벗어나 바라보면 삶이 원래 모순의 덩어리라는 것과, 그에 따르는 슬픔도, 불안도, 절망도 우리의 일부였음이 보인다.

 

수많은 세상의 부조리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의 가치관과는 상관없이 삶이 그렇게 이루어져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의 가치, 신념들을 모두 의미 없는 것으로 내려놓아 버린다면, 나는 타인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마리오네트가 되거나 일시적인 쾌락만을 좇아 그때그때 생각을 맞추는 하이에나가 될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사랑에 상처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된 사랑을 추구한다.

취업의 실패, 시험의 탈락, 노력에 어긋나는 현실에 좌절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난다.

사기 치고 기만하며 개인의 이득만을 좇는 사람들이 가득하더라도, 함께 하는 행복을 믿고 따뜻한 마음을 추구한다.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다 보면 필연적으로 모순과 마주하게 된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수용’하면, 오히려 나아갈 길, 내가 믿는 가치를 위해 ‘전념’할 길이 보인다.

 

성적에 맞추어 학과를 정했지만, 항상 자유롭고 배고픈 작가의 삶을 동경했었다.

애초에 모든 적성검사의 결과도 어문학을 가리키고, 아무도 찾지 않는 초중학교의 도서실을 찾는 전형적인 문돌이였지만 취업 걱정에 이과를 선택했던 터다.

차선으로 의학도로서의 이상, 의사로서의 사명감을 품었지만 일과 사람, 현실에 치여 좌절하기도 했다.

 

마음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며, 다시금 읽고 쓰는 것으로 마음을 나누는 것에 대한 향수가 피어올랐다.

세상은 모순으로 가득하지만, 세상에 맞추기 위해 내려놓았던 꿈을 나만의 형태로 다시 집어 드는 것은 나의 자유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게 끄적이기 시작한 글이 쌓인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있고 과분하게도 함께 마음을 나눌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비록 세상은 모순으로 가득하지만 삶은 조그만 가치를 품고 살아볼 만하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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