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박종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불법촬영의 피해자들의 고통을 나는 누구보다 많이 접한다. 개인적으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하고 악한 행동이 불법촬영과 그 유포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사회적 살인이며 인격 살인이다. 또한 이 살인은 매일 반복된다. 끝도 없이.

불법촬영의 고통은 흔히들 말하는 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의 수준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PTSD 환자들 역시 다시 그 사고가 일어날까 봐 두려워하며 재경험, 과각성, 예기불안의 고통을 겪지만 실제로 자신이 당한 사고를 매일 반복해서 겪지는 않는다.

하지만 불법촬영의 피해자들은 어떠한가? 나의 가족, 친구들, 직장, 모든 인간관계와 일상이 파괴되고 짓밟힌다. 직장, 학교, 식당, 길거리, 그 어디에도 마음 편히 갈 수 없다. 모두가 나를 알아보는 것 같아서, 모두가 나에게 손가락질하고 수군거리는 것 같아서. 집에서는 편하게 쉴 수 있을까? 혹시나 내 영상이 올라와 있을까 봐 인터넷도 할 수 없다. SNS도 마찬가지이며 전화벨만 울려도 긴장하게 된다. 피해자가 죄인이 되는 기막힌 상황이다.
 

사진_shutterstoc


정x영 사건을 보고 우리가 느껴야 할 점이 있다.

 

1. 피해자가 누구일지 궁금해해서는 안 된다.

집단 관음증과 가학성, 잔인한 호기심은 수많은 이차 가해자들을 양성한다.

'그 연예인이 누구래? 걸그룹 A 가 맞아? 왜 찍었대?'

부끄러움도 모른 채 우리는 이런 말들을 내뱉는다. 자연스럽게 똑같은 가해자가 되는 것도 모르는 채, 정x영을 욕하면서도 그가 그러했듯 단체 대화방에서, SNS에서 여성을 인격체가 아니라 성적대상화시키고 희롱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그 영상 어떻게 구할 수 없어?'라는 사람들의 의식 및 도덕 수준은 정x영에 비해 그리 나을 것이 없다. 이런 사건은 예전에도 여러 번 있었다. 우리는 그때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는가에 대한 본질이 아니라 영상에 찍힌 여성의 신원을 더 궁금해했다. 그래서 이런 일이 자꾸만 반복되는 것이다.

 

2. 피해자는 누군가의 딸이고 동생이었다.

우리는 처음 이 사건을 접했을 때 그저 분노해야 옳았다. 젊고 매력적인 연예인이 자신의 인기와 능력, 자기애적 전능감에 취해 다수의 여자들을 교묘하고 잔혹하게 희롱한 것. 불법촬영한 영상을 동의 없이 타인에게 유포한 심각한 범죄라는 것. 당사자의 저열한 인성과 추잡한 사생활이야 논외로 치더라도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엄중한 법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피해자들이 일반인이냐, 연예인 누구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녀들은 모두가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었고, 친구였다. 모든 남자들은 소년의 순수함과 정욕과 쾌락의 노예, 양면적인 모습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똑같지만 자신의 본능과 자제력, 욕망의 밸런스를 조절하는 통제력의 여부가 남성과 짐승을 구별하고 인성을 판단하는 기준점이 된다.

남자들은 단톡방에서 연예인이나 일반인을 대상으로 저열한 농담과 성희롱을 일삼다가도 절대로 자신의 여동생이나 누나, 첫사랑에 대한 언급은 서로 금기시한다. 한 친구가 실수로라도 언급하면 정색하며 죽일 듯이 화를 내고, 공개적으로 '그건 아니지... 선을 넘었다, 어떻게 가족을 건드리냐'며 비난받고 배척당한다. 이러한 컨센서스와 이중성의 모순은 참 우스운 일이다. 자신의 가족만 소중하고 다른 이의 가족은 그렇지 않다는 말인가.

 

3. 더 중요한 사건을 덮기 위한 프레이밍이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항상 그래 왔듯이 연예인의 스캔들이 터질 때는 항상 정재계 인사들의 비리를 덮기 위한, 관심과 화제를 전환하기 위한 전략적 노출이었다. 하지만 버닝썬으로 시작된 승x, 정x영과 그 지인들의 스캔들은 단순 연예인의 추한 일면을 넘어, 경찰의 고위직까지 연루된 gang formation, 마치 마피아나 야쿠자들을 연상하게 하는 한국형 범죄 카르텔에 부합하는 모습이다.

우리가 그동안 신세계나, 베테랑 등의 수많은 범죄와 비리영화에서 보아온, 설마 저 정도까지 썩었겠어하는 상상이 무색할 만큼 현실은 이미 영화를 넘어섰다. 이 스캔들은 더 이상 다른 비리의 가림막 수준이 아니라 자체만으로도 국민 대부분의 분노와 연예계 전반에 대한 회의감을 유발한다.

우상화했던 아이돌의 추악한 실체를 마주한 허무감이야 이전에도 경험한 적이 있었지만, 허탈감과 배신감의 강도와 파급력이 이토록 강렬했던 적은 없었다. 사건의 전말이 아직 다 드러나지 않았음에도 이러할진대, 그 실체와 진상이 이젠 두려울 지경이다. 누군가의 사주나 프레임 전환 등의 단어로 이 스캔들의 추악함과 심각성이 폄하되어선 절대로 안된다.   

 

4. 모두가 공범자다.

가해자들과 단톡방에서 영상을 공유한 사람, 그들의 지인들뿐 아니라 모든 남성들, '나 누구누구랑 잤다, 꼬셨다'를 자랑처럼 내세우는 게 마치 수컷의 우월한 상징처럼 여겨지는 문화, 사회 자체가 공범이다. 어쩌다 이토록 성희롱에 너그럽고 무덤덤한 나라에 살게 되었을까.

언제부턴가 우리는 서로에게, 정치인과 연예인에게, 사회에게 성숙함과 도덕심에 대한 기대를 접고 포기하게 되었다. 존중과 존경은 사라졌고 인터넷 댓글에서, SNS에서 대중이라는 큰 익명성에 숨은 채 자신의 미성숙한 욕망을 드러내고 분출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우리 모두가 공범자인 것이다.

자신의 사소한 나쁜 습관과 말실수부터 주의하고 조심하는 통렬한 깨달음과 반성이 없다면 우리는 머지않아 비슷한 사건을 또 마주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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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연세봄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신촌세브란스병원 전공의
전) 서울대병원 본원 임상강사, 삼성전자 부속의원 정신과 전문의
현) 신촌 세브란스병원 정신과 외래교수, 연세대 의과대학 정신과학교실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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