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춘기와 입시의 스트레스가 겹쳐 세상이 예쁘게만 보이지 않던 고등학교 시절, 긍정적이란 말이 싫었다. 한 문제 차이로 인생이 달라질 (것이라 믿었던) 냉혹한 현실 앞에서 그저 잘 될 거다, 괜찮을 거다,란 말이 공허했다. 좋은 말로 스스로를 안심시키기보단 영단어 하나를 더 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다. 긍정은 부정을 애써 부정할 때만 유용한 것이란 애처로운 생각도 들었었다.

기억에 남는 한 친구, 그에 비해 참 태평했었다.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 ‘뭐 어쨌든 잘 되지 않을까?’였다. 흔한 ‘잘 될 거야’란 말 아래 으레 숨어있는 잘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두려움, 초조감 가득한 억지 확신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톤이 달랐다. 이왕이면 잘 되는 게 나으니 그렇게 되지 않을까? 정도의 느낌이었다. 당연히 근거는 없는데 어딘지 모르게 힘이 느껴졌었다. 잡히지 않는 미래 때문에 시시각각 불안하던 나로서는 그 편안함이 부럽기도 했고, 그 이상으로 의아했다.

하루는 물어보았다. 갈 대학이 결정된 것도 아니고, 너나 나나 고만고만한 집안 사정에 딱히 믿는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마음이 편안한지. 심드렁한 대답이 돌아왔다. 점수야 한 만큼 나오겠지 뭐. 그건 내 맘대로 안 되는데 생각이라도 내 맘대로 하는 게 낫지 않아?
 

사진_픽셀


‘자기 자신을 긍정하자, 긍정적으로 삶을 바라보자’는 말은, 실은 부정적인 내 모습이 먼저 떠오를 때 반대급부로 잘 떠올리는 말이다. 나와 내 삶은 이렇게 부족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좋게 바라보자, 믿어보려 노력하자는 뜻으로 긍정이란 단어를 곧 잘 사용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은 더욱 부정적인 생각에 빠져든다. ‘지금 내가 이렇게 못난데, 오늘 내가 이렇게 힘든데, 긍정? 어차피 정신승리 아닌가?’ 잠깐의 희망찬 생각으로 덮어질 만큼 삶의 고민은 만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긍정이란 단어를 찬찬히 돌아보면 의외로, 이왕이면 좋게, 좋지 않은 것도 억지로 괜찮게 바라보자는 의미는 아니다. 긍정은 한자로 옳이 여길 肯, 정할 定 자를 쓴다. 옳이 여길 긍 에는 즐기다, 들어주다 의 뜻도 있다. 찬찬히 들어주고 충분히 이해해서, 옳을 수 있겠다, ‘그럴 수도 있겠다.’고 여기는 것이 긍정이다.

 

살다 보면 참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태어나서 모든 일이 마음먹은 대로만 되었다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누구나 마음속에 하나쯤 좌절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지금의 내 모습이 나의 바람보다 차고 넘친다는 사람보다는, 이상에 비해 너무 부족하다는 이가 더욱 많을 것이다.

지금의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것은 현실에 안주하는 것으로, 안주는 도태로 이어진다는 두려움이 우리의 마음 아래 자리 잡고 있다. 집을 구하기는커녕 월세도 버겁고, 취직은 까마득하기만 하고, 사랑도 마음대로 안 되고 뭐 하나 잘난 것도 하나 없는데 그래도 삶은 괜찮은 거야 생각해 버리면, 앞으로도 지금처럼 그저 그런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오늘의 형편없음을 충분히 되새기고, 스스로를 부정하며 노력해야 살림살이가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그렇게 마음을 채찍질한다. 오늘을 받아들이는 것과 오늘의 고통이 이어질 것이란 두려움이 연결되어, 마음은 끊임없이 긍정보다는 부정을 향한다.

지금의 내 모습을 ‘긍정’ 해 버리면 더 이상 발전이 없지 않을까, 여기서 내 삶이 멈추는 것은 아닐까, 뒤처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의 근원을 거슬러 오르다 보니, 마음 안에 행복할 자격을 상정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예컨대 건강, 지나친 경제적 제약이 없을 정도의 부, 단란한 가정, 그 정도의 목표에는 도달해야, 적어도 그 정도는 되어야 진짜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한 상태에 닿기 전엔, 나는 여전히 미완성이며 아직 행복할 권리를 획득하기 전이였다. 그러므로 오늘의 고통은 내일의 행복을 위한 것이 되고, 지금 찰나의 즐거움을 과감히 포기하고 그 상태로만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삶은 끊임없는 자기 부정과, 이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의 연속이 되었다.

 

세상은 소수의 그럴듯한 성공에 갖은 찬사와 보상을 선사하지만, 그 반대급부로 미흡하다고 여겨지는 결과물에는 충분히 성실하지 못해서 그렇다, 능력이 모자라서 그렇다, 진심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라며 부적절하고 부정적인 프레임을 덧씌운다. 타인의 시선을 제쳐두고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 스스로 이해하지 못할 자신의 모습은 의외로 적다.

사회적인 찬사가 주어지는 이유는, 그것이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취방으로 아파트를 턱턱 내어주는 대학생도 간혹 있지만,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20대 청년이라면 월세가 버거운 것이 당연하다. 처음부터 운명 같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평생을 함께하는 이도 있지만, 끊임없이 사랑으로 마음 아프고 상처 받는 것도 일반적인 일이다. 전체 근로자의 상위 8분위 소득을 받는 중소기업 직공조차 사회적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남들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는 직장을 구하는 것은 당연히 너무 어려운 일이다.

 

좋고 나쁨의 평가,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당위를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하나하나 되돌아보면 스스로를 그럭저럭 이해해 줄 수 있다. 비록 세간의 기준에 미흡해 보일지 몰라도, 오늘의 나는 나의 최선이었다고.

긍정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보자. 충분히 들어주고 이해해서 그럴 수도 있겠다고 여기는 마음이었다. 야속하게도, 세상은 지극한 평범함을 두고 괜찮다, 그럴 수도 있겠다고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아직 대단하진 않지만, 그럴듯하다고 하기엔 모자라지만 오늘까지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 실패도 있었고, 세상에 데고 상처 받았으나 얼마나 사랑했었고, 또 얼마나 울었으며, 얼마나 진심으로 삶을 고민했는지. 아직까지 내 삶은 미흡하다. 그래 아직까지는, 그럴 수도 있겠다.

오늘의 나를 부정하고 냉정히 독려한다고 해서 갑자기 잘생겨지거나, 돈이 많아지는 건 당연히 아니다. 마찬가지로 스스로에 대한 채찍질을 멈추고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고 해서 모자람이 더욱 심해지거나, 삶이 정체되는 것도 물론 아니다. 미흡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원하는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다고 해서 구태여 부정하기보단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봐줘도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달라질 건 없다. 스스로를 부정하는 마음으로 굳이 옥죄지 않아도,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나아가기 위해 오늘도 노력할 것이다.

인생은 길다. 삶이 긴 이유는 처음부터 모든 걸 갖춘 채 살아가기보다, 살아가며 나 자신을 차근차근 채워보라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사진_픽셀


문득 친구의 말이 생각난다. 세상의 기준은 높기만 하다. 그에 비해 오늘의 내가 아직 부족한 건 어쩔 수 없다. 때로 밉기도 하지만 지금의 나, 나의 삶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니 생각이라도 편하게 해 보자. 어쨌든 이것이 나다, 진심으로 살다 보면 좋은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오늘의 나를 ‘긍정’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조금 스스로를 인정하고 이해해 준다고 해서 다 놓아버릴 수 있을 만큼 삶의 과제들은 만만치 않기에, 우리는 어차피 열심히 살거나 고뇌할 것이다. 그저 한 번만 돌아볼 수 있다면 충분하다. 나와 내 삶, 그럴 수도 있겠다며 긍정한다면 미우나 고우나 이것이 내 삶이라고 스스로를 쓰다듬는 한 마디, 이 삶을 살아가는 나 자신에게 고생 많다고 진심 어린 위로 한마디 건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첫 취직을 할 때쯤부터 고향 친구들과 계모임을 시작했다. 누구는 모태 부잣집 자식이고, 누구는 부모 없이 자수성가했다. 직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박사를 따고 연구원을 하거나 국밥집의 대를 잇거나 한다. 평생을 화려한 솔로로 남겠다던 친구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했고, 다시 홀로 된 친구는 외로운 해방감을 즐긴다. 이른 나이에 애를 낳은 녀석은 예전엔 고생이 안쓰럽더니 아이들이 크고는 되려 여유를 자랑한다.

애나 어른이나 친구들이 모이면 똑같다. 밥 먹고 뭘 할까, 스크린 야구를 칠까 맥주를 한잔 더 할까 고민한다. 두 시간 남짓 치면 1차 식비 정도는 나오는 야구비가 그리 걱정되지 않을 땐, 우리 그래도 꽤 열심히 살았구나 속으로 생각한다. 너와 나의 삶에 맞고 틀림은 없다. 미주알고주알 넋두리를 나누다 보면 그래, 그럴 수 있겠구나, 너도 나도 그렇게 살아가는구나, 그렇게 긍정하며 위로를 나눌 뿐이다.

당신과 내가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면, 아마도 역시 서로에게 그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셨군요. 그래요, 그럴 수 있겠군요. 그럴만해요. 그러니 괜찮아요.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