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초등학교가 아직 국민학교이던 시절, 귀갓길에 OO 상회라는 분식집이 있었다. 어묵을 나무젓가락에 꼬불꼬불 꽃아 튀긴 ‘디스코 오뎅’은 100원, 그냥 핫도그는 300원, 네모난 감자튀김이 도깨비방망이처럼 붙은 ‘못난이 핫도그’는 500원, 지금 돌이켜보면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를 그때 체득했던 것 같다. 맛있고 인기가 있을수록 비쌌고, 비싸서 쉽사리 먹을 수 없는 것들은 왠지 더 탐이 났다.

냉정히 돌아보면, 어릴 적 고향 동네는 빈촌이었다. 미담으로 회자될만한 가난 극복담은 없다. 그저 집에 상당한 수준의 빚이 있음을 어린 마음으로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고, 물건을 살 때 100원 단위로 고민을 해야 했고, 급식비 통지서나 각종 회비 고지서를 내밀 때면 왠지 신경이 쓰이는 정도였다. 요즘과는 달리 그땐 없다고 창피해하거나 있다고 재는 것은 오히려 어색한 시기였다. 주위를 둘러봐도 다들 고만고만하게 조금 더 가지거나 형편이 힘들거나, 그랬다. 그래서 아이들은 대개 100원짜리 디스코 오뎅을 사 먹었다.

튀기는 데 오래 걸리는 핫도그는, 한 입에 다 들어가지만 애써 세 번을 나눠먹던 어묵 튀김을 다 먹을 때쯤 겨우 나왔었다. 함께 하교하는 아이들이 대여섯이라 하면 핫도그를 먹는 부유한 친구는 없거나, 간혹 한 명 있었다. 핫도그는 어묵과 달리 꽤 커서 이를 주문한 아이는 으레 몇 입 먹고 친구들에게 두루 나눠줬다. 평소 맛보기 힘든 물건이라, 속의 조그만 소시지를 너무 많이 베어 물지 않도록 조심조심 나눠 먹었다. 참 맛있었고, 부러웠다. 매일 그 맛을 볼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맛있는 것을 두세 입 맛보고는 친구들에게 당연한 듯 양보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부러웠다.
 

사진_픽셀


독일의 정신의학자인 알프레드 아들러는 1907년 저서 ‘기관 열등성과 심적 보상의 작용’에서 ‘사람은 신체적 기관의 결함이나 자신의 열등감을 보상해 줄 수 있는 삶을 추구한다.’고 주장했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삶의 양상을 은연중에 흔히 감지한다. 가난이 사무친 사람이 자수성가를 위해 매진한다거나, 무학이 한이 된 어머니가 자식의 교육을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는 경우 등, 이에 대한 예를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열등감은 소수의 부족한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일까. 타인에 비해 뒤떨어졌다거나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감정인 열등감의 기준은 상대적이다. 미흡하다는 것은 어떠한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며, 열등감에 관하여서 그 기준은 사회의 ‘평균’이 된다. 재벌만큼 돈이 없어서 발생하는 열등감은 드물다. 사회가 요구하는 평균 지점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강한 열등의식을 부른다. 그래서 열등감은 보통 ‘그래도 이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이만큼도 안 되는구나.’라는 형태를 띤다.

그러나 삶에서 열등감을 불러일으키는 기준과 변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고, 사회가 요구하는 평균의 기준은 생각보다 엄정하다. 생리 활동과 거동에 무리가 없는 건강, 안정적인 생계를 꾸릴 수 있는 경제력, 관심 가는 이로부터 호감을 끌어낼 수 있는 외모, 또래의 사회인으로부터 무시받지 않을 만한 수준의 자산, 그리고, 그리고 ... 평균에 평균을 중첩하다 보면, 나의 모든 특질이 그 안에 포함되기란 매우 까다로운 일임을 이내 깨닫게 된다. 하나둘 쯤의 이유로 열등감을 품는 것은 의외로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들러의 수제자였던 W. 베란 울프는 그의 저서 ‘How to be happy though human’에서 열등감에 대한 더욱 근원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 ... 하지만 인간의 아기는 어떤가. 젖병을 인식할 수 있게 되더라도 그곳까지 가서 스스로 먹을 수 있게 될 때까지 한참 시간이 걸린다. 아기는 뭔가 불쾌한 일이 있으면 울기 시작한다. 아기가 원하는 것이 충족되느냐 아니냐는 오로지 부모나 유모의 선의에 달려 있다. ...

... 인간의 아이는 다른 어떤 동물의 새끼보다 의존성이 높다. 문명이나 문화의 발달과 함께 이 의존의 시기가 점점 더 길어져, 오늘날의 도시 문명 속에서 인간은 유년기와 청년기, 성인기 초기를 거쳐야 겨우 사회의 독립된 구성원으로 생활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 그 사실은 바로 인간은 자신의 부족함을 경험하는 유일한 생명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

... 즉 자연이 마이너스를 보상해 두 배의 플러스로 대치시켜 준다는 생각이 옳다면, 인간은 열등감에 대해 중요한 보상작용을 경험해왔을 것이다.’

(아들러의 격려, W 베란 울프, 박광순 역, 2015, 생각정거장 中)

 

생의 첫 시기를 완전한 약자로 보낼 수밖에 없다는 것은 모든 인간의 공통된 숙명이다. 젖을 먹고 배변을 해결하는, 생존의 최소한의 조건마저 타인에게 온전히 맡겨야 한다. 홀로 첫걸음을 떼기 위해서만도 수도 없는 좌절을 경험한다. 열등감의 뿌리가 될지도 모르는 이러한 원초적인 좌절감은 소위 ‘금수저’에게도 공평하다. 조금 더 많은 여유, 편안한 환경에서 태어나는 사람은 있지만, 태어나자마자 걸을 수 있도록 운명 지어진 사람은 없다.

이에 더해 우리는 가슴 아픈 일들, 가족을 포함하는 주변 환경, 질병 등의 신체적 특성들로 인해 다양한 실패와 좌절을 경험한다. 인생의 수많은 변수들이 내 마음처럼만 주어질 확률은 없다고 해도 좋을 만큼 낮고, 이는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다. 누구나 부자가 되길 원하지만, 누구도 피치 못할 이유로 가난해질 수 있다. 질병은 부자와 빈자를 가려가며 다가오지 않는다. 죽음으로 인한 이별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찾아온다. 홀로 아무리 완벽해도 마음을 나눌 사람 하나 없어 눈물짓는 이들도 많다. 삶에서 어떠한 아픔도 겪지 않도록 운명 지어진 사람 역시, 없다.

 

인간에게 결핍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열등감 역시 당연히 따라오는 감정이다. 조금 더 부유했다면, 몸이 건강했더라면, 남들만큼만 가족이 화목했더라면, 과 같은 생각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열등감을 느낄 이유가 하나도 없었던 이가 있다면 그는 행운아다. 하지만 운은 현실에서 드물기 때문에 운이다. 열등감은 부끄러운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이다.

사람은 자신의 결핍으로 말미암아 타인의 결핍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보육원에서 부모를 그리며 성장한 이는 누구보다도 부모를 모르는 슬픔에 공명하며 그들을 도우려 할 것이다. 집안이 어려워 공부를 접은 이가 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독지가가 되어 장학 활동에 앞장설 수 있다. 선천적으로 다리가 불편했던 아이가 자라 의공학자가 되어 같은 어려움을 지닌 아이들을 위한 보조 기구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스스로의 열등감을 메우려 매진하던 삶의 노력들이, 공허한 자신의 마음을 채우고도 남아 같은 아픔에 고통받는 이들의 마음까지도 다독인다. 그들의 아픔은 내 것이었던 아픔과 같기에, 조그만 도움이 그들에게 얼마나 절실할지, 그 기쁨이 얼마나 클지도 온전히 느껴진다. 바로 이 지점이다. 삶이 어딘지 모르게 완벽하지 않고 결핍된 느낌, 스스로가 못나 보여 숨기고만 싶었던 내 마음, 열등감이 실은 삶의 방향을 주고 삶을 이어갈 힘을 준다. 나아가 같은 아픔을 가진 이들에게 공감하고 그들과 나를 이어준다. 열등감의 변곡점, 특이점이다.
 

사진_픽사베이


처음부터 모든 것이 충만한 채로, 예컨대 부유하고, 건강하며 세상 모든 이들에게 찬사와 사랑을 받는 상태로 태어나 늘 그렇게 살아간다면 어떨까. 물론 특별히 걱정할 일이 없다는 면에서 편안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한 삶을 택할 것이냐는 물음에는 감히 아니라 답하고 싶다. 애초에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모든 것이 완벽했고 앞으로도 완벽할 것이라 예상되는 삶에서,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지 않을까.

열등감이 있어 이를 채우기 위한 오늘이 의미가 있다. 나를 채우기 위한 하루가 누군가에게도 의미가 된다는 것은 크나큰 축복이며 감사한 일이다. 그렇게 불완전한 너와 내가 닿아 마음을 나누고 서로를 보듬으며 함께 나아가는 것이 삶의 묘미가 아닐까 한다.

 

못난이 핫도그가 부러웠던 우리들도 어느새 자라 휴게소의 소떡 정도는 맘 편히 사 먹을 여유가 생겼다. 천지분간 없던 그때, 왜 우리 집은 핫도그를 마음껏 먹을 만큼 잘 살지 못할까 라는 철없는 원망이 한 번도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핫도그를 나눠 주던 그 친구도, 내용은 다르겠지만 당연히 자기 나름대로의 결핍이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 녀석은 뻔히 아는 그 맛을 홀로 더 즐기기보다, 한 입이라도 맛보는 것이 간절한 친구들과 기꺼이 나누기를 즐겼다. 그 마음을 기억하려 한다. 결핍이 없는 이는 없다. 열등감은 누구나 가진 그 결핍에 드는 바람이, 불현듯 시리게 느껴지는 감각일 뿐이다. 구태여 그 이상으로 부끄러워할 필요도, 그 이하로 숨길 이유도 없다. 억지로 열등감을 미워하거나 밀어내려는 대신 공부든, 일이든, 봉사든, 사랑이든, 그 빈자리를 조금씩 메워갈 노력만을 더해 보면 어떨까. 언제일지 기약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다 보면 소떡을 사 먹듯 나만의 작은 기쁨에 웃음 짓는 날도, 핫도그를 나누듯 진심 어린 손길을 내밀 수 있는 날도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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