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들의 인간적인 내면과 극복과정을 중심으로

[정신의학신문 : 조성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영화의 스포일러가 들어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들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주말에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보고 왔습니다. 저는 그리 만화를 즐겨 보지는 않는 편이었습니다. 아이언맨을 보고 난 후 마블 코믹스에 대해 알게 됐고, 여전히 코믹스 자체를 보지는 않지만, 아이언맨 이후의 MCU(Marvel Cinematic Universe) 영화는 모두 챙겨서 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2019년 4월 말에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개봉을 했고, 이번 영화는 MCU의 한 시기를 종결하는 이야기라서 저에겐 조금 슬펐습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에 대한 저의 감상을 적어보기로 했습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어벤져스,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를 잇는 후속작이자 맺음작입니다. 바로 전편인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타노스가 결국 인피니티 스톤 모두를 차지하고 그 힘을 사용하면서 전 인류의 반이 소멸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이번 영화는 그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영웅들 역시 반은 죽고 반은 살아남았습니다. 

살아남은 영웅은,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토르, 로켓 라쿤, 네뷸라, 로드 중령, 앤트맨, 헐크, 블랙 위도우, 호크아이 등입니다. 인류의 반이 사망한 사건을 두고 영웅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슬픔에 대처합니다.

 

​아이언맨은 포츠와 결혼한 후 딸을 낳고 조용히 살고 있었습니다. 캡틴 아메리카는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자조 모임에 앞장서서 심리적 치유를 돕고 있었습니다. 토르는 술독에 빠져서 게임만 하고 지내고 있었습니다. 헐크는 과학적 실험을 통해, 배너 박사의 두뇌와 헐크의 신체적 힘을 조합하는 데 성공합니다. 블랙 위도우는 닉 퓨리 국장의 역할을 이어받아서 재건에 힘쓰고 있었습니다. 호크아이는 본인이 생각하기에 죽었어야 할 폭력배들에게 무차별 살인을 하고 있었습니다.
 

흑화 된 호크아이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가족의 구성 및 재생산
- 상실을 겪은 타인과의 연대
- 회피/중독
- 과학적 연구로의 승화
- 과거의 행동에의 답습/집착
- 분노/폭력

​어떠세요? 히어로라고 해도 상실에 대한 반응은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내가 가깝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나를 떠나거나 버릴 것 같아서 걱정이 된다, V
나를 따뜻하게 대해주고, 감싸주고, 애정을 보여주는 사람이 없었다. V
나는 보통 상대방이 무슨 다른 속셈을 갖고 있는 건 아닌지 경계한다. 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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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퍼하는 캡틴 아메리카

 

앤트맨은 양자의 영역에서 다시 현재로 돌아왔고, 자신이 시행했던 양자 여행이 곧 시간 여행이 될 수 있음을 깨닫고 구체적인 시행을 위해 어벤져스를 찾아갑니다. 영웅들은 모두 이러한 가능성에 주목했지만, 한 사람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이언맨은 가족을 꾸리고 딸과 함께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상실/죽음을 겪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습니다. 하지만 아이언맨은 아내인 포츠의 조언을 얻고 다시 싸우기로 결심합니다.

아이언맨이 고안한 기계를 이용하여 결국 시간 여행이 가능해졌고, 과거로 돌아가 인피니티 스톤을 다시 획득하기로 합니다. 각자의 영웅들은 인피니티 스톤을 스치고 지나간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납니다.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는 2012년 뉴욕으로 떠나는데, 인피니티 스톤의 획득에 실패합니다. 아이언맨은 헐크로 인해서, 캡틴 아메리카는 과거의 캡틴 아메리카에 의해서 실패를 겪습니다. 이는 상징적으로 아이언맨은 무력에 굴복을 당한 것이고, 캡틴 아메리카는 자신의 완고함(경직성)에 굴복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가장 큰 적은 자신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캡틴 아메리카 vs 캡틴 아메리카


여기에서 이 두 영웅은 한 번 더 시간 여행을 가기로 합니다. 한정된 자원과 시간을 통해 마지막이 될 수 있는 시간 여행을 떠나게 되고, 이들은 1970년의 과거로 시간 여행을 갑니다. 이 시간대는, 아이언맨은 태어나기 직전의 시간, 캡틴 아메리카는 여전히 의식불명인 상태라는 점에서, 자신들이 부재하기 전인 시간으로 돌아가는 공통점이 있겠네요. 두 번째 시간 여행에서 그 둘은 각각의 가장 큰마음의 짐을 마주하게 됩니다.
 

하워드 스타크와 과거의 캡틴 아메리카


아이언맨은 우연히 자신의 아버지를 그곳에서 만나게 되고 대화를 하게 됩니다. 아이언맨은 자신의 아버지 또한, 새로운 생명의 출현에 앞서 두려움과 불안을 가지고 있었던 보통의 아버지와 다르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두려움은 자신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동질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또한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미움을 털어내고 아버지와 화해할 수 있었습니다.

​캡틴 아메리카는 우연히 자신의 사랑인 페기 카터를 가까이에서 지켜보게 됐습니다. 후에 결말에서 캡틴 아메리카는 2019년 현실로 돌아오길 거부하고 페기 카터를 다시 만나서 평범한 삶을 살게 되는데, 아마도, 과거 여행을 통해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강하고 완고한 히어로서의 삶이 아닌 한 여자를 사랑하는 평범한 남자로서의 삶이라는 것을 깨달은 듯합니다.
 

일생의 사랑 페기 카터


토르 역시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는데, 어머니가 죽는 날이었던, 그 아스가르드에 도착하게 됩니다. 토르는 여기에서 두 명의 대상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는 자신에게 떠나버린 옛사랑 제인 포스터이며, 하나는 자신의 어머니입니다. 제인 포스터에게 에테르(리얼리티 스톤)를 얻어내야 하는데, 토르는 꽁무니를 빼고 도망가지요. 그는 여기저기 도망만 다니고 회피하고 있는데 결국 그의 어머니는 그를 찾아냅니다.

어머니는 보자마자 아들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말을 합니다. "너는 패배자가 된 것이다. 이제 남들과 같아진 것이지"라는 이야기를 해줍니다. 여기에서 토르의 가장 큰 숙제가 드러납니다. 바로 패배감입니다. 자신이 천둥의 신이고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타노스에게 패배했고 자신의 조국은 파괴됐고 사람들은 몰살당했습니다. 패배 이후 토르는 정신적으로 완벽히 무너져서 술주정뱅이 똥배 캐릭터가 됐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단호한 상황 정리와 따뜻한 위로가 토르를 다시 일어나도록 힘을 주게 됩니다. 역시 동서고금 어디에서도 어머니만큼 위대한 존재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의기소침한 마마보이 토르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 결국 영웅들은 타노스와의 전투를 벌입니다. 타노스는 아마도 타나토스(Thanatos)에서 왔으리라 추측하는데, 죽음의 본능이라는 뜻이고, 실제로 전 우주를 소멸시키려는 존재이지요. 즉 영웅들은 죽음의 공포와 맞서 싸우게 됩니다.

모든 영웅들이 출현해서 타노스에 대적하여 싸우지만, 결국 타노스에게 건틀릿(인피니티 스톤)을 모두 뺏기고 오히려 죽음을 당할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이러한 위기에서 아이언맨은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타노스에게 인피니티 스톤을 빼앗고 타노스를 소멸시킵니다. 그 대가로 결국 자신도 죽음을 맞이합니다. MCU의 화려한 장을 열었던 영웅이 가장 그답게 마무리를 하고 퇴장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아이언맨은 그동안 물질주의적이며, 이기적이고, 자신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나르시스적인 영웅이었는데, 가장 아이러니하게도 이타적인 죽음을 맞이합니다. 어떻게 이러한 변화가 가능했을까요?

 

대부분의 영웅들의 삶이란, 실패도 없고, 힘과 젊음을 영원히 유지하며 언제나 승리합니다. 물질적 시간적 한계가 없는 삶을 살지요. 하지만 아이언맨은 인류의 반이 소멸되는 큰 사건 이후, 조용하게, 평범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식으로 말입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성공, 실패, 결혼, 출산, 자녀의 양육, 부모의 죽음 등을 겪으면서 살아갑니다. 인생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시간은 나의 편이 아니며, 나는 언제나 죽을 수 있다는 한계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내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생각을 하며 살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어린 시절의 자신을 위로하고, 부모와 다시 화해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변화를 인간의 발달, 성숙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아이언맨은 다른 영웅과는 다르게 이러한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종국에는 가장 이타적인 죽음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이러한 아이언맨의 죽음은 필연적(inevitable) 전개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작과 끝에는 바로 이 대사가...


각각의 영웅들이 시간 여행을 통해 인피니티 스톤을 획득한 것은 전개상 중요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각자의 정신적 과제를 해결하고 돌아왔다는 것도 있습니다.

영웅들이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심리적 과제를 해결하는 모습들이, 심리학에서 말하는 'talk therapy'와 매우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정신치료(상담치료)'는 말로서 우리 자신의 마음속 의식과 무의식을 드나들고, 과거와 현재의 시간 여행을 하며 자신의 과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11년간의 MCU를 마무리하는 중요한 작품이었습니다. 화려한 액션과 전투신도 관전 포인트였고, 그만큼이나 히어로들의 내면에 대한 묘사가 좋았던 영화였습니다. 상실, 공포, 분노에 대처하는 히어로들의 인간적인 면모,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중요한 심리적 과제를 해결하고 돌아오는 모습, 히어로들의 인간적 성숙과 발달은 정신과 의사인 저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주는 부분이었습니다. 정말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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