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미루기를 논하기에 앞서 웃픈 이야기를 할까 한다. 중요한 일을 나중으로 미루는 습관에 대해 많은 환자분,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언젠가는 꼭 글로 그때 오고 간 이야기를 정리하고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 글 자체가 수많은 미루기와 미루기 끝에 나온 결과물이다. 실은, 여태껏 썼던 모든 글이 마찬가지였다. 글뿐 아니라 어쩌면, 살아가며 이룬 작은 성취들 모두가 끊임없는 미루기와의 줄다리기였음을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고백한다.

 

수동 공격적 성격(Passive aggressive personality)은 미 정신의학회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DSM)의 최신 버전인 DSM-5에 정식 성격 장애(Personality disorder)로 등재되진 않았으나, 기타 명시된 성격 장애(Other specified personality disorder)의 일부로 소개되고 있다. 수동 공격성(Passive aggression)은 말 그대로, 상대방에 대해 욕설, 폭언, 폭력 등 능동적인 공격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인 자세에서 상대를 화나게 하는 것이다.

미루기(Procrastination), 응당 적절히 기대되는 수준의 책임에 대한 저항, 일의 지연에 대해 변명하기, 누군가에게 깊이 의지하면서도 그 상대방에 대한 결점을 찾기 등이 수동 공격성의 패턴이다. 혹시 뜨끔한 부분이 있으신지? 나는 그랬고, 함께 수업을 듣던 학우들도 그랬다. 특히 미루기 부분에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거 내 이야긴데?’ 하는 눈치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하기 싫은 공부를 미뤄두고 게임 한 판 하는 것이 화내는 것과 무슨 상관일까. 지금 당장 써야 할 논문이 있을수록 몰래몰래 하는 메신저 대화와 시답잖은 뉴스 확인이 재밌는데, 이것이 왜 분노의 표출일까. 그게 사실이라면 왜, 누구에게, 어떻게 화를 내는 것일까.

 

사진_픽셀

 

어릴 적 xx 한자라는 학습지를 했었다. 당시의 나는 뿔이 났었다. 놀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이 천지인데 억지로 문제를 풀어야 하니 너무 싫었다. 하지만 대놓고 학습지를 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간 호되게 야단을 맞거나, 아이스크림 사 먹을 용돈이 끊길 가능성이 있었다. 더 근본적으로, 부모로부터의 부정적인 감정이 전달되는 것 자체가 어린 마음으로는 불편했다.

그래서 학습지를 숨기고 잃어버렸다고 하거나, 학교에서 풀기 위해 가져갔다가 두고 왔다고 했다. 선생님이나 부모님 입장에서는 뻔히 보이는 거짓말에 열이 받지만 그렇다고 다짜고짜 100% 거짓말이라 의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훈육을 하자니 아이의 진심을 믿어주지 않게 되는 것 같고, 그렇다고 눈에 보이는 거짓말을 그냥 넘어갈 수도 없으니 참 곤란한 노릇이다. 나의 소심한 복수는 성공했다.

 

삶에 화가 나는 이유는 다양하다. 부모의 불화 속에서 끊임없이 우울과 불안에 시달려야 했을 수도 있고, 표면적인 따뜻함 아래 숨어있는 부모의 지나친 기대에 짓눌렸을 수도 있다. 어린 나이 때부터 부당한 괴롭힘과 따돌림으로 사람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렸을 수도 있고, 아무리 노력해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해 좌절할 수도 있다. 너무 많아 짧은 지면으로는 일일이 적기 힘들 정도의 수많은 이유들로, 우리는 때로 인생을 미워한다.​

그 미움의 정체는 단순히 왜 내 마음을 몰라주지, 하는 속상함보다 깊다. 부모, 선생님, 결혼 정보회사, 옆집 아줌마, 인사담당자의 입을 빌려 표현되는 세상의 냉정함에 대한 원망이다. 어째서 세상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주지 않는 걸까, 애초에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왜 이토록 열심히 버텨야 하는 걸까, 왜 삶은 당연히 힘든 걸까. 수많은 성인들을 출가의 길로 이끌었던, 근본적인 삶에 대한 의문이다.

세상에 화가 나더라도 우리는 함부로 삶에게 대들 수 없다. 냉정한 세상에서 성질대로 살며 치러야 할 대가는 만만치 않기에 압박 면접을 버티고, 상사의 모욕을 견디며, 진상 손님의 악을 받아낸다. 대신 우리는 소심하게 성질 낼 방법을 찾는다. 상사가 어렴풋이 말 거는 듯했지만 못 들은 척한다. 짜증 나는 손님의 주문을 까먹고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 수준에서 ‘진짜’ 까먹는다.), 늦잠이 들어 면접 시간을 놓친다. 미루기를 비롯한 수동 공격 행동은 작은 일탈이다. 삶을 지나치게 망치지 않는 선에서, 우리는 교묘하게 삶에 저항하는 시늉을 한다.

 

학습지를 푸는 것이 부모보다는 아이 자신의 미래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미루고 싶은 일들의 대부분은 실은 나 자신에게 중요한 일인 경우가 많다. 그러니 (물론, 맞는 말이긴 하지만) ‘미루고 싶을수록 더 열심히 하자!’라는 청춘 만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수동 공격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마음이 어떨지를 논해보고 싶다.

학습지를 찢거나 숨긴 아이의 마음은 마냥 편안하지만은 않다. 행여 들키진 않을까 하루 종일 불안하다. 나쁜 짓을 한다는 배덕감이 즐겁기도 하지만, 불편한 죄책감을 함께 느낀다. 핑계를 생각해 내는 것 역시 꽤나 까다로운 일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아이는, 잠깐의 짜증을 참으며 학습지를 풀어내는 것보다 훨씬 많은 마음의 에너지를 소모한다.

버거운 삶의 무게 앞에서 우리는 어린 시절 화가 날 때의 마음으로 돌아간다. 힘든 일을 거부하고 싶지만 조금의 화가 났다고 해서 직장을 때려치우거나 집을 나갈 수는 없다. 그래서 해야 하는 일들과 줄다리기를 한다. 배우자의 잔소리가 심할수록 화장실 청소를 미루거나, 상사가 짜증 나게 할수록 시킨 일을 까먹는다. 화가 난 배우자가 속이 끓는 것을 느끼며 그 앞에서 폰 게임을 하고, 열불 난 상사 앞에서 진심으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이 편해지진 않고, 오히려 더 꼬인다. 합당한 변명을 떠올려야 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나눠야 하는, 서로를 지치게 하는 소모적인 시간들이다.

 

또한 미루기는 자신의 역할에서 자기 자신을 멀어지게 한다. 학습지를 미룬 아이에 대한 선생님의 신뢰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아이의 말이 믿을만하냐, 그렇지 않으냐보다 중요한 것은, 해당 시일까지 아이가 학습지를 풀 것이라는 기대의 좌절이다.

한 사람의 정체성을 이루는 상당 부분은 책임이다. 가족 내에서, 모임에서, 직장에서 그가 어떤 역할을 맡고 있고, 어떤 역할을 해 줄 것이라 기대되며, 실제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가 그를 규정한다. 미루기는 그 책임의 수행을 유예시킨다. 이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는 개인에 국한되지 않는다. 친척이 아프다며 임박한 조별과제에서 급작스레 이탈하는 조원을 생각해 보자. 수행되지 않은 책임은 이와 연관된 이들의 감정을 불편하게 한다.​

대놓고 드러나는 갈등은, 차라리 감정의 충돌을 유도하기에 해소의 여지라도 있다. 수동 공격적인 행동에 대한 불쾌함은 표현하기엔 애매하다. (표면적으로라도) 피치 못할 이유 때문에 발생하는 책임 회피나 지연에 대한 비난은 명분이 부족하고, 화를 내는 사람의 평판에도 좋지 못하다. 이렇게 해소되지 않는 부정적인 감정은 연관된 상대방의 마음속에 차곡차곡 축적이 된다. ‘쟤는 그냥 싫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함께 일하고 싶진 않다.’는 마음의 씨앗이 된다. 인생의 기회와 소중한 나의 역할을 조금씩 잃게 한다.

 

사진_픽사베이

 

작은 일탈 이상의 즐거움을 주지도 않고, 스스로도 지치며, 삶의 기회를 앗아가는 미루기. 어떻게 하면 멈출 수 있을까. 이렇게만 하면 즉각 멈출 수 있다!는 방법은 (스스로의 경험상) 아쉽게도 없었다. 다만 나 자신이 활용하는 요령을 몇 가지 공유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지금 바로 시작할 가장 작은 목표를 세우는 것이다. 아직도 기억나는 내 최초의 운동 목표는 ‘엎드리기’였다. 아무리 미룰 이유를 대려고 해도 ‘엎드리지 않으려니’ 마땅한 핑계가 없어 일단 엎드렸다. 엎드려서 팔을 굽히지 않기는 또 민망하니 팔굽혀펴기를 했다. 엎드리기는 그 뒤로 시작한 모든 운동들의 씨앗이라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을 작은 목표를 세우는 것은 의외로 미루기를 막는 데 도움이 된다.

두 번째는, 하고 싶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 때의’ 마음을 잘 간직하는 것이다. 스스로 만들어 낸 ‘하지 못할 이유’들을 잘 믿지 않는다는 것과도 비슷하다. 처음 하고 싶은 무언가가 떠오를 때의 마음이 가장 ‘덜 오염된’ 마음 상태다. 곰곰이 생각할수록 부담감, 포기해야 할 것들, 그 일과 연관된 미운 사람들 생각에, 그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럴듯한 이유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변명에 오염되기 전, 내가 그것을 하고 싶었던 이유, 그것이 내 삶에 어떤 의미인지 떠올렸던 마음을 꾸준히 간직하는 것이 미루기를 피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마지막 방법은, 이때까지 어떻게 미뤄왔던지 간에, 그 일이 어떻게 되어있든지 간에,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든지 간에, 내 몸과 마음 상태가 어떻든지 간에 일단 ‘엎드리는’ 것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을 바로 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

 

서두의 고백을 이어가자면 비단 이 글 한 단락을 넘어, 글쓰기 자체를 미뤄온 것은 일주일, 한 달의 일이 아니다.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은 학창 시절부터 간직해 왔지만, ‘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글을 쓰지, 부족한 솜씨를 내보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야, 작가 할 것도 아닌데 시간 들여 글 쓰는 게 먹고사는 데 무슨 도움이 될까.’ 같은 생각들을 변명으로 10여 년 이상을 미뤄 왔다.

그런 나를 노트북 앞에 앉힌 것은 더 나이 들기 전에 빨리 해야 한다는 절박함도, 나만 쓸 수 있는 멋진 콘텐츠가 있다는 거창한 생각도 아니었다. 단지 그간 쓰기를 가로막던 이유들이 어쩐지 껍데기 같이 느껴졌다. 그 마음 하나가 펜을 들게 했다. 공부하고 일하며 배운 마음을 이해하는 새로운 눈, 행복을 읽는 새로운 언어를 글을 통해 나누고 싶다는 마음, 껍데기를 걷어내자 진짜 소망이 보였다.

그래서 쓰기 시작했다. 이 짧은 글 하나를 쓰면서도 며칠 동안 여러 번 커피를 내리고, 수십 번 자리에서 일어나고, 수백 번을 휴대전화를 열어보곤 했다. 어쨌든 이렇게 하나의 글을 마무리를 짓는다. 앞서 그렇게 꼭지를 맺었던 몇몇 글들이, 미미하지만 내게는 더없이 소중한 변화들과 연결되는 중이다. 내게 글쓰기가 그랬듯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미루던 무엇인가가, 더 이상은 미뤄지지 않고 시작되어 작은 기적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본다.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