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전념치료에서의 융합(fusion)과 탈 융합(defusion).

[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저는 태어날 때부터 불행할 운명이었어요.”

젊은 친구가 눈물을 왈칵 쏟는다.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를 함부로 꺼내기도 미안할 정도로, 힘겨웠던 삶의 여정을 앞서 몇 번의 면담을 통해 이야기한 후였다. 듣는 입장에서도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너무나 공감이 가고, 안타까웠다. 그 후로도 여러 차례 면담실을 방문하여 이야기와 울음을 한참 토해내니 감정은 꽤 진정되었지만, 이야기의 내용은 큰 변화가 없었다. ‘삶이 이렇게나 힘들었고, 그래서 저는 불행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에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신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만큼 힘드셨다는 이야기로도 들려요.”

“네, 진심이에요. 저는 그냥 애초에 그렇게 태어난 것 같아요.”

“네, 그러셨군요... 그렇다면 혹시 그 생각은 언제부터 드셨는지 기억이 나시나요?”

“네. 고등학교 때쯤이었던 것 같아요. 부보님이 이혼하시고......”

“그러셨군요. 음... 일단은 그 전엔 그런 생각이 드셨던 건 아닌가 봐요.”

“어... 네. 그때쯤부터 삶이 너무 힘들게 느껴졌어요. 비로소 깨달은 거죠.”

“그럼 그 전에는 인생에 대해서 잘못 알고 계셨던 건가요?”

“네. 그런 셈이죠.”

“음... 그러면 혹시 지금 떠올리시는 삶에 대한 생각도, 미래에서 보면 정답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음...?”

 

사진_픽사베이

 

일찍이 수많은 철학자와 성인이 통찰했듯, 인간은 언어를 통해 삶을 본다. 하루를 말로 해석하여 마음에 꾹꾹 눌러쓰며 인생을 이해하려 한다. 우리의 오늘 아침을 되돌아보자. 아침밥의 맛과 날씨를 있는 그대로 느끼지 않았다. ‘오늘 국은 좀 짜네.’ ‘하늘이 오랜만에 화창하네.’ ‘6월도 안됐는데 너무 덥네.’ 의미 없는 일상, 모호한 느낌들이 말을 통해 명료해지고, 의식에 깊이 이해되어 자리 잡는다. 의식화된 느낌은 모두 언어로 해석되어 있다. 언어가 없을 때 삶을 어떻게 느꼈는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의 의식은 언어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말은 명료하고 오래간다. 언어를 이용해 정리한 생각은 진득하게 우리의 마음에 들러붙는다. 예컨대 면접에서 떨어진 충격, 그 느낌 자체는 생각보다 빠르게 사라지지만 ‘나는 앞으로도 잘 안 될 거야.’라는 문장으로 정리된 생각은 감정이 사그라든 다음에도 쉽사리 떨치기 힘들다. 이별의 아픔은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지만 ‘쉽게 마음을 주면 결국 상처 받는 건 나야.’라는 생각은 오래도록 가슴에 머문다.

 

행복하기만을 위해 태어나거나, 불행하기만 하도록 운명 지어진 사람은 없다. 삶은 그저 삶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지금까지의 삶에 불행이 조금 더 찾아왔을 수는 있고, 생이 지나치게 힘들고 버거웠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삶은 버겁고 힘들기만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나는 사랑받지 못할 사람이야.’ ‘뭘 해도 내가 하는 일은 꼬이기만 해.’ ‘나는 항상 불운해.’ 살아가며 겪는 단편적인 경험들이 만들어낸 생각들, 그 생각들이 내 삶인 양, 나라는 사람 그 자체인 양 여기게 되는 현상을 수용전념치료적 관점에서 융합(fusion)이라 한다. 복잡한 세상, 오묘한 삶, 다면적인 나를 담기에는 지나치게 단편적인 몇 마디 말로 스스로의 인생, 나 자신을 규정하고 이러한 관념들을 불변의 사실처럼 간주하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에 대해서 조금의 이해는 필요하다. 앞서 언급했던 ‘삶은 오로지 힘든 것이다.’라는 생각은 과연 사실일까? 아니, 엄밀히 말해 ‘사실’이란 것은 존재할까? 살며 만났던 사람들 중에 이기적인 사람이 많았을 수는 있으나, 이것이 ‘사람들은 이기적이니 항상 조심해야 한다.’는 명제를 증명할 수는 없다. 아픈 이별의 경험들이 ‘세상에 사랑이란 없다.’는 문장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나 우리의 마음은 행복을 염원하기보다 불행을 더욱 두려워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생물학적인 입장에서, 행복은 개체의 생존과 번영에 좋은 일을 경험할 때 주어지는 보상이며, 불안은 미리 예상되는, 생존에 대한 위협을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좋지만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일과 일어난다면 살아남는 데 치명적일 수 있는 일, 본능은 당연히 후자에 더 마음을 기울인다. 문명의 발전으로 죽고 사는 문제에서 꽤 자유로워진 현대에도 여전히 본능은 사람들을 두려움으로 내몬다. 행복이 다가올 것이란 생각은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행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우리가 긍정적인 생각보다는 부정적인 관념에 더욱 융합되기 쉬운 이유다.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나름대로의 언어로 정리된 생각들은 마음속에 하나씩 하나씩 벽돌처럼 쌓인다. 예쁜 무늬의 벽돌을 적당한 높이로 쌓으면 나를 보호하는 울타리가 되지만, 지나치게 높고 삭막한 담장은 감옥의 장벽이 된다. 좀 더 삶을 잘 이해하고 행복하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가, 관념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부정적으로 왜곡시키며 원하는 행복으로부터 자신을 멀어지게 하기도 한다.

오늘 하루가 행복할 것이라 해서 내일도 무작정 행복할 예정은 아닌 것처럼, 어제까지의 불행이 오늘도 고통스러울 것임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생각에 융합된 마음은 어제까지의 불행을 미루어 앞으로의 삶도 어두울 것이라 예측한다.

이는 다분히 현실적인 이야기다. 지금까지 학교나 직장에서 좋은 대인관계를 만드는 데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하여 ‘역시 사람은 믿을 게 못돼.’ 라거나 ‘사람은 피하는 게 상책이야.’라는 생각이 떠올랐다면 이는 이후의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줄 것이다. 그러한 선입관이 아니었다면 서로의 비슷한 관심사를 터놓고 깊이 친해졌을지도 모르는 사람들과도, 지나친 경계로 인해 가까워질 기회를 잃게 된다. 일, 사람, 사랑, 우리는 어쩌면 우리가 만든 언어의 덫에 사로잡혀 수많은 가능성들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습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돌이켜보면 늦은 사춘기로 고2병을 앓을 때 세상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다. 철학 서적을 탐독하며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꽤나 깊은 이해를 했다고 자부했었다. 처음 사랑에 빠지며 비로소 사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를 깨달았다고 생각한 적도 있고, 삶에 치이며 살아가는 것이란 참 고단하기만 한 것이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지금 와서 되돌아보면, 그 어떤 순간의 어떤 생각도 내 삶 전부, 나 자신 전체를 정의하지는 못한다. 그저 살면서 그런 일을 겪은 적이 있었고, 그런 생각을 떠올린 적,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을 뿐이다. 삶이란 몇 마디 말이나 논리, 철학으로 정의할 수 없는, 그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벅찬 무언가다. 물론 이러한 생각 또한 하나의 관념일 뿐이다.

생각을 내려놓으면 내려놓을수록 지금, 여기, 언제나 한 번뿐인 삶의 이 순간을 어떻게 채울지, 어떻게 살아갈지만이 남는다.

 

사진_픽셀

 

스스로를 가두는 말의 감옥, 융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즉 탈 융합(defusion)을 하여 편견 없이 삶의 매 순간을 맞이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깊은 면담과 실천을 통해 통찰을 넓혀가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짧은 글에서는 두 가지 방법을 제안하고자 한다.

하나는, 떠오르는 생각 뒤에 ‘생각하고 있구나.’라는 꼬리표를 붙이기이다. ‘삶은 비참한 것이야.’라는 생각 뒤에 꼬리표를 붙여 ‘삶은 비참한 것이라고 (내가) 생각하고 있구나.’로,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라는 생각을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구나.’로 떠올려 보자. 실제로 삶이 비참하다기보다, 실제로 내가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기보다 힘들었던 경험들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이러한 관념들을 만들어내고, 이에 몰입하고 있음을 돌아보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리고’ 화법이다. 부정적인 관념에 융합된 사고과정은 어제까지의 삶을 원인으로 하여 내일의 삶을 결과로 설명한다. ‘지금까지 결과가 안 좋았던 적이 많았지, 그러니 내일도 망칠 거야.’ ‘이제까지 사람들과 지내는 게 힘들었었지, 그러니 새로운 곳에 가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러한 생각이 얼마나 타당한지 자체도 생각해 볼 문제지만, 힘든 경험으로 인해 지친 마음은 이런 검토를 할 여력조차 없을 수 있다.

대신 힘든 생각이 떠오를 때 문장의 그러니를 그리고로 고치고, 그 뒤에 그저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을 붙이는 것이다. ‘지금까지 결과가 안 좋았던 적이 많았지, 그리고 오늘은 잘 될 거야.’ ‘이제까지 사람들과 지내는 게 힘들었지, 그리고 지금 가는 곳에서는 잘 지낼 거야.’ 이는 주문이나 자기 암시, 위로의 차원이 아니다. 나의 부정적인 믿음과 무관하게 삶은 열려 있다. 실은 내가 그간 얼마나 나의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를 되돌아보고, 그간 내 생각으로 가두고 있던 삶의 가능성을 비로소 풀어주는 것이다.

 

실제로 원하는 결과, 행복이 당장 찾아오지 않아도 괜찮다. 단지 그간 생각해왔던 것처럼 삶이 불행하도록 만들어져 있는 건 아니라는 것, 그렇다고 반드시 행복해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 삶이란 그저 이어지는 것임을 이해하면 충분하다. 과거의 불행과 행복이 만들어낸 생각들에 사로잡히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원하는 삶을 위해 전념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작년 한 해 동안의 날씨는 어땠을까. 가끔 비가 오고 때로는 화창했다. 대부분의 나날들은 날씨가 어땠는지도 모르게 그저 그런 하늘이었을 것이다. 어제 비가 왔으니 오늘은 폭풍우가 올까 걱정할 수 있다. 어제 화창했으니 오늘은 구름이 몰려올 것이라 슬퍼할 수도 있다. 다만 이는 모두 그저 생각들일뿐이다. 답은 하나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한 발자국만 물러나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도 가끔 불행하고 때로 행복하며, 대부분 그저 그런 나날들이 이어진다. 그저 그런 날을 보낼 때, 오늘은 왜 화창하지 않을까를 고민하거나 비가 오면 어떡할지를 미리 슬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생각은 내려놓고, 화창한 날엔 소풍을 떠나기도 하고, 그저 그런 날엔 그저 그런 일상을, 아쉽게 비가 오더라도 부침개를 구우며 비 오는 소리에 섞이는 전 굽는 소리를 즐기는, 다만 그렇게 살아가면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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