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밑바닥에서 활용하는 미학적 자존감- 본질적 변화를 위해 긍정적인 기억에 접속하라.

[정신의학신문 : 이상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내가 좋아하는 것’들의 노랫말 중에서 ‘개에게 물렸을 때, 벌에게 쏘였을 때, 자꾸만 슬퍼질 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리면 기분이 조금 나아져요.’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힘들 때 내가 좋아하는 기억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지고 안정감을 얻는 경험은 어린 시절 엄마란 애착대상으로부터 받은 선물입니다. 누구에게나 행복했던 기억은 있습니다. 뿌듯한 감정을 느꼈던 일과 성취경험은 의미 있는 기억으로 저장되어 있습니다.

슬럼프 상황에서는 현재의 절망적인 상황에 집중하기 쉽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괴롭고, 앞으로도 이런 상태가 지속될 것 같아 빨리 벗어나려 발버둥 치다 보면 어느새 조급해지기 마련이죠. 자신이 잘해왔던 리듬마저 잃어버려 그동안 잘해왔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고, 자꾸만 안 좋게 꼬일 것 같아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지금 자신의 노력도 아무런 의미가 없이 부질없는 행동처럼 여겨지며,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나?’라는 생각에 잠도 오지가 않습니다.

 

사진_픽셀

 

먼저, 슬럼프와 공백기를 견디기 위해선 자신이 주목하는 지점을 바꿔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상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나 긍정적인 기억은 꺼내 놓기 쉽도록 의식의 앞자리에 진열해 두고, 현재 부각되는 부정적인 부분들은 뒷자리로 내모는 것입니다. 슬럼프 상황에서는 직접적으로 자신감을 심어주려고 애쓰기보다 간접적이며, 은근히 스며드는 방식으로 자신감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주효할 때가 많습니다. 과거의 긍정적인 달콤한 기억을 떠올려, 부정적 감정으로 가득 차 있는 의식의 공간으로 서서히 침투시키는 전략이죠. 부정적인 믿음으로 완전무장한 부정적인 감정의 세력을 주춤하게 만들어, 점점 밀어내도록 하는 것이죠. 우리의 신경망에 감춰진 긍정적 기억이 주는 안정감을 필요할 때마다 아이스크림 꺼내듯 맛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강렬했었던 긍정적 경험에 대한 기억은 부정적 감정으로 얼어붙은 내면을 녹이는 달콤함을 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슬럼프 상황에서 이것을 스스로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죠. 슬럼프가 길어지면, 자신에 대한 자기충족적 예언은 거의 저주에 가까운 망언으로 바뀌고,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하며 자신을 배반하곤 합니다. 그래서 잠시 숨을 들이쉬며 편안한 상태에서 좋은 기억을 세 가지 정도 떠올려 보겠습니다.

이렇게 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이게 지금 나와 어울릴까? 자책하지 마시고요. 그래도 힘든 순간에 하는 이런 노력은 작은 움직임이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성과가 전혀 없지는 않을 겁니다. 미학적 자존감이 있는 사람은 성장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이대로 무너지지 않는다는 결연한 마음으로 지금 할 수 있는 행동을 하면서 아직도 남아있는 것을 보려고 합니다. 충무공 이순신처럼 말이죠.

되돌아보면, 가장 뿌듯했거나 행복했던 순간, 자부심을 느낄만한 자랑스러웠던 점이 언제였나요? 남들에게 말하기는 뭐하지만,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했던 일은 무엇인가요? 화려했었던 순간에 함께 즐거움을 나눴던 사람은 그때 나의 어떤 점을 보고 좋아해 줬을까요? 딱 세 가지 정도만 찾아보셔도 충분합니다.

 

둘째, 슬럼프를 견디기 위해 현재의 문제만 보는 관점에서 탈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고통스러운 지금의 시점을 이동시켜 문제를 겪고 있는 나 자신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뿌듯했던 과거를 훑어가며 볼 수 있고, 이 문제를 극복한 미래의 시점에서 현재의 자신을 볼 수도 있겠죠.

지나간 달력 한 장을 뜯어내 그 뒷면을 이용해 자신의 일대기를 간단히 훑어보듯 적어봅니다. 일단 인생의 타임라인이라는 줄 하나를 긋고 위와 아래를 구분 짓습니다. 줄 윗면에 10대, 20대, 30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윗면에는 성공했던 경험, 힘들었지만 의미 있었던 경험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는 것입니다. 아랫면에는 힘들었던 삶의 위기, 트라우마 같은 부정적인 사건을 적어보고 그 경험을 통해 배웠던 교훈을 적어봅니다. 아마 돈으로 살 수 없는 소중한 경험들이 희미하게나마 의식에서 나오실 겁니다.

인생 약력을 통해 과거에 내가 누구였는지를 돌아보는 것은 지금의 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지금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가늠해 보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잘 지냈던 시절 못지않게 힘들게 고생했었던 시절을 겪은 후 성장한 지금의 나를 되돌아보면 ‘아 그때 그랬었지. 그래도 이렇게 성장했었구나.’라고 느끼며, 현재의 슬럼프 상황을 보다 균형 잡힌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적다 보면, 좋은 일들과 그 시절을 같이 고생하며 나에게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시절 나를 믿어주었던 사람들, 내게 따뜻하게 말해 주었던 사람들을 통해 사랑받은 추억이 떠오르면서 자신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신경망에 불이 들어오게 됩니다.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확인하고, 과거를 통해서 배울 수 있게 만든다면, 슬럼프 상황에서 조급함이 설 자리는 조금씩 줄어들 겁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무기력함, 해봐도 되는 것이 없다는 좌절감에 죽음의 시간이 가깝게 느껴지는 것 같아도 그것이 내 마음속 전부가 아니라 일부일 뿐이며, 어려웠던 그 시절에도 나에게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과 아름답게 느꼈었던 순간의 경험도 함께 녹아져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면, 어둠 속에서 환하게 빛나는 한줄기 빛을 보는 장엄한 느낌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사진_픽사베이

 

이 모든 것을 할 여유가 당장 없더라도, 하나는 꼭 하십시오. 자신의 인생에서 자랑스러워했던 경험 한 가지와 어려운 위기를 극복했던 지점과 그때 몸으로 배웠던 교훈을 떠올려보세요. 그리고 나와 비슷한 위기를 겪고 있는 사람에게 그때의 나의 경험이 도움이 되도록 들려준다는 기분으로 교훈을 남기십시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소중한 자신에게 다시 꼭 들려주세요. 가난한 마음으로 내가 사랑했던 순간을 끌어안고, 흔들리고 있지만 어떻게든 잘해보려고 애쓰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며, 지금의 이 순간도 괜찮다고 말해주세요.

사랑하고 사랑받은 기억이야말로 힘든 삶을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소중한 진주입니다. 평소에 적금을 붓는다는 생각으로 긍정적 기억을 차곡차곡 쌓아 놓으면, 그것이 자신을 지켜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것입니다. 스스로를 보는 시선은 언제나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영향을 미칩니다. 자신을 믿지 못해 힘든 이 시기에 자신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가 여러 차례 마주하게 될 인생의 슬럼프에서 반전의 드라마를 쓸 수 있는 본질적 힘임을 꼭 기억해 주세요.

미학적 자존감으로 통통한 마음으로, 밑바닥에서 공처럼 통통 튀어올라 독수리처럼 날아오르시길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슬럼프와 공백기를 견디고 있는 분들에게 제 글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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