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얼마 전, 오랜만에 친구가 전화가 왔다. 자정이 넘은 시간, 2차 회식 자리를 파하는 중이라고 했다. 결혼식 사회를 맡겼을 정도로 듬직하고, 평소 자기 고민보다는 남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는 친구. 이 시간에, 이렇게 취해서 연락하는 건 꽤나 해결되지 않는 어려움이 있다는 거다.

“알지? 나 3년 만에 겨우 취직한 거. 다른 애들은 회사 잘 다닐 때 혼자 공부하느라 힘들어서 취직만 되면 아무 걱정 없겠다 싶더니, 막상 취업하니까 오만 걱정이 다 드네. 이 일 계속할 수 있을까 싶고, 언제 돈 모아서 결혼하나 싶고, 직장 그만두게 되면 뭘 해야 하나 싶고... 그래서 요새 영어공부도 하고 수영도 다녀. 뭐라도 손에 잡히는 걸 하면 그때는 마음이 좀 괜찮거든. 근데 또 생각이 드는 게 이게 큰 의미가 있을까 싶고, 필요해서라기보다 안 불안하려고 하는 것도 같고... 이야기하다 보니 굳이 왜 불안한지 모르겠긴 한데 요즘 부쩍 초조한 마음이 계속 드네.”

술도 센 녀석이 한참을 취해서 뭉개지고 어눌한 말투로 말하는 데도 빠짐없이 들리고, 마음 깊이 와 닿았다. 디테일만 다를 뿐, 결국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_픽셀

 

불안을 이해하기 위해 곧잘 비교하는 개념이 공포다. 일상생활에서는 두려움, 공포, 불안 등의 단어는 비슷한 의미로 혼재되어 사용되지만, 엄밀히 따지면 뜻하는 바의 차이가 있다. 공포는 이미 인식한 ‘외부의’ 위협에 대한 두려움, 예컨대 뱀, 귀신, 살인마, 달려오는 차 등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이다.

그에 반해 불안은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미래의 사건이나 대상을 미리 상상하며 겪는 ‘내적인’ 위협이다. 면접에 떨어질까 봐, 사업이 실패할까 봐, 사랑하는 대상과 헤어질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 불안이다.

구체화된 대상을 두려워하는 공포에 비해, 아직 스스로조차 그 실체를 알지 못하는 미래를 두려워하는 것이 불안이다. 이를 느끼는 마음 역시 필연적으로 모호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면접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고백을 했을 때 상대방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창업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여러 가능성에 대해 상상만 해 볼 수 있을 뿐,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이라 미리 예측할 수는 없다.

아무리 이성적인 사고로도 완벽히 미래를 내다볼 수는 없고, 아무리 철두철미한 준비로도 온전히 원하는 미래의 결과를 담보할 수 없다. 삶은 언제나 불확실하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한다.

‘정해지지 않은 미래 때문에 걱정이라면, 최대한 그 불확실성을 줄이면 불안도 줄어들지 않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불안은 삶의 불확실성을 ‘통제하려는’ 마음에서부터 비롯된다. 조금 더 상세히 말하자면, 내게 달린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지 않고, ‘내게 달리지 않은 것마저’ 모두 통제하려는 마음이 불안의 씨앗이 된다.​

취업을 준비할 때를 생각해 보자. 자격증을 취득하고 영어 점수를 쌓는 것은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노력이다. 문제는 아무리 멋진 스펙을 갖추더라도 무조건 합격할 것이란 보장은 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아무리 따내기 힘든 자격일지라도 회사에서 그 시기에 원치 않을 수 있고, 아무리 전문지식이 출중하더라도 유독 이번 인적성 검사에서는 내가 모르는 문제가 많이 출제될 수도 있다. 스스로의 실력을 높이고 자격을 갖추는 것은 내게 달려있으나, 합격의 여부는 결국 내게 달려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원치 않는 결과가 주어졌을 때 대개 스스로를 비난한다.

‘노력이 부족해서이거나, 방향이 틀려서 그런 거다, 진심이 아니어서 그렇다.’

혹은 그 분노를 외부로 돌리기도 한다.

‘사회구조에 문제가 있다, 그 사람은 잘 지낼 수가 없는 사람이다, 그 일만 아니었더라면 잘 됐을 것이다.’

이 모두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들을 찬찬히 되돌아보다 보면 좀 더 근본적인 삶의 원리를 만나게 된다. 본디 삶은 완벽하게 짜여 있지 않고, 언제나 불확실하다는 원리이다.

 

삶은 원래 불확실하다. 삶은 당위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노력한 사람이 좋은 결과를 받으면 좋겠으나 시험에 운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가장 힘들고 열심히 일한 이에게 상응하는 보상이 주어지길 바라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삶의, 야속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원리가 스스로에게는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도 나는 진심을 다하면 상대방이 내 마음을 알아줄 거야, 그래도 나는 열심히 하면 다 잘 되겠지, 미리 잘 준비만 하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거야.’

그리고 그러한 마음을 바탕으로 삶의 불확실함을 모두 원하는 결과로 채우려 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러한 시도는 언젠가는 좌절될 수밖에 없다. 요행히 반복하여 성공을 거두더라도, 이는 온전히 내가 잘해서만도 아니다. 이는 다분히 수학적인 문제다. 우리의 욕망은 무한하며, 서로의 욕망은 비슷하다. 그리고 자원은 무한하지 않다. 철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원하는 직장을 그도 원하고, 합격할 수 있는 자리는 한정되어 있다. 누구나 좋은 집에 살고 싶고 좋은 차를 몰며 비싼 음식을 먹고 싶다. 하지만 이를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허락된 사람은 극히 일부다.

내 아이가 공부를 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내 아이는 공부를 반드시 잘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은 비슷한 듯 결이 다르다. 상위 10%의 학생을 잘하는 학생이라 가정하면, 내 아이가 공부를 잘하지 못할 확률이 그러할 확률보다 아홉 배나 높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결과가 오지 않도록 유명 강사를 찾고, 쉼 없이 정보를 나눈다. 실제로 그러한 결과가 주어졌을 때 아이를 탓하거나 자책하고, 그 이전에 아이가 시험을 잘 치지 못할 것을 미리 두려워한다.

이렇듯 원하는 대로만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은 언제나 초조하다. 실은 그렇게 잘 되지 않을 것임을 스스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단편적인 일들을 넘어, 삶이란 본디 그런 것임에도, 미리 떠올리지 않는 예측할 수 없는 미래가 다가올지도 모른다며 두려워하는 마음, 이유 없는 불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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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인생은 어차피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니 전부 포기하자는 것일까. 원하는 것을 포기하면 기대하거나 좌절할 일도 없으니 이유 없는 불안도 없다는 이야기일까. 아니다. 다만 우리가, 우리에게 달리지 않은 결과, 성과들, 어쩔 수 없는 미래를 끌어와 고민하느라 구태여 불안하지 않아도 되는 삶의 순간들이 불안으로 물들고 있다는 것, 그리고 불안과 ‘절실함’은 구분해야 함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불안은 ‘절실함’ 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불안에 젖어 당장 해야 할 공부에 집중을 하지 못하거나,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란 불안에 오래도록 마음에 둔 그에게 결국 고백 한번 못해 본 경험이 있으신지. 아직 찾아오지 않은 슬픈 미래를 당겨 고민하는 불안은 오히려 지금 내가 딛어야 할 한 걸음을 딛지 못하게 한다.

불안이 내게 달리지 않은 미래의 성과에 연연하며 이에 도달하지 못할까 봐 초조해하는 것이라면, 절실함은 원하는 것을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전념하는 것이다. 불확실성 자체를 혼돈, 삶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이는 것이 불안이라면, 절실함은 본디 삶이란 언제나 불확실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오늘을,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채워갈지에 전념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불안은 듣기 싫은 명절 친척들의 잔소리와 비슷하다. ‘대학은 나와야 하는 것 아니니, 그래도 월급은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니, 결혼은 하는 게 나을 텐데, 이 나이 되었으면 재산은 이 정도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니니...’ 동년배 친척들이 겨우 직장은 잡았다는 이유 하나로 사촌이 홀로 감당해야 했던 훈수다. 나 같으면 스트레스에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리거나 자리를 피할 법도 한데 그 녀석은 항상 웃으며 한마디 했다.

“뭐, 사는 게 전부 제 마음대로 되나요.”

그리고 그는 친환경 페인트 사업이라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자신만의 행복을 개척해 나가는 중이다. 나는 그가 어릴 적부터, 명절에 모인 그 어떤 어르신들보다도 삶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미래의 불행을 예견하고 피할 수 없듯, 행복도 우리는 모르는 자신만의 글을 통해 우리에게 온다. 예측할 수 있는 불행과 행복은 이미 불행과 행복이 아니다. 지레짐작으로 하는 행복이 김칫국 마시기이듯, 불행을 미리 당겨 두 번 힘들어할 필요도 없다. 삶은 미리 준비한 정교한 설계도를 따라 집을 짓는 일이라기보다, 누구에게나 처음이라 누구도 알 수 없는 길을 거닐며 들꽃을 발견하는 것이다.​

부르지 않았는데도 자꾸만 찾아와 마음을 어지럽히는 불안을 또다시 만난다면, 조용히 속삭여 보자.

‘그래, 나도 알아. 그런데 인생이 어디 내 마음대로만 풀리니. 그래도 나도 노력하고 있어. 미안하지만 이제는 미리 걱정하지 않기로 했어. 어쩔 수 없는 것 말고, 지금 뭘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자.’ 라고.

그래도 끈질긴 그 녀석이 퇴근 후 맥주 한 잔의 시간, 시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모처럼 만난 연인과 눈을 마주한 시간에까지 쫓아와 마음을 물고 늘어진다면,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니! 라며 다투지 말고, 조곤조곤 알려주자.

‘지금은 우리가 함께 행복해도 되는 시간이야. 너도 조금만 쉬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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