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학교 다닐 때 시험기간마다 내 가방은 참 무거웠다. 막상 공부할 때는 우등생 동기들이 십시일반 만들어 준 요약본(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참 아름다운 문화였다.)도 겨우 봤지만, 집에서 책을 챙길 때는 강의록을 비롯해 한 해 동안 몇 번 열어보지도 않을 전공서적까지 바리바리 가방에 넣었기 때문이다.

길면 3~4주, 많을 땐 1~2주 단위로 시험을 봤던 본과 시절에는 맘 편히 친구들과 놀러 갈 기회도 몇 없었다. 특히 다른 공부를 하는 친구들과 펜션에서 고기라도 구울라치면 대개는 여행 날짜와 시험기간이 겹치곤 했다. 그럴 때도 역시나 나의 가방은 무거웠다. 전공 서적은 아니더라도, 요약본이라도 가져가서 틈틈이 읽으며 놀자.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 요약본이 읽히는 일은 없었다. 한 번 그러고 말았다면 모르겠으나, 이후로도 나의 가방은 늘 무거웠다. 가방에 든 요약본은, ‘너는 지금 시험기간에 있다. 그 지엄한 사실을 잊지 말라. 감히 시험이란 신성한 의무를 두고 고기를 굽고 맥주를 따르며 즐기려 하느냐.’ 란 마음의 소리에 대한 일종의 변명이자 속죄였다.

‘아닙니다. 저는 그 의무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비록 친구들의 흥을 깰 수 없어 몸만 그곳에 둘 뿐, 저의 마음은 언제고 시험 걱정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보십시오. 이렇게 공부 거리를 준비해 가지 않습니까.’ 물론 실제 생각은 반말에 조금 더 상스러웠다. 여하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가방에 읽지도 않을 책을 가득 넣어갔다. 책을 챙겨가는 행위는 출발할 때의 마음을 가볍게 하는 데 매우 유용했다.

그러나 그 반작용으로 여행에 충분히 몰입하지 못하고, 돌아와서도 초조함을 느껴야 했다. 열심히 놀면서도 끊임없이 마음 한편은 가방 속 요약본에 가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공부할 것이 산더미인데, 여행 때 조금이라도 열어보았으면 남은 공부가 훨씬 수월할 텐데.’라는 의미 없는 후회에 시달려야 했다. 차라리 실컷 놀고 공부를 시작하거나 애초에 놀러 가질 않았으면 될 텐데.

피로했다. 우리는 전력을 다할 때가 아니라, 이도 저도 아닐 때 피로하다.

 

사진_픽사베이

 

Aikins와 Craske는 12년 발표한 논문에서 범불안장애의 불안을 만들어내는 왜곡된 생각(인지왜곡)을 세 가지 제시했다.

그 첫 번째는 걱정을 함으로써 그보다 더 큰 부정적인 감정을 회피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불안을 하며 현실에 당면한 위협에 대한 걱정을 잊는 것이다.

학창 시절 곧잘 먼, 지나치게 먼 미래에 대한 걱정에 빠지곤 했다. 대학은 잘 갈 수 있을까, 졸업을 한다고 해서 취직이 될까, 언제 돈을 모아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릴까 등등... 그러나 그때 내게 가장 걱정이었던 것은, 실은 당장 당면한 시험을 잘 칠 수 있을까였다.

우리의 마음은 배배 꼬인 친구와 같을 때가 있다. 걱정을 풀어주고 불안을 잊게 하기 위해 좋은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그 안의 허점을 찾아내고 속 편한 소리라 폄하하거나 꼬투리를 잡는다. 묘하게도, 그 대신 당면한 불안에 사로잡힌 마음에, 더 큰 걱정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지금의 불안으로부터 우리 마음의 신경을 돌릴 수 있다.

또한 당면한 위협에 대해서 우리는 즉각적으로 조치를 취해야 할 것만 같은 부담을 느낀다. 예를 들어 시험 성적이 걱정되면 당장 공부를 해야 할 것만 같다. 그러면 공부를 하면 될 것이나, 매사에 그것이 그리 쉽다면 걱정은 없을 것이다. 공부를 하지도 않고, 성적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당장은 대처하려야 할 수 없는, 먼 곳의 고민을 끌어다 불안해하는 것이다. 당장의 시험 걱정에서 꼬리를 물듯 나아가 취직은 어떻게 할지, 돈은 언제 모으고 집은 어떻게 마련할지, 결혼을 할지 말지, 한다면 언제 하고 아이는 낳을지 말지에 대한 공상 같은 불안에 빠져 있다 보면 지금 당면한 시험에 대한 걱정에서는 벗어날 수 있다. 비현실적인 걱정이 어느 정도의 불안을 유발하지만, 그 대신 당면한 현실에 대한 두려움을 지우는 것이다.

 

마지막은 걱정 자체가, 원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마술적 사고(magical thinking)이다. 이 대목은 불안에 대해 공부하며 개인적으로 공감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학창 시절에 나름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당연히 공부만 했던 건 아니다. 영화를 보기도 하고, 밤늦게 몰래 컴퓨터를 켜고 친구들과 스타를 즐기기도 하고, 폴더 폰으로 열심히 붕어빵을 굽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 마음이 마냥 편했던 건 아니다. 고도의 경쟁이 당연한 자본주의 사회, 특히 상위 10%의 기준이 평균이 되는 한국 사회는 개인에게 끊임없이 스스로의 상품 가치를 높일 것을 주문한다. 이러한 시선은 휴식을 아예 부정하거나 혹은 그마저도 개인에게 도움이 되는 것으로, 예컨대 운동, 어학, 악기 따위를 즐기도록 권장한다. 마음 놓고 소주 한잔 기울이기도, 게임 한판 즐기기도 어려운 사회다.

그래서 걱정을 했다. 게임을 하며 시험 걱정을 했고, 데이트를 하며 결혼 걱정을 했다. 술을 마시며 미래 걱정을 했고, 일을 하며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걱정을 했다. 해야 할 일만 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나는 가끔 주어지는, 하고 싶은 일을 할 때에도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걱정을 했다. 온전히 마음이 쉬지 못했다.

 

‘걱정이 원하는 것을 이루는 데 도움을 줄 것이란 마술적 사고’는 이러한 나의 마음을 설명하는 참 매력적인 해석이었다. 나는 불안했던 것이다. 첨예한 경쟁의 순간에 한눈을 팔고 딴짓을 하고 있다는 것이. 그래서 걱정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걱정은 항상 소위 ‘해야 할 일’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증거였다. 최소한의 도리 같은 느낌이었고, 그렇게 마음이라도 쓰는 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걱정을 안고 있는 내 마음은 항상 어두웠다. 내일 해결할 일 생각에 앞이 가려진 눈은 사랑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고, 처리할 논문 걱정에 사로잡힌 마음은 환자의 말에 귀 기울이기를 방해했다. 걱정은 원하는 미래와 내 모습을 만들어주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종종 훼방을 놓았다. 걱정 때문에 시도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 나의 미래가 될 수도 있었을 많은 것들이 걱정에 가려져 사라져 갔다.

그랬던 내 모습을 돌아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현재 처한 형편이 얼마나 괜찮은지 그렇지 못한지를 떠나, 끊임없이 지금보다 나아져야 한다는 강박이 얼마나 나를 옥죄고 있는지. 아니, 나아진다는 기준을 무엇으로 평가하는지가 서글펐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흔히 말하는 가치는 경제적인 가치를 의미하며, 끊임없이 나의 생산성을 위해 매진하지 않으면 걱정이라도 해야 하는 그 모습이 서글펐다.

 

사진_픽사베이

 

현대에서는 경전처럼 받들어지는 경제 원리로 따져 봐도, 지나친 걱정은 비효율적이다. 걱정은 걱정 그 자체로 전혀 생산적이지 않다. 결국 무의미한 걱정들은, 마치 읽지도 않을 시험자료들을 여행지마다 굳이 무겁게 챙겨다니는 것과 같다. 결론은 간단하다. 걱정은 내려두고 놀 때는 열심히 놀고, 할 때는 열심히 하자.

‘안 하고 싶은 걱정이 자꾸 들고 불안해지는 게 문젠데, 걱정이 생산적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따지는 게 무슨 의미냐.’고 반문할 수 있다. 맞다. 때론 공부를 하려 해도 시험 걱정에 집중이 되지 않아 책 한 줄 읽을 수 없는 마음, 그 마음 그대로 내 마음이었기 때문에 십분 공감한다. 또 혹시 ‘아니, 그걸 몰라서 그렇게 못하겠어?’라는 생각이 드시진 않는지. ‘잘 노는 사람이 일도 잘한다.’ ‘워라밸이 중요하다.’ ‘걱정의 80%는 일어나지 않을 일, 10%는 잘 해결될 일, 10%는 어찌할 수 없는 일’ 등의 말을 접했을 때의 내 생각이 그랬었다.

다만 ‘나도 쓸데없는 걱정 굳이 하지 않고, 쉴 땐 쉬고 열심히 할 땐 열심히 하고 싶지. 그런데 걱정이 저절로 마구 떠오르는 걸 어떡하란 말이야.’란 생각에 대해서, 그 마음 아래 앞서 언급한 3가지 생각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짚어 보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안개처럼 막연하게 피어나 마음을 어둡게 하던 걱정들의, 보이지 않던 근원이 어렴풋이 보이는 느낌이었다.

 

걱정이 걱정을 낳는 요즘이기에 내게 많은 영감을 주고 도움이 되었던, 이 불안 속 숨어있는 생각들에 대한 글을 쓰고 나누고 싶었다.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삶을 살아가며 어찌 걱정이 하나도 없을 수 있으랴. 그래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당면한 현실의 위협을 느끼지 않으려, 혹은 걱정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만들어지는 걱정에까지는 지나치게 시달리지 않으면 어떨까.

물론 마음속 불안의 근원을 되짚어 본다고 해서 모든 걱정들이 갑자기 씻은 듯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본디 걱정의 정도가 100이었다면, 생각을 다듬은 다음에는 90, 80이 되었고, 단지 그 10, 20 만큼이 쉴 때는 즐거움으로, 열심히 해야 할 때는 효율로 돌아왔다. 그리고 불안한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 덧없는 걱정의 근원을 되짚으며 당장 해야 할 일에 조금 더 마음을 기울이는 연습을 하다 보니, 점차 안개가 걷히듯 많은 걱정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안 그래도 걱정 투성이인 삶이다. 정말 필요한 만큼은 걱정하고, 그 이상에 대해서는 마음을 가다듬고 천천히 되짚어 보자. 얼마가 되었든, 그리 크지 않을지 몰라도, 내려놓은 걱정의 크기만큼은 당신에게 소소한 평안과 행복으로 돌아오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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