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건대하늘 정신과 박지웅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대학병원 전공의 시절 우울증으로 입원한 젊은 환자가 있었다. 치료가 잘 안되고 입원이 장기화되는 와중에 다른 문제로 찍은 복부 영상검사에서 희귀한 내분비 병변이 우연히 발견되었다. 의료진과 가족은 모두 흥분했다. 우울증을 일으키게 한 명백한 원인을 말 그대로 기적 같이 발견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수술로 문제의 호르몬을 분비하는 병변만 제거해주기만 하면 우울증이 완치되는 상황이었다.

수술로 우울증을 치료한다는, 정말로 드라마틱한 상황 속에서 가족들은 이제야 모든 것이 다 이해되고 해소됐다는 표정으로 ‘어쩐지, 우울증이 생길 애가 절대 아니었거든요. 그게 다 저 호르몬 때문이었군요’라며 기뻐했다. 의료진도 흔치 않은 케이스를 더 늦기 전에 발견한 것에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자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출처: http://www.endocrinesurgery.net.au/incidentaloma-overview/>

 

그런데 그렇게 모두가 기뻐할 때 환자가 먹먹하게 토로했던 말은 정말 의외였다. 그 환자를 위한 수술 준비가 순조롭게 진행되는 며칠 사이에 내가 당직을 서는 날이 있었다. 병동 호출을 받고 가니 그 환자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심리적으로 힘든 건데, 아무도 그걸 몰라주는 것 같아요’.

정말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문제가 해결됐다고 손뼉 치는 동안에 그분만은 그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니 그분의 우울증이 갑자기 신체질환으로 취급되면서 역설적으로 우울한 감정은 적절히 다루어지지 않고 소외되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가족으로부터도, 의료진으로부터도... 수술로 치료할 수 있든 없든 간에, 지금 그분이 심적으로 힘든 것은 여전한 사실인데 말이다.

‘그러셨군요, 많이 힘들었겠어요.’

 

사진_픽사베이

 

그날 이후로 그분의 말이 생각날 때가 종종 있다. 의학이 발달하면서 많은 것들을 생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감정의 어려움도 그런 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익숙해졌다. 뇌의 부위와 호르몬, 그리고 그것을 교정해주는 약물치료의 원리. 그런 걸 더 많이 논하게 되면서, 정작 병원으로 오게 한 감정적 고통과 환자가 품고 온 가슴 아픈 이야기들은 소외되는 게 아닌가 한다.

미래에 의학이 더욱 발달한다면 우울증 치료마저 당뇨병처럼 환자의 이야기보다는 혈액검사 수치가 훨씬 더 정확하고 중요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리된다 하더라도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실만큼은 환자의 이야기가 소외되지 않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가끔씩 떠오르는 그분의 낙담하는 표정과 목소리가 말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지막까지 놓쳐서는 안 될 것, 그것은 바로 아픈 이들의 마음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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