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부산서면 통통샤인정신과 이상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바다달팽이를 이용한 기억 연구로 노벨 의학상을 수상한 정신과의사인 에릭 캔델은 ‘기억을 찾아서’란 자신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가끔씩 길고 피곤하고 유쾌했던 또 하루의 끝에 내 창 너머 허드슨 강이 어두워지는 걸 바라보며 과학자로서 살아온 날들을 회상하노라면,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에 경이를 느낀다. 나는 역사가가 되려고 하버드 대학에 입학했고, 정신분석가가 되려고 그곳을 떠났으나, 결국 역사학과 정신분석학을 다 버리고서, 정신에 대한 참된 이해에 이르는 길은 뇌의 세포적 경로들을 거쳐야 한다는 나의 직관을 좇았다. 나의 직감, 나의 무의식적 사고과정, 그리고 당시에는 까마득히 멀게 들렸던 주위의 경고가 나를 이 삶으로 이끌었고, 나는 이 삶을 한없이 만끽했다.’

자신이 정한 인생의 목표를 이루기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한없이 만끽했다고 하는 고백이 인상적이다. 그가 노벨상을 타서 삶이 의미가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정신을 참되게 이해하는 것이 무엇일까’란 의미 있는 질문을 통해 직관을 좇아 삶의 방향을 여러 번 수정하면서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왔던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만끽하려 했었던 그의 정신적 태도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이루는 가운데 즐거움을 누리는 태도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그는 과정을 중시하면서도 목적을 잃지 않도록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조각했던 셈이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그는 선택의 기로에서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는 것이다. 그는 ‘엘리트들이 나치에 추동하는 멍청한 선택을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질문했고 인류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역사학을 배웠다고 한다. 또한 그런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또 정신분석이 필요하다고 여겨 정신과의사가 되었으나, 결국 인간을 본질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억세포의 분자적 메커니즘을 찾아내야 한다고 결론 내리고 기초의학에 몰두하다가 노벨 의학상까지 거머쥐게 되었다. 하나의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살다 보니,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생겼고, 그 일을 충실히 살다 보니,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독창적이고 탁월한 성취를 해낸 것이다.

그에게서 인생의 질문은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조각하는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해 주었다. 인류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며 진지하게 살아왔던 그의 삶에서 홍익인간의 태도, 인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란 이타적 소명의식이 느껴진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의 이념은 고조선 때부터 이어진 우리 민족의 품격 있는 건국이념이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남을 이롭게 하는 존재이며, 그럴 때 인간은 더 가치가 있는 존재임을 천명한 것이다. 홍익인간의 이념에는 인간을 존중하며, 남을 이롭게 하기 위해 남과 다른 진정한 자신을 찾아 아름답게 변화시켜야 하는 자기실현의 맥락이 들어가 있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도 홍익인간의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는데, 훈민정음 서문에서 그의 공감적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말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아니하여서,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것을 가엾게 생각하여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이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세종의 한글 창제의 창의성과 참신한 발상은 어디서 나왔을까? 그는 백성들의 의사소통이 어렵다는 문제에 공감했고, 그것을 무지하고 게으른 백성의 탓으로 여기지 않고, 우리글 자체가 없기 때문으로 진단했다. 그래서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쉬운 한글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세종은 모든 사람이, 여성들도 쉽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세상을 그렸다. 한자를 아는 기득권 세력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칠 거라 예상하면서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한글을 창제하고 반포한 그의 열정과 창의력에서 홍익인간의 기품이 느껴진다. 한글 창제는 당시 백성들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었고, 국정운영에 지장이 줄 수 있는 것이 될 수 있었는데도, 그는 온 백성이 편한 삶의 방향을 그렸다. 왕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질문했고, 우직하게 노력하면서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총균쇠’의 저자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한글을 배우기 쉽고 읽기 쉬운 세계 최고의 문자라고 극찬하면서 만약 세계의 여러 문자를 하나로 통합해야 한다면 무조건 한글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글의 자음과 모음은 소리 내는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기에 세상 거의 모든 소리를 한글의 자음과 모음으로 조합하여 글자로 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종실록에서도 ‘세종이 만든 스물여덟 글자는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뉘고, 그것을 합쳐야 글자를 이룰 수 있다. 그리고 한자와 우리나라 말을 모두 적을 수 있다. 글자가 비록 간략하나 조합해 씀이 무궁하다.’고 한글이 갖고 있는 독창적인 범용성을 밝히고 있다.

한자는 8만 7000자나 되지만 소리는 427가지 밖에 내지 못하고, 일본 문자는 50자로 301가지 소리밖에 내지 못하지만, 이론적으로 한글의 24개 자모로 만들 수 있는 글자는 1만 1172자가 된다고 한다. 표음문자인 한글은 디지털기기에서 사용하기에도 빠르고 편리하다는 장점이 있다. 훈민정음해례본에서는 ‘지혜로운 사람이면 훈민정음을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다’고 쉽게 배우는 한글의 우수성을 밝히고 있다.
 


위대한 창조의 유산을 남긴 세종의 삶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좋은 것을 남기고, 고맙게 기억되고 싶다는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영화 나랏말싸미를 보면서, 백성들의 삶의 문제에 공감한 세종대왕의 추진력과 노력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우리 자신만의 삶의 가치와 가능성을 인정하고, 삶을 진지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다. 단 한 번 살아가는 삶에서 삶의 소중함과 경이로움을 느끼려면,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로서 타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경험을 분명히 새기는 일이 필요하다. 오늘도 매일 똑같이 느껴지는 삶의 경험을 단 하나뿐인 존재가 두 번 다시 누리지 못하는 시간이라고 소중하게 인식할 수 있다면, 내가 하는 모든 경험이 의미 있게 다가올 수 있다.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인 나는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가? 나는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좋을까?

나만의 물음을 갖고, 그 답을 찾기 위해 살게 되면, 남에게 도움이 되는 나만의 창의적인 일을 찾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에릭 캔델과 세종대왕처럼 남을 이롭게 하는 삶의 경이로움을 느끼는 행복감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홍익인간, 세종대왕처럼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삶의 경이로움을 만끽하도록 우리도 변화할 준비를 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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