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대한정신건강의학과 봉직의협회 신예니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그림_haerin

■ 진료실 풍경

날카로운 눈매에, 어느 선생님 말마따나 “테스토스테론이 많게 생긴” 환우가 근심에 어려 고개를 떨구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옆에 있던 사람과 한판 붙었단다.

‘역시, 그는 강자(强者)였어! 왠지 그런 것 같더라니!’

예상 적중의 자만한 확신에 차려는 순간, 간호사의 한마디에 멈추어 선다.

“그럴 분이 아니라서요.”

여러 감정이 뒤섞인 그의 표정을 마주하고서 당시 상황을 들어본다: 담배 피우러 나선 그는 타다 남은 꽁초를 목숨처럼 쥐고 공터에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이제 그 담배꽁초 좀 버리라고 다그치는 이에게 달려들어 가격했고 이내 뉘우치며 사과했단다. 그 짧은 순간, 어떤 생각과 감정의 파도가 들이닥친 건지, 그리고 무엇이 순하디 순한 그를 주먹 쥐게 하였을까.

“담배꽁초에 작은 사람이 살고 있는데 그 사람이 자꾸 내다 버리라고 했어요. (중략) 작은 사람들이 나가면 버리려고 했는데······. 바닥에 작은 사람들이 누워있어서 지나갈 수가 없어요.”

상황을 정리하고 진료실에 앉아있는데 그의 “(작은 사람을) 도와주고 싶었던 마음”이 생각났다. 환각 때문에 힘들었겠다 싶고, 외롭던 그에게 “작은 사람들”이 있어 그나마 웃을 수 있었을까 싶고... 모든 상황에는 사정이 있고, 모든 증상에는 이유가 있다.
 

 

■ 정신병적 증상

정신 질환은 현실검증력(혹은 현실감각)을 기준으로 정신증과 신경증으로 대별한다. 현실검증력은 현실과 비현실을 지각하여 그 차이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인데, 조현병, 조울증과 같은 정신증에서는 현실감각이 상실되어 있다. 자극이 내부에서 오는지 외부에서 비롯되는지 구분하지 못하고 현실감각을 잃게 하는 대표적인 증상이 바로 망상과 환각, 착각, 그리고 왜곡된 지각이다. 정상적으로는 없어야 할 증상이 “플러스(+)” 되어 있다 하여, 조현병에서는 이들을 “양성(+) 증상”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망상

망상은 사실이 아닌 것에 대한 잘못된 믿음이다. 특히 논리적인 대화나 설득, 과학적인 근거 제시와 같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정되지 않는 주관적이고 고집스러운 확신이다. 망상의 형성과 원인을 설명하는 다양한 심리사회생물학적인 접근이 있는데, 망상의 형성 과정도 나름의 이해와 확신을 위한 노력의 산물이다.

지각 자체를 잘못하고, 이를 이해하려다 현실검증력을 잃게 되는 경우도 있고, 비정상적인 경험에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인지 반응을 보이지만 이것이 반복됨에 따라 좀 더 특이한 가정과 해석이 더 들어맞아 그 잘못된 생각의 진실성이 강화되는 경우도 있다. 동일한 경험이 반복되고 거기에 관계성과 논리로 망상을 체계화하여 설명하고, 이상 지각까지 덧붙으면 망상이 강화된다. 환자 입장에서는 망상이 잘못된 해석이나 부조리한 것이라는 의식이 없이, 뭔가 기이한 상황이나 사실에 대한 일종의 맥락화이자 퍼즐 맞추기가 진행 중인 것이다.

정신병 환자들이 갖는 망상의 세계에서는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기이한 일들이 벌어지고 현실감 있게 펼쳐진다. 환자는 망상에 빠져들어 실제로 느끼고 경험하다 보니 맥박 수가 증가하고 환청에 따라 청각 중추가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 현대 기능성 뇌 자기공명 영상(fMRI)의 소견이다. 망상이라는 것이 어느 날 갑자기 생기지는 않는다. 정신병 환자의 망상 연구에 대가인 카푸어(Kapur)에 따르면, 초기에는 환자들이 “의심”을 하게 되고, 이 사고에 대해 논리적으로 “공고화”시키는 단계가 있다. 기이한 현상에 대한 나름의 논리적인 구성을 위해 환자들이 애쓰는 작업이 가미된다는 이야기이다. 그 사고가 공고화되기 전, 의료진과 약물이 개입하고, 환자의 의식에 망상이 들러붙는 것을 막으려는 것, 그래서 망상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기 전에, 그 의심의 불꽃부터 잠재우려는 것이 우리네의 노력이다.
 

▎환각

실재하지 않지만 마치 존재하듯 지각하고 느끼고 판단하는 것이 환각이다. 자극이 실제로 있고 그것을 잘못 해석하는 착각은 일반인도 경험하지만, (입면환각이나 데자뷰 같은 정상 환각을 제외하고는) 감각 기관을 자극하는 외부 자극이 없음에도 마치 있는 듯이 지각하는 환시(幻視), 환청(幻聽), 환후(幻嗅), 환미(幻味), 환촉(幻觸)이 있다. 영화 『식스센스』에서 어린 헤일리 조엘 오스먼트가 하는 유명한 대사, “나는 죽은 사람들이 보여요(I see dead people)”는 환시의 대표적인 예이다. 자신을 간섭하거나 비웃고, 욕하고, 명령하는 환청으로 불쾌감에 괴로운 환자도 있고, 드물지만 칭찬과 찬양의 환청으로 행복에 겨워하는 환자도 있다. 5층 창밖에서 스토커가 계속 가스를 살포한다는 “피해망상+환후”를 호소하는 경우도 있고, 맛이 느껴진다거나, 누가 자꾸 자신의 몸을 더듬는다고 호소하는 등 다양한 모양새로 나타난다. 

일반인에게는 환각인 것이 환자들에게는 실재하는 실제의 것으로 여겨진다. 전술하였듯, 환각을 호소하는 환자의 기능성 뇌 자기공명 영상을 보면 실제 사물을 보고 소리를 듣는 듯이 청각, 시각 영역이 활성화된다. 일·이차 감각 피질의 구조적, 기능적인 이상으로 환각이 시작되더라도 뇌에서는 실제 감각영역이 과활성된다. 그렇다 보니 환자의 입장에서는 자신만이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는 격이다.

 

■ “모든 증상에는 이유가 있다”

증상은 환자 나름의 채워 넣기 과정, 맥락화의 시도를 담고 있다. 이상한 반복적인 경험과 생각을 잘못된 논리로 해석, 공고화하고, 자신에게 들리고 보이는 것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그 자신도 현 상황과 증상을 이해해보고자 부단한 노력을 하는 것이다. 문제는, 아닌 것에 집착하는 열심이고 그것이 모두를 안타깝게 한다.

이것은 증상과 치료, 환자와 의사에 얽힌 병원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의 일상에도 적용된다. 사람이나 상황의 단면만 볼 때는 판단이 온전치 못하고 심지어 일을 그르치기도 한다. 여러 상황을 고려하여 의미를 부여하고 이해하기 위한 다각적인 해석과 다양한 관점, 맥락을 함께 살피는 입체적인 시선과 아량 있는 경청이 요구된다.

언어는 대개 중의적이어서 문맥을 떠나서는 정확한 의미 파악이 어려운 경우가 있다. 입으로 발화된 언어의 의미와 내적인 의도를 읽어내기 위한 몸과 마음의 눈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언어 사용의 맥락을 들여다보는 화용론의 자세가 요구된다. 비단 언어 해석뿐 아니라 삶의 언어, 증상의 언어와 비언어적 표현도 그러하다. 크리스티안 마두스베르그가 『센스메이킹』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역설하듯 “누군가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건 그 삶의 맥락을 함께 공유했을 때 가능”하다. 마치 영국 동화책에 등장하는 납작한 진저브레드맨에게 짱구 머리가 생기고 통통한 몸통이 생겨 건실한 몸으로 입체적인 공간을 뛰어놀 듯, 각 사람의 삶의 시간과 경험에 귀 기울여 통합된 입체로 마주하자 다짐해본다.

 

■ 퍼즐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한때 세인들의 탄성을 자아내던 광고가 있다. “큰 고래를 그리는 아이”가 그것인데, 초등학교 미술 시간,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그려보는 시간에 한 아이는 도화지를 온통 검은색으로 색칠한다. 의아하게 여긴 교사는 이 일을 학부형에게 걱정스레 알리고 아이는 침묵한다. 결국, 정신 상태 평가를 위해 인근 병원, 이후 상급 병원에 보내지고, 아이는 쉬지 않고 수십 장의 도화지를 검게만 색칠한다. 사무실에서 발견한 퍼즐 조각에서 힌트를 얻는 간호사는 검은색과 흰색 도화지로 난장판이 된 공간에서 검은색 도화지를 퍼즐 삼아 연결해나간다. 이에 다른 의료진들도 함께 아이의 그림 퍼즐 맞추기에 참여한다. 아이는 마지막 한 장을 완성하고 색칠하기를 마친다. 체육관을 가득 메운 도화지 퍼즐의 완성작은 큰 고래였다. 그리고 다음 문구가 제시된다.

How can you encourage a child? 

Use your imagination.

(아이의 잠재력을 키워주는 데는 어른들의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아이를 격려하려거든 상상력을 사용해보라는 것, 환자와 그의 증상을 이해하고 그 삶을 격려하기 위해서도, 우리 곁의 사람들과 관계를 풍성하게 이어가기 위해서도 넓은 시각으로 입체적으로 보고 그 삶의 맥락을 함께 살피는 안목이 필요하지 않을까.

 

■ 오렌지 불꽃 다시 태우도록

그로부터 2주가 지났다. 여전히 길가다 끽연가를 마주치면, 꽁초에 살고 있다는 “작은 사람”이 떠오른다. 그들의 구원자였던 나의 환우는 다행히 안정을 되찾았고, “작은 사람”에게서 어느 정도 벗어난 듯하다. 혹은 티 나지 않게 그들과 대화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담배 연기 허공에 흩어지듯, 구름이 바람에 옅어져 가듯, 이들의 아픔도 희미하게 사라져 그 맑고 크고 또렷한 눈빛으로 서로를 응시하고 세상을 밝히 보며 살아가길 바란다. 의심의 불꽃으로 활활 타오르는 망상이 아니라 희망의 새 불꽃을 태우길. 그래서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키어/ 곧 주위 사람들 그 불에 몸 녹이듯이”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풍성하고 돈독한 삶 뜨겁게 불태우길 응원한다.

 

■ 참고문헌

크리스티안 마두스베르그 저, 김태훈 역. 『센스메이킹: 이것은 빅데이터가 알려주지 않는 전략이다(Sensemaking: The Power of the Humanities in the Age of the Algorithm)』 서울:위즈덤하우스, 2017.

Kapur S. “Psychosis as a state of aberrant salience” Am J Psychiatry 160(1), 2003.

Seeman M. “On delusion formation” Can J Psychiatry 10(2), 2015.

 

* 대한정신건강의학과 봉직의협회는 정신건강의학과 봉직의들로 구성된 비영리단체로, 일선 정신건강의학과 진료현장의 불합리한 제도를 개선하고 정신건강의학과 봉직의들의 권익과 처우를 증진시키며 이를 통해 환자의 치료받을 권리 보호와 정신 건강 향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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