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경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지난 5월, WHO의 제11차 국제 질병 표준분류 기준에(ICD-11)에 만성적 직장 스트레스 증후군으로 정의한 `번아웃증후군(Burnout Syndrome)`을 직업 관련 증상의 하나로 분류하고 이전보다 좀 더 세분화된 증상 기준을 제시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의학적인 질병은 아니지만 `건강 상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자`로 판단한다는 의미이며, 이것이 현재 번아웃증후군에 대한 업데이트된 잠정적 정의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밖에 WHO는 새 기준에서 트랜스젠더리즘(transgenderism· 성전환)을 정신질환 목록에서 삭제했고, 게임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게임 이용 장애(gaming disorder)’를 질병으로 분류해 국내에서 논란이 거세다.

어쨌든, ICD-10에도 번아웃이 기재돼 있었다. 다만 이전 버전에서 번아웃은 '생활관리의 어려움과 관련한 문제' 분류에 속해 있었고, 그 증상도 '활력이 소진된 상태'로만 설명됐다. ICD-11에서는 번아웃 증상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만성적인 직장 업무 스트레스 증후군'으로 정의해, 다른 스트레스 장애나 불안장애, 기분장애와는 완벽하게 구분했다. 이와 함께 WHO는 번아웃의 세 가지 증상을 제시했는데,

· 에너지의 고갈과 피로감
· 직장이나 업무와 관련한 거부감, 부정적인 생각의 증가, 냉소주의
· 업무 효율의 감소 등이다.

 

사진_픽셀

 

'번아웃(소진, burn-out)'은 언론의 꾸준한 관심을 받는 일종의 대중 현상이 되었다. 번아웃증후군으로 결근하는 사람도 있고, 출근길에 차라리 교통사고라도 나기를 비는 사람들도 흔하다. 이런 일련의 증상들이 분명히 정의되어있는 병일까? 우울증과 탈진이 어떻게 다른가? 아직 많은 의문들에 대해 확고한 정답은 나오지 않은 상태이다.

하루 수면 시간이 2시간도 안될 때도 다반사였던 인턴 시절, 24시간 병동과 응급실 당직을 책임지며 기괴한 망상과 폭력적인 행동장애, 마약 관련 급성 증상 및 금단 증상, 자살 충동과 자살 시도 환자들에게 시달리면서 2주마다 단 6시간가량의 휴식만이 보장되던 전공의 1년 차 시절을 되돌아보면, 번아웃 증후군의 증상이 무엇인지 솔직히 교과서나 문헌을 공부하지 않아도 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번아웃(소진, burnout)’이라는 용어는 1970년대에 미국의 정신분석가 프로이덴버거(Herbert Freudenberger)가 처음 정의 내렸다. 그는 중독 관련 장애의 심리 상담에 종사하는 직원들을 관찰하다가 ‘다른 사람을 돕는 직업을 가진, 심한 스트레스와 높은 이상을 가진 사람들’의 부정적인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번아웃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예를 들어 의사와 간호사들처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상당 부분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들이, 그의 관찰에 의하면, 마지막에는 지치고 기운이 다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번아웃(탈진)’ 상태로 끝나곤 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이 용어는 남을 돕는 직업, 또는 자기희생에 뒤따르는 어두운 측면에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연예인에서부터 과로에 지친 회사원과 가정주부에 이르기까지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는 상황으로 본다. 흔히 의욕적으로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신체적ㆍ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하며 무기력해지는 현상을 통칭한다.

 

번아웃이 진짜 무엇인지에 대해 합의된 명확한 정의는 아직 없다. 그 결과 정확히 어떤 모습이며 어떻게 번아웃증후군을 진단해야 할지도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아닌 다음에야 막연하고 불분명하다. 명확하지 않으니 번아웃증후군이 얼마나 흔한지, 얼마나 치료되며 어떤 예후를 보이는지 등도 자신 있게 언급하기가 힘들다.

언론에는 제각각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기 때문에 더 혼란스럽다. 독일의 어떤 민간 의료보험 회사는 독일에서 총 800만 명가량이 번아웃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고 보고하기도 했고, 국내 한 취업포털에서 직장인 5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대상의 95.1%가 번아웃증후군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는 보도도 있었다. 그러나 어떠한 역학 연구이건, 명확한 질환의 정의가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야 조사 결과를 신뢰하기가 어렵다.

 

번아웃(Burn-out)은 의학적인 문제인가?

스트레스 상황은 사람을 극도의 압박 속에 밀어 넣고, 지치고, 공허하고, 상황 변화에 대처하기 힘든 지점으로까지 이끌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업무에서의 스트레스가 신체적, 정신적 증상들을 야기할 수 있다. 지속적인 과로, 시간에 쫓기는 업무의 연속, 직장 내에서 발생하는 동료나 상사, 부하들과의 갈등 등이 그러한 업무 스트레스의 대표적인 원인이 된다. 교대 근무, 당직 근무, 휴일이나 명절의 의무적인 근무 등 자신의 욕구를 무시하고 희생해가며 극단적으로 헌신해야 하는 직업상 특수한 상황이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수도 있다. 병가, 질병 휴직의 가장 흔한 원인 중의 하나가 직장 내 스트레스이다.

번아웃은 통상적으로는 지속적인 스트레스에 대한 정상적인 반응을 표현하는 상황이며, 질병의 징후는 아니다. 번아웃의 정의를 스트레스에 대한 정상적 반응 이상의 일련의 심한 병적 증상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할 것인지, 아니면 적절한 수준 이상의 과도한 업무 관련 스트레스에 반응하여 일어나는 정상적인 반응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할 것인지, 전문가들은 아직 번아웃을 어떻게 규정할지에 대해서 완전한 합의를 도출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번아웃'이라는 진단은 없다. 이는 누군가 '번아웃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더라도, 예를 들어 '우울증'이라는 널리 알려지고 받아들여지는 진단을 받는 것과는 다른 상황인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등의 다른 질환들이 번아웃 증후군의 뒤에 도사리고 있다고 여긴다. 신체적인 질병들이나 특정 약물 등도 탈진(번아웃)에 가까운 유사 증상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므로 너무 빨리 ‘번아웃’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거나 스스로 진단 내리게 되면, 실제 존재하고 있는 더 근본적인 문제가 확인되지 않아,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할 위험도 있다.

 

* 2019년 5월 27일, WHO는 스위스에서 열린 총회에서 제11차 국제 질병 표준분류 기준(ICD-11)에 '만성적 직장 스트레스 증후군'으로 정의한 `번아웃증후군(Burnout Syndrome)`을 직업 관련 증상의 하나로 분류하고 구체적인 증상 기준을 업데이트하였다. 현재로서는 질병의 개념이 아니라 직업과 관련된 증상을 묘사하는 데 사용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합의가 가까워지고 있다고 보인다.

 

이어서 <번아웃증후군의 증상, 우울증과의 연관성>이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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