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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자살에 대하여

기사승인 2019.10.19  04:4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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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류 솔로몬은 그의 저서 한낮의 우울(The Noonday Demon)에서 자살에 대해 ‘그릇된 힘과 불행한 용기’의 결과라고 썼다. 그릇되었다는 것은 말 그대로 모든 본능 중에 제일인 생의 의지에 반하는 그릇됨이라는 것일 테다.

한 인간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만큼 커다란 불행이 있을까? 자살을 시도하고 자살에 도달하기까지 사람이 겪어야 하는 고통과 외로움은 상상을 초월하는 종류의 것이다. 그래서 자살은 보통 용기를 가진 사람으로서는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엄청난 용기가 스스로를 죽이는 데 사용되었다는 것이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행이라는 것이다.

 

사진_픽셀

 

그동안 나는 수많은 유명인의 죽음을 뉴스를 통해 봐 왔지만, 샤이니 멤버 종현의 죽음만큼 내 마음에 커다란 공명을 남긴 사건은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의 팬도 아니었다. 비슷한 나이 때문이었는지, 그가 데뷔 후 톱스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오래도록 지켜보며 마음속으로 응원하던 사람 중 하나였기 때문인지, 가끔 그가 속한 그룹의 음악을 들었기 때문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떠난 이후 나는 자살이라는 단어가 생각날 때마다, 누군가의 자살 소식을 접할 때마다 그를 떠올렸다.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았고 그렇게 아름답고 재능 많던 젊은 청년이 홀로 그런 선택을 하기까지 어떤 생각을 했을지 되짚어보기를 반복했다.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구체적인 자살 방법과 자살 시기를 끊임없이 고민해 왔던 나에게 그의 자살은 나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나도 그렇게 해야겠다는 맹목적인 생각을 마음속에 다시금 새겨 넣게 했다. 당시 내가 썼던 일기에는 그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것이 자살의 베르테르 효과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자살에 대한 열망이 간절해지는 순간이 있다. 마음의 불이 모두 꺼지고 나면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과 함께 나를 고통 속에서 벗어나게 할 유일한 방법인 자살에 대한 생각만이 머릿속을 꽉 채우고 만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은 자살이라는 마지막 목표를 향한 준비단계일뿐이다. 이 식사를 마치고 나면, 이 사람을 만나고 나면, 이 일을 끝내고 나면 나는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어디가 내 마지막을 맞이하기에 적합한 장소인지를 물색하기 위해서만 머릿속은 바쁘게 움직인다. 고통도 슬픔도 없이 무감각해진다. 그렇게 되면 삶을 향한 강렬한 의지나 살고 싶다는 생각들은 자살사고에 함몰되어 의미 없는 중얼거림으로 허공에 흩어진다.

 

2019년 05월 19일, 나는 자살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날은 병원 예약이 있던 날이었다. 회사에 있는 내내 나는 병원을 가야 하는지 가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미 없는 저울질을 반복했다. 하지만 나는 규칙을 깨는 것을 죽기보다 더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결국 나는 의사선생님을 만나 나의 이러한 상태에 대해 간략히 털어놓았다. 자살을 선택해 영원히 쉬고 싶다고.

선생님은 사고 칠 것 같은 날에는 꼭 자기에게 말해달라고 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이 환자 스스로가 자살에 대한 강렬한 욕구를 느끼는 날을 ‘사고 칠 것 같은 날.’이라고 표현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나에게는 그날이 사고 칠 것 같은 날이었다. 그토록 강렬하게 나를 파괴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처음이었다. 트리거가 될 만한 특별한 사건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날이었다.

당시 나에게 선생님은 세상과 남은 마지막 끈 같은 것이었다. 그날 나는 선생님을 만나고 집에 가는 대신 죽으러 가려 했다. 고층 빌딩 몇 개를 이미 봐 두었고, 남은 것은 거기 올라가 뛰어내리는 것뿐이었다. 어차피 선생님은 바쁜 사람이니 나를 막지 못할 것이다. 내 시간 이후에도 계속 환자가 기다리고 있고 면담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그사이에 내 마음을 돌이킬만한 말을 할 수 있을 리도 없다. 머리로는 모든 것을 정리했는데 마음은 그러질 못했다. 나는 계속해서 울었다. 오늘이 선생님이 말하는 사고 칠 것 같은 날이라고 말하며 울었다.

-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다른 환자들 다 보고 다시 봐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눈물이 계속 나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을 다시 본다고 해서 뭐가 더 나아질까? 나를 죽이고픈 나는 여전할 텐데. 나는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 밖에 잠깐 나갔다 올게요.
- 꼭 다시 와요. 소지품은 병원에 두고 가요.

내 생각을 읽은 것 같은 선생님의 말에 나는 또 대답을 미루었다.

- 안 그러면 직원 시켜서 못 나가게 할 건데?

선생님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다정했다. 너무 다정해서 눈물이 더 났다. 내가 선생님이 내민 손을 잡게 되면 나는 또다시 우울하고 불안하기만 한 이 삶을 다시 살아내야 한다. 반대로 선생님의 손을 잡지 않으면, 잠깐의 고통만 버텨낼 수 있다면, 나는 그토록 원하던 영원한 자유를 얻게 된다.

- 다시 올게요.

나는 가방을 두고 병원을 나섰다. 자살에 대한 생각은 나를 떠나지 않았지만,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켰다. 모든 환자들을 보내고 다시 나를 맞은 선생님은 나를 웃겨 주었다. 실력 있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환자를 웃게 만든다고 했다. 그날 나는 정말 운이 좋게도 실력 있는 전문의를 만났다고 느꼈다. 물론 그 이후에 내가 선생님에게 실망할 만한 일들이 생겨 치료중단에 대한 고민도 여러 번 했지만, 고민만 했을 뿐 실제로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아마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붙잡아줬던 그 날의 기억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날은 선생님이 내 주치의여서 정말 다행이라는 마음과 퇴근을 미뤄가면서까지 내 손을 잡아준 선생님에게 아직도 감사함을 느끼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자살 위험성을 가진 환자에게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와의 면담과 약물치료는 필수다. 약물치료와 면담이 환자의 삶을 지속시켜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이것도 치료를 지속하고자 하는 마음과 약을 먹고자 하는 개인의 선택이 없으면 결코 도달하지 못할 환상에 불과하다. 매 순간 사람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은 자잘한 선택들이고, 죽음에 대한 선택만이 남는 순간 사람은 정말 죽게 된다. 삶을 지속하고자 하는 열망과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찾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의사도, 아무리 좋은 약도 필요가 없다. 불행히도 삶의 지속성에 대한 의미를 찾는 것은 전적으로 본인의 몫이다.

무엇이 나를 지금까지 살아있게 했을까. 별로 깊게 파고들 필요도 없이 분노가 나를 살아 있게 했다. 나를 고통스럽게 한 세상에 대한 분노, 저런 사람도 악착같이 살아가는데 억울하게 나 혼자 죽을 수는 없다는 강렬한 분노가 나를 떠나지 못하게 했다. 분노 외에도 다른 것들이 있었다. 예술에 대한 열정,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 엄마의 사랑 등 여러 이유가 삶에 대한 미련으로 남아 내 목덜미를 끌어당기고 내 발을 멈추게 했다.

‘미성숙한 사람의 표식은 고매한 명분을 위해 목숨을 끊고 싶어 한다는 것이고, 성숙한 사람의 표식은 겸허한 명분으로 살아가기를 택한다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이 지금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늙어 죽을 때까지 사는 사람 중에 성숙한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수도 없이 봤기 때문이다. 이기적이고, 욕심 많고, 남에게 피해주고, 무감각하고, 걸핏하면 화를 내고, 폭력적이고, 소리를 잘 지르고, 가진 것을 베풀지 않는 사람들이야말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는 말을 삶의 모토로 삼고 악착같이 남을 짓밟으며 살아간다. 이런 사람들이 성숙한 사람들일 리가 없지 않은가? 삶을 일찍이 끝낸 사람들 중에는 이런 사람들로 인해 치이고 상처 받고, 나락으로 떨어지고, 끝끝내 당하기만 하다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이 눈물 많은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자신의 수명대로 잘 살았다는 것 이유 하나만으로 그런 사람에게 성숙한 인간의 표식을 준다니, 비딱하기 그지없는 내가 분노하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 말은 정말 이상하게도 자살을 결심하고 그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려 할 때마다 내게 나타나 나를 붙들었다.

생각해보니 아주 오래전부터 내게는 작은 소망이 하나 있었다. 성숙한 사람이 되어 타인을 보듬어 안고, 타인을 배려하는 그런 이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물론 타인을 끌어안기 이전에 성숙한 사람이 되면 나 자신을 제일 먼저 보듬어 안아 주고 싶었다. 그렇게 되면 자살이라는 생각이 나에게 파고들지 않을뿐더러 더 이상 이런 생각 때문에 괴롭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오죽하면 2번째 전공인 철학 졸업 논문의 끝에 ‘시간성 속에서 시숙(성숙하여 익어감)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라고 적었을까.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 성숙을 이뤄내는 것은 너무도 요원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싫어하는 인간들이 자기 수명대로 잘 살았다는 것 하나로 성숙한 인간이 되어 삶에 대한 면죄부를 얻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나 또한 그렇게 오래 살고 싶다는 열망이 간절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 ‘희망은 날개를 가지고 있는 것’의 저자인 에밀리 디킨슨의 묘비명은 ‘돌아오라는 부름을 받았다’라고 한다. 참으로 절묘한 묘비명이다 싶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이후에야 비로소 그 말이 무엇을 내포하고 있는지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이 고통 많고, 험악하고, 거칠고, 불안하고, 우울하고, 힘겹고, 처절하고, 나를 마비시키는 두려움과 모든 기쁨으로부터 벗어나 모든 영혼의 고향인 안식의 땅으로 돌아올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차피 나 스스로 끝내지 않아도 언젠가는 끝날 인생이라 했다. 그리고 그때가 오면 사람은 결코 그 삶을 길었다고 여기지 않는다. 더 살면 살수록 아쉬운 게 인생이라고. 

나 또한 정말 그러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내 삶에 감사하고, 살아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기뻐하고, 내가 누리는 오늘이 누군가가 간절히 바란 내일이었다는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를 가치 있게 보내고 싶다. 그리하여 내 삶이 끝나는 어느 날에는 나를 알고 지냈던 사람에게는 눈물보다는 사랑을, 행복했던 기억을 남기는 그런 사람이 되어 이 땅을 미련 없이 훌쩍 떠나고 싶다.

 

내가 살아있는 한, 자살사고는 나를 끊임없이 따라올 것이다. 이미 수도 없이 경험한 일이다. 탯줄이 스펙인 시대에 돈도 든든한 빽도 없이 태어난 너는 아주 초라하고도 보잘것없는 인생을 살 것이라고, 그렇게 좋은 대학을 나오지도 못했으니 사람들은 네가 하는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너는 아주 비루하게 살 수밖에 없는 인생을 붙들고 씨름하는 것뿐이라고, 너처럼 예민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해줄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너처럼 고통에 민감한 사람에게 삶을 지속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고통이라고, 나만이 아는 내 온갖 약점을 들먹이며 죽음을 택할 것을 종용한다.

더 이상의 노력이나 견딤이 필요 없는 죽음이야말로 나를 위한 가장 좋은 선택이라는 말은 때때로 나에게 가장 달콤한 유혹이 된다. 나는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사람이니 그 노력이 필요 없는 길에 대해 고민하는 것 또한 당연하다.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이 설득력 있는 목소리에 이끌려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을 넘을 거다. 하지만 이제껏 그래왔듯 마지막 순간이 되면 나는 그 목소리로부터 단호히 등을 돌려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아직은 아니라고,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돌아가라고.

 

13살의 나는 삶에 대한 후회로 목을 조이던 끈을 더 세게 조이지 못했다. 24살이던 추운 겨울, 울면서 아파트 난간을 붙들고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보던 나는 뛰어내리려던 순간에 이렇게 죽고 싶지 않다는 내 마음속 외침을 듣고 다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셰익스피어는 아주 오래전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마음속에 들어가 문을 두드리고 그대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보라.’라고. 이 말을 알기 훨씬 전에도 나는 내가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지 알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내가 살아 있는 건 내 마음이 확실히 살고 싶다고 얘기해서가 아니다. 이렇게 죽고 싶지 않지만, 이렇게 살고 싶지도 않다는 두 마음이 너무 팽팽하게 맞서 싸우고 있어 도무지 한쪽으로 기울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살면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이가 과연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런 사람이 어디 있든 쫓아가 묻고 싶다. 당신이 얼마만큼의 행운을 가지고 태어났는지 과연 알고 있느냐고.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살 바엔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지만, 그 가운데 정말 죽음을 택하는 소수다.

그 사람들이 삶이란 한 번 살아볼 만한 가치가 충만해서, 삶의 의미에 대한 엄청난 깨달음을 얻어서 그랬을 리는 만무하다. 결국 그들은 작디작은 희망에 모든 것을 걸어보기로 선택한 것이다. 내일 내가 어제의 나보다 나을 거라는 작은 기대, 내일의 내가 복권에 당첨될지도 모른다는 소망, 어제보다는 나아질 나의 기분, 내일 나를 매혹시킬 무언가가 등장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삶을 지속하기를 택한다. 그 일이 정말 일어날지를 알려면 오늘의 나는 살아있기를 택해야 한다. 정말 당연하게도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이 가져다줄 가능성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반대로 자살은 그 가능성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걸 거부하고 죽음을 선택하는 것 또한 개인의 선택으로 존중받아야 한다. 양비론자라고 욕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고 비난하고 싶지 않다. 무엇으로도 덮을 수 없고 어떤 것으로도 경감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의 무게는 분명 존재한다. 사람은 각자 처한 상황이나 발휘할 수 있는 힘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 가능한 행동이 왜 다른 사람에게 불가능한지를 질문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불의의 사고가 일어난 원인에 대해 따지는 것이 별 의미가 없듯이 그저 그렇게 귀결될 수밖에 없는 일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누군가에게는 시작부터 가로막히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물 흐르듯 자연스레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아주 미미한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그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고 희망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나 자신에게도 하는 말이지만, 겨자씨만큼이나 조그마한 가능성이라도 붙들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희망은 분명 있다. 세상에는 더 이상 살지 말아야 할 수십수백 가지의 이유가 있지만,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지는 순간 죽음에 대한 이유는 힘을 잃는다. 삶에 대한 희망 자체가 삶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명작의 반열에서 늘 빠지지 않는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앤디는 레드에게 이렇게 말한다. 희망은 좋은 것이고, 좋은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고. 앤디는 결국 모진 역경을 견디고 살아남아 쇼생크를 탈출하고 자신이 원하던 인생을 쟁취한다. 이렇듯 일단 우리가 기회를 주기만 한다면, 희망은 자신이 얼마나 강인한 것인지를 그 사람의 인생을 통해 증명해 낸다.

 

희망은 날개를 가지고 있는 것.
영혼 속에 머물면서
가사 없는 노래를 부르면서
결코 멈추는 일이란 없다.

광풍 속에서 더욱더 아름답게 들린다.
폭풍우로 괴로워하리라,
이 작은 새를 당황케 하여
많은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었는데.

얼어붙은 듯 추운 나라나
멀리 떨어진 바다 근처에서 그 노래를 들었다.
그러나 어려움 속에 있으면서 한 번이라도
빵조각을 구걸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 에밀리 디킨슨 ‘희망은 날개를 가지고 있는 것’

 

사진_픽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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