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에 대하여 (1) 에서 이어집니다.

 

내가 반지에 새겨진 죽음의 머리를 굳이 보아야 할까?
내 얼굴에 이미 새겨져 있는 것을.

- 존 던 ‘뜻하지 않았던 일들에 대한 묵상’ 中

 

나는 다시 이전의 나로 돌아왔다. 약을 증량하며 나아지는 것 같다고 느낀지 불과 한 달 만이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자살사고도 나를 따라왔다. 나는 죽음을 사랑한다. 아무리 애를 써도 죽음에 대한 생각을 떨쳐낼 수 없으니 어쩌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깊고도 아이러니한 짝사랑을 지속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죽음에 도착하기까지 겪어야 할 고통만 아니라면 아마 나는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자살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쉬운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누구나 그렇듯 나는 고통이 제일 적은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래서 자살자에 대한 글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들이 택한 방법이나, 어떤 모습으로 발견되었는지에 대한 데이터를 머릿속에 쌓아나갔다.

조사가 어느 정도 진척된 이후에는 선생님과의 면담 시간에도 이런 얘기를 하곤 했다. 나는 끔찍한 일도 세상 흥미롭게 얘기할 수 있는 쓸데없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자살에 대한 자유연상이 유난히 고조되던 날이었다. 미소도 찡그리는 것도 아닌 애매한 표정을 짓던 선생님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고 자연스럽고 침착하게 내 말을 끊었다.

“○○씨는 정말....... 자살사고마저도 자기화시키는 것 같아요. 이렇게까지 깊게 파고드는 분은 별로 없거든요. 그런 생각들이 얼마나 자주 머릿속에 떠오르나요?”

 

내 얘기가 얼마나 듣기 힘들었으면 이렇게 말을 막았을까 싶었다. 그만큼 나는 끔찍한 것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어디서도 하지 못하는 얘기를 더 들어주지 않는 선생님이 야속하기도 했다.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지만 결국 나는 착실히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했다.

“거의 매일 생각해요....... 이런 삶을 왜 살아야 할까. 저 약을 먹는 지금도 조금만 기분이 좋지 않으면 다리가 아파요. 약을 먹어도 이렇게 아프고 지치고 힘든데, 언제까지 계속 살아야 하나요? 그냥 이젠 너무 힘들어서 쉬고 싶어요. 그냥 쉬고 싶어서 이러는 거예요. 살아 있으면 이걸 계속 반복해야 하니까....... 다 그만두고 쉬고 싶어요.”

고통 때문에 삶을 그만두고 싶었지만, 자살로 얻게 될 필연적인 고통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자살을 망설였다. 삶을 지속하는 것도, 삶을 끊는 것도 그만큼의 고통을 수반한다지만, 자살에 대한 열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계속 가보기로 했다. 나 스스로가 자살에 대해 얼마만큼 알 수 있을 것이며 어떤 방법을 택할지 궁금했던 것이다.

 

사진_픽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길을 잃었다. 어떤 방법을 택해야 할지 도무지 결정할 수가 없었다. 내 몸은 한 개인데, 죽을 수 있는 방법은 너무나도 많았다. 만약 내가 어떤 방법을 선택했다 해도 그게 최선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고통이라는 감각은 너무나도 주관적이라 누구에게는 참을 만한 것도 다른 누구에게는 힘든 것일 수도 있다. 게다가 그나마 덜 고통스럽다는 방법도 그걸 선택한 사람이 ‘내가 이 방법을 썼더니 덜 아프게 죽는 것 같다. 자살하려는 사람들은 참고하라’라고 직접 기술한 것도 아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이 짧았으니 이 방법이 고통이 적은 것 같다고 과학에 근거에 추론한 것뿐이다. 그 방법이 제일 쉬운지는 직접 경험해 본 자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아는 것처럼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내가 죽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끝난 것도 아니다. 가족들은 내 시신을 보고 그게 나라는 사실을 확인해줘야 한다. 가족들의 충격을 조금이나마 경감시키려면 그나마 시신만큼은 온전해야 한다. 그래서 신체를 심하게 훼손시킬 수 있는 방법은 제외해야 했다. 그렇게 선택지는 또 줄어들었다. 자살에 대한 선택지가 줄어들었다 해서 자살이 더 쉬워진 것은 아니었다. 쉬운 방법을 두고 굳이 멀리 돌아가야 했으므로 결정은 계속해서 미뤄지고 있었다.

 

유서를 먼저 쓰기로 했다. 구구절절한 말을 남길 생각은 없었다. 두 줄이면 충분하다 생각했다. 그렇게 간결하면서도 마지막 인사가 되기에 적합한 말이 무엇일지 여러 날을 고민했다. 그러면서 나의 장례식에 대해 생각했다. 아빠는 침통한 표정으로 내 영정 앞에 우두커니 서 있을 거고, 엄마는 아마 그 자리에 있지도 못할 것이다. 문상객들은 젊은 나이에 뭐가 그리 급해서 빨리 떠났냐며 한 마디씩 보탤 것이며, 누군가는 아무렇지도 않게 육개장에 밥을 말아먹을 것이다.

상상력의 범위를 최대한 늘려 자식을 앞세운 부모의 마음이 어떨지를 짐작해 본다. 내가 삶을 주었고, 내가 세상을 가르쳤고, 목숨을 주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던 내 아이가 삶이 싫다며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이렇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자책의 쳇바퀴 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는 내 선택과 무관하게 이 세상에 던져졌다는 사실을 증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를 낳아 기른 부모에게 그런 상처를 줘도 되는 것일까?

 

다시 자살방법을 고르는 문제로 돌아가자면, 내가 고려해야 할 것은 고통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자살이 실패했을 때 입을 영구적인 장애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자살 실패를 방지하려면 가장 치명적인 방법을 선택해야 하는데, 그 방법은 시신 훼손이 불가피하고, 나의 두려움을 자극하는 방법일 가능성이 크다. 시도의 두려움이 커지면 실패의 확률도 그만큼 증가한다.

이런 내가 안락사를 떠올린 건 어쩌면 가장 합리적인 결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공교롭게도 나는 대학 시절 안락사를 다뤘던 책으로 발제를 한 적이 있다. 게다가 자살사고에 가장 격렬하게 시달리던 시기에 읽은 책은 조조 모예스의 소설 ‘미 비포 유(Me before you)’였다. 두 책 모두 안락사를 돕는 단체인 ‘디그니타스(Dignitas)’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디그니타스는 말 그대로 존엄한 죽음을 돕는 곳이다. 자살 실패로 인해 개인이 겪어야 하는 고통이나, 사회적 비용을 경감하기 위해 가장 깔끔하고 고통 없는 자살을 보장하는 이 병원은 이전부터 많은 이들의 마지막을 함께했다. 나는 당장이라도 돈을 내고 디그니타스 회원이 되고 싶었다. 아니, 스위스로 날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월급쟁이 개미인 내가 죽겠다고 스위스에 가는 건 소설 속에서나 있음직한 얘기였다. 결국, 나는 ‘존엄한 삶을 위해서도, 존엄한 죽음을 위해서도 돈이 필요하다.’라는 심오한 결론만 얻고 돈을 더 열심히 모으기 시작했다.

 

미국 드라마 ‘White Collar’에는 주인공 카프리와 모지가 돈이 필요할 날(rainy day)을 위해 ‘rainy day account’를 준비하는 얘기가 나온다. 그들처럼 나도 나만의 계좌를 만들었다. 그들의 계좌가 앞으로의 도망을 위해서였다면 나의 계좌는 존엄한 죽음을 위해서였다. 그렇게 나는 충분한 돈이 쌓일 때까지 죽음에 대한 시도는 잠정적으로 중단하기로 마음먹었다.

무언가를 거절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 무언가를 계속해서 미루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나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우울증 환자들이 자신의 죽음을 계속해서 미뤘으면 한다. 오늘 죽고 싶더라도, 천장에 끈을 매 두었더라도, 지금 옥상 난간 앞에 서 있더라도 말이다. 한 번쯤 뒤를 돌아보며 ‘화분에 물을 주는 것을 깜박했네, 숙제를 내야 하는데, 유서를 제대로 쓰지 못했네, 누구와 충분한 인사를 나누지 못했네, 마지막으로 배는 채우고 가야지’와 같은 갖은 핑계를 대며 죽음에 대한 시도와 멀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그 언젠가가 굳이 오늘일 필요는 없다.

 

사진_픽셀

 

오랫동안 고통뿐인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질문하며 나름의 답을 찾았다고 생각했으나 다른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받으면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동문서답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영원한 고통 같은 건 없다(There is no such thing as a permanent pain)’라고 답하려 한다.

고통 속에서의 삶은 영원한 고통만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고통과 슬픔은 영원하지 않고 지나간다. 우리가 불완전하다고, 가장 초라하다고 믿는 모든 순간은 영원하지 않으며, 기대와 달리 전적으로 완벽한 순간이라는 건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개개인의 존재란 불완전함이 모인 덩어리와도 같은 것이다. 나를 포함한 세상 어느 것도 완벽하지 않다. 힘들지만 그걸 받아들여야 한다.

 

무엇보다 고통과 나를 분리해서 볼 줄 알아야 한다. 내가 이러한 고통이 없었더라면 어떤 삶을 살았을 것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 봐야 한다. 만약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이 고통 때문이라면, 고통이 없을 때의 내가 어떻게 스스로를 지켜낼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많은 우울증 관련 서적이 언급하는 것처럼 치료와 회복에 대한 상상력을 끊임없이 발휘해야 한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노력해야 하는지 회의감이 든다 해도 달라질 나에 대한 기대를 놓아서는 안 된다. 그것이 가장 효과적인 치료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스스로에게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해야 한다. 지금의 내가 모든 신체적, 정신적 고통에 함몰되어 지옥 같은 오늘을 보낼지라도, 내일의 나에겐 오늘보다 더 나은 삶을 선물하리라 다짐해야 한다. 죽음에 대한 생각 자체는 끊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 대신 죽음을 가려 줄 삶을 소환하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살아 있는 동안 나는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넣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예전에는 내가 왜 이렇게까지 노력해야 하냐며 화를 냈지만, 막상 받아들이니 별것 아닌 일상처럼 여겨진다.

슬프게도 나는 계속해서 삶을 붙잡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하지만 어쩌면 내가 진정으로 계발해야 할 능력은 불완전한 나 자신과 고통 속에서 어긋난 순간들도 놓지 않고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너에게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하는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한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에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 나희덕 ‘푸른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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